떨어진 천조각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빗방울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봄은 손끝에 묻어난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
“바람은 많이 안 부네. 적당해.”
그리고 곧 열린 창문을 닫았다. 그새 창문의 틀에 빗방울이 조금씩 고여 있었다. 봄은 고개를 돌려 다시 테이블로 걸어왔다.
“구야, 가게에서 왼쪽으로 한 블록 더 가서 오른쪽에 꺾으면 있는 카페. 알지?”
봄은 그에게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손을 들어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아, 알아요. 배달주문 카페 사장님네 말씀하시는 거죠?”
“응응. 지난달에 배달주문 왔던 곳.”
“알겠어요. 지금 가면 되는 거죠?”
민구는 연분홍빛의 앞치마를 앉았던 테이블에 걸치며 일어났다. 봄은 가뿐한 걸음으로 아침에 가지고 나왔던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
“차 조심해서 갔다 와.”
“네.”
민구는 우산을 건네받고는 잠시,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봄은 그러한 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왜?”
“조금 전 하신 말이요.”
“방금?”
“약간… 부부끼리 하는 말 같았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나 했는데,
봄은 요즘따라 부쩍 저런 말랑콩떡 같은 말을 쑥스러워하면서도 꿋꿋이 말하는 민구 때문에 조금씩 긴장을 해야만 했다. 군필에 스물 셋이면서, 가끔 제게 건네는 말들은 미성년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간지럽고 현실을 모르는 것 같은 철없는 말들이라면 질색이었는데.
봄은 두 손으로 민구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당황한 민구는 멀뚱히 눈만 끔뻑였다. 거부하지 않은 덕분에 머리는 방금 일어난 것처럼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 어수룩한 모습에 봄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큽…”
“갑...자기 뭐에요?”
민구는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시 손으로 빗어내리며 물었다. 여전히 멍했다. 무슨 반응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귀여운 말을 하면 어떡하냐. 안 그래도 언제 냠냠 먹어버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먹어요? 뭘…. 아.”
민구는 묻기 전에 홀로 대답을 찾은 듯 뺨을 붉혔다. 봄은 일부러 그를 더 놀리고 싶어져서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봄에게서 한 발치 멀어졌다. 그리고 얻어맞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리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빨리 배달 가기나 해~!엉큼한 생각하고 있지 말고.”
“사장님이 먼저 야한 말 하셨으면서…”
민구는 말랑한 그의 입술을 슬쩍 삐죽거리며 꽃바구니와 우산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봄은 그가 열고 나간 문을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좋다니까.
하지만 기분 좋음도 잠시,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가 조용한 가게를 가득 채웠다.

민구는 화사한 하늘색의 우산을 들고 천천히 배달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호기로운 걸음도 잠시, 민구는 당혹감에 멈춰 섰다.
비는 수직으로 내렸다. 하지만 그 빗물의 양은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 과장되게 표현해보자면 오 분 동안 물을 받으면 욕조를 가득 채울수 있을 것 같았다. 나온지 삼분 차 되지 않아 민구가 신은 운동화는 흠뻑 젖어버렸다.
가게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질수록 조금씩 발끝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참고 가려 했다. 하지만 지금 발 상황을 봤을 때, 거의 두 발을 호수에 담갔다가 뺀 수준이라. 얼른 몸을 돌려 가게로 향했다.
최대한 물웅덩이는 밟지 않으려 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는 요란했다. 웅덩이는 아니었지만, 물이 튀는 양은 웅덩이를 밟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발이 보도에 닿을 때마다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온 사방팔방을 뛰었다. 이 때문에 빨리 뛸 수도 없었다. 바지 밑단이 젖어가는 걸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물이 뚝뚝 흐르는 우산을 다시 곱게 접어 문 옆에 기대두고서 가게 유리문을 열었다. 봄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다 갑자기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뭐야?”
“신발이 완전 풍덩 젖어서요… 참고 갈려고 했는데..”
“나간 지 십 분도 안됐는데, 그 정도야?”
“비가 너무 와서 물이 빨리 지하로 못 빠져나가나 봐요.”
봄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테이블 위에 엎드려 놓았다. 그리고 카운터 서랍장을 열어젖혀 뒤적거리더니, 검은색의 삼선 슬리퍼를 꺼냈다. 민구는 테이블 가로 가까이 갔다. 봄은 그 앞에 검은색 슬리퍼를 놓아주며 말했다.
“처음부터 슬리퍼 신을 걸 그랬네.”
