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두 남자는 꽃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트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찌나 많은지 카트를 끄는 것이 테트리스와 같았다.본래라면 민구가 카트를 끌고 봄이 앞장섰겠지만, 이번에는 서로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오늘 저녁은 무슨 덮밥이야?”
봄은 휴대폰과 채소코너를 번갈아 보던 민구에게 물었다.
“제육 덮밥이요.”
민구는 고정하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너가 요리하는 건 처음 먹어 본다. 자신있는 메뉴야?”
“가끔 혼자 살 때 해봤어요.”
“오오. 기대해도 되는 거야?”
“잘할 수 있도록 한번 해볼게요.”
민구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봄도 미소로 화답했다. 민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조바심이라던가. 아까 그 사람은 또 누구냐던가 하는 그런 의문들은 얼굴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절절매려나 생각했는데, 오히려 담담하니 봄이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봄은 그가 지금 태연한 척하는 것인지 정말 마음에 파란이 일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졌다.
‘봄아, 부모님 꽃집 위치 그대로지?’
누가 보아도 찾아오겠다는 사람의 말이 아닌가. 이런 말을 바로 옆에 듣고서도 저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다고? 딱 봐도 과거의 남자가 할 법한 말이잖아. 근데 너 왜 이렇게 멀쩡해? 갑자기 왜 이렇게 여유가 있는 건데.
봄은 홀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조금 전 일을 다시 되뇌었다. 멀쩡한 얼굴, 아니 이보다 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전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껍데기처럼 아닌 척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건물 1층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을 봤을 때, 그의 이름이 쓰인 포스터를 보았다. 설마 했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그렇게 성공에 집착하더니 결국 해낸 모양이었다. 봄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자신의 옷 상태를 확인했다. 대충 걸친 운동복 바람에 밑창 닳은 운동화. 기다란 검은 머리는 뒤로 질끈 묶었다. 봄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아씨. 좀 꾸미고 나올걸.
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늘 구질구질한 상태에서 만나는지. 삐까뻔쩍하게 꾸미고 만나도 모자를 판인데, 쪽팔렸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머릿속에 갑자기 들어온 불청객 때문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봄은 손을 들어 오른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압으로 시원했지만 안개 낀 것 같은 머리는 맑아지지 못했다.
“사장님 머리 아파요?”
잠시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걸 바로 눈치챈 민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봄은 구겼던 미간을 얼른 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별거 아니야. 살건 다 샀어?”
봄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나름 수북해진 카트를 내려다보았다.
“아, 네!”
“얼른 계산하고 다시 가게로 가자.”

뭘 이리도 많이 샀는지, 민구는 덩치만큼이나 손도 큰 모양이었다. 큰 봉지 두 개를 들고 다시 가게로 돌아갔다. 묵직한 봉지 두 개의 무게가 꽤나 클 텐데, 민구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얼굴이었다.

민구는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봄을 바라보았다.
“아.”
봄은 감탄사인지 모를 한 글자를 내뱉고선 민구를 마주했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민구는 그의 입에서 나올 한마디를 기다렸다.
“맛있어. 요리 잘하네.”
민구는 금방 얼굴을 풀며 헤벌레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오랜만에 해봐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맛있어. 너 이제 요리도 좀 시켜야겠다.”
민구는 시켜주시면 열심히 해보겠다며 말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미묘하게 안 좋은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봄은 그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식사 시간은 조용하면서도 느긋하게 마무리되었다. 다 비운 그릇만 남은 식탁 위에 봄이 내린 차 두 잔이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
민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거지는 봄이 했다. 민구는 오랜만에 소파에 가만히 앉아 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가져다 놓았던 머그잔 두 개를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오랜만에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차였다. 머그잔의 손잡이와 닿아 있는 부분이 조금 뜨거워 조심스레 잡았다. 김을 한 번 훅 불었다. 천천히 올라가던 희부연 것이 잠깐 휘어지다 다시 위로 느긋하게 날아갔다.

봄은 설거지를 마치고 그 옆에 몸을 털썩 떨어뜨렸다. 소파의 쿠션이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 금방 다시 올라왔다. 민구는 봄에게 찻잔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각자 차 한잔씩 마시는 두사람 사이에는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늘 강연한 사람 말이야.”
“네.”
민구는 그의 언짢음의 원인인 사람에 대해 먼저 봄이 꺼내자 조금 놀랐다. 한 모금 들이키던 찻물을 삼키고 잔을 내려놓고서 대답했다. 봄과 눈을 마주하니 평소처럼 미소 짓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조소 같기도 했다.
물어볼까. 하다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다시 봄의 기운이 좋아지길 바랐다. 맛있는 걸 먹여서.
“이제 좀 지겨울 법한데.”
봄은 뜸을 들였다. 민구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교 1학년때 만났던 사람이야.”
역시나.
그닥 놀랍진 않았다. 봄과 사귀게 된 이래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쭉 훑어 보았다. 본인과 다르게 확실히 연애 편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학기 초에 찾아온 사람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실제로 전남친과 조우하지 않았는가.
“그랬군요.”
민구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조금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태연하고 싱거운 반응이었다. 봄은 그의 안색을 조금 살피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게 헤어진 건 아니야.”
“네.”
“… 찾아올 것처럼 그 사람이 말하긴 했지만. 찾아온다고 해도 별일은 없을 거야.”
민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별 반응이 없자 봄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반응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아. 그래요?”
“아, 그래요? 그게 뭐야. 질투 안해? 끝도 없이 전남친이 줄줄 소시지처럼 나오는데? 앞으로 더 몇 명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말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민구는 픽 웃음이 나왔다.
왜 질투 하지 않냐고 투정부리시는 거 같아.
민구가 말없이 웃어버리니 봄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뭐야. 왜 웃어.”
“사장님이 투정부리는 거 처음 듣는 거 같아요. 귀여워서 웃음이 저도 모르게 나왔네요.”
말을 끝낸 민구는 머그잔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뜨겁던 차는 조금 식었다. 편하게 먹기 좋은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봄은 살짝 벙진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에 미세한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올라오는 홍조와 함께. 괜히 미간을 구기며 툴툴거리듯 말했다.
“투정은 무슨. 아니거든.”
붐은 시선을 돌리며 턱을 괴었다. 그런 봄을 빤히 바라보다 민구는 말했다.
“사장님. 저 사장님이 좋아요.”
“큽… 깜짝아.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
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잔을 들다가 다시 내려다 놓으며 말했다. 은근히 그를 흘겨보기도 했다.
“사장님도… 저 좋아하시잖아요