민구는 얼른 흠뻑 젖어버린 운동화를 벗었다. 축축한 양말 두 짝도 다 벗어내니 그나마 찝찝함이 좀 덜했다. 여전히 발가락 사이가 촉촉하긴 했지만.
“세상에 바지도 다 젖었네!"
“밖에 완전 물바다에요. 휴… 다시 갔다 올게요.”
“에고… 조금 수고해줘. 아 참.”
봄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민구에게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민구가 받지 않고 멀뚱히 보고만 있자, 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카페가서 너 먹고 싶은 간식이나 음료 사와. 난 그냥 커피면 되니까 나머진 네가 아무거나. 비 좀 그칠때까지 있다와도 좋고."
봄은 그의 바지 앞주머니에 카드를 넣어주었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니,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나마 조금 전보다 나은 것은 이제 발이 한결 자유롭다는 정도.
일 센티 가량 빗물이 차오른 도롯가를 건너 한 블록 앞까지 걸어갔다. 평소 같으면 십 분 채 안되는 시간 안에 배달을 마쳤을 텐데, 비가 하도 내리니 시간이 지체되었다. 꽃바구니에 빗물이 많이 묻을까 조심해서인 점도 있었다. 도착한 사거리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니, 익숙한 카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우산을 탁탁 털어내고 카페 문을 열었다. 문 위에 달린 고풍스러운 종이 딸랑하고 울렸다. 가게 안에는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 오늘은 민구학생이 왔네.”
키페 주인은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중년의 여성이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이렇게 꽃바구니를 배달 주문하던 사람이다. 알바를 시작한 이래로 한 여덟 번 정도. 배달을 가거나 꽃바구니를 만들거나 했다. 가끔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따뜻한 햇볕처럼 그를 맞이해주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랑한 곱슬 단발머리. 바스작 거리는 모시 소재의 반소매 셔츠와 포근하게 떨어진 긴 베이지색 치마, 은은한 골드보더와 비슷한 색의 앞치마를 맨 그녀는 햇살처럼 포근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민구도 그녀에 미소에 싱긋이 웃어주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발 다 젖었죠. 어떡해. 오늘 이렇게 비 오는데 배달시켜서… 이렇게 심하게 올 줄 몰랐네요.”
그녀는 민구의 맨발에 슬리퍼를 내려다보고서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민구는 고개를 젓고서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들고 왔던 꽃바구니를 카운터 앞에 내려놓았다. 고이고이 데려와서 다행히 빗방울이 많이 묻어있지 않았다. 꽃송이 하나에 새벽이슬처럼 조금씩 고여있는 것이 다였다. 그녀는 꽃바구니를 보자마자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세상에. 역시 봄이네 꽃집이네. 너무 예쁘다!”
그녀는 꽃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칭찬의 말들을 하나씩 늘여놓을 때마다 입꼬리가 슬슬 위로 올라갔다. 조금 머쓱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서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손가락에 뭍은 물기가 코끝으로 옮겨갔다.
“너무 이쁘다. 카페에 장식해놓으려고 주문했는데. 덕분에 가게가 엄청 화사해졌네요.”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에요.”
“마음에 들고 말고요. 혹시 지금 가게 많이 바빠요?”
“어… 크게 바쁜 건 없어요.”
민구는 오늘 일 목록을 머릿속으로 줄줄이 펼쳐보았다. 급한 일은 이미 오전에 다 끝내놓은 상태였다. 드문드문 찾아오는 손님만 맞이하면 되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인지 방문 손님은 평소보다 현저히 적었다.
“잘됐다. 조금만 비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요. 커피 내려줄게요. 봄 사장님 것도 같이요.”
그녀는 꽃바구니를 들고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민구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에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흰색의 테이블보 위에는 말린 꽃이 꽂힌 유리잔이 올라와 있었다.
직접 말리신 건가.
연분홍빛의 안개꽃과 보라색 프리지어가 함께 묶여있는 작은 꽃다발을 유심히 보며 든 생각이었다. 깔끔히 다듬어지긴 했으나 철사로 엮은 부분에서 서툶이 드러났다. 아마 꽃다발에 있던 철사를 재사용해 묶은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은은한 향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말라서 본래의 향기가 다 날아가고 없을 터인데. 꽃봉오리에선 여전히 싱그러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딱,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위해 가게의 유리문을 열면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꽃집 냄새. 무의식적으로 계속 킁킁거리고 있으니, 그녀는 그런 민구를 발견하고서 꺄르르 소리 내 웃었다.
“냄새 좋죠? 오늘 향수를 좀 뿌려놨거든요. 향기가 날아간 게 아까워서.”
“향수였어요? 정말 꽃향기랑 비슷한 냄새네요.”
“신기하죠, 저도 신기해서 몇 번을 맡아본 향수인지 몰라요. 정말 꽃향기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냄새여서… 딱 뭐라고 그럴까. 그래. 꽃집 냄새!”
“꽃집 문 열고 딱 들어가면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 같아요.”
민구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딱, 알맞은 표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커피 두잔 테이크 아웃 나왔습니다.”
그녀는 얼음 가득한 원두커피 두 잔을 들고가기 좋게 포장한 것을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민구는 흰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사장님. 케이크도 하나 사 가고 싶은데…. 추천 좀 해주시겠어요?”
“음… 봄 사장님 취향으로는. 복숭아 케이크 추천해 드려요. 이번에 새로 만들어본 메뉴인데… 많이 달지도 않고 과일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맛있을 거에요. 크림도 느끼한 크림이 아니라 담백한 크림이고.”
“그럼 그걸로 두 개 주세요.”
“네- 복숭아 케이크 두 개요.”
얼마 있지 않아 뽀얀 케이크 상자도 카운터 위에 올라갔다. 민구는 주머니 속 카드를 꺼내 카운터 건너편 그녀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드리는 거에요. 비 오는 날 발 다 젖어가면서 배달시킨 거 좀 미안하기도 하고.”
“헉,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민구는 카드를 든 채 그 앞에 서서 주춤거렸다.
“괜찮아요. 오늘 받은 꽃바구니도 너무 예쁘고 기분 좋아서 드리는 거니까. 다음에 또 꽃바구니 주문할 때 예쁘게 만들어서 보내주시면 되죠.”
“너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녀는 호호 하고 웃었다. 그녀의 얼굴처럼 동그랗고 네모난 앞니가 잘 보였다. 눈에는 세월의 흐름이 접혀 있었다. 방금 꽃병에 가지런하게 정돈되어있던 말린 꽃과 닮은 미소였다.
어째 배달은 끝났는데, 왼손에 달린 마음의 무게는 카페에 들어오기 전이나 똑같았다.

억수처럼 내리던 비였다. 그러나 가게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빗방울들이 바닥에 수를 놓는 것처럼 잔잔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마법 같이 줄어들었네.
보도블록 위 호수들도 내리막길 아래로 잘 흘러간 것인지, 물방울도 많이 튀지 않았다. 보송보송해진 발 위로 조금씩 스며들 듯이 올라올 뿐이었다.
가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침부터 숨어있던 햇살도 조금씩 가려진 구름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말랑거린다…? 몽롱하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지.
적당히 선선한 날씨, 작은 시냇물을 밟고 건너는 것 같은 발소리. 잔잔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목화솜 같은 따뜻함이 가슴을 밀고 올라왔다.
아참, 카페 사장님한테 향수 뭐냐고 여쭤볼 걸 그랬네.
같이 살면서 한 번도 향수를 뿌리는 걸 본 적이 없지만, 그 냄새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차 향기도 좋았지만, 그 향수 냄새가 난다면...
오십일이 다음 주 수요일이지, 그때 선물해드려야겠다. 사장님은 기념일 다 챙기는 스타일이신가? 얼른 가게 가서 여쭤봐야지. 아, 커플링도… 하고 싶다.
민구는 발걸음을 좀 더 빨리 옮겼다. 자연스레 혼자만 들릴정도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뭐지?”
가게 앞에는 낯선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넓지 않은 골목에 가게 앞 주차라니. 게다가 왜 우리 가게 앞에 주차한 거지? 사장님은 모르시나?
민구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은색 차를 살펴봤다. 곧 깜짝 놀랐다. 익숙한 로고가 차의 뒤통수에 선명히 보였다. 동그라미 안에 삼각별 표시,
벤츠네?
비싼 차라고 막 이렇게 주차해도 되는 건가, 불만을 가득 안고 가게 유리문을 열었다.
“…?”
가게 타일 바닥엔 익숙한 패턴의 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여우 캐릭터가 뛰어다니고 있는 귀여운 손수건. 민구가 민구에게 선물해주었던 물건이었다. 찬찬히 바닥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봄이 책 한 권을 올려놓던 가게 테이블이었다. 두 사람의 몫의 차나 커피 두 잔도 함께, 그런 테이블 위 봄은 낯설지만 익숙한 남자 밑에 깔렸었다.
멍한 두 시선이 마주했다.
“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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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27 17:23 | 조회 : 74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이제 폭풍 시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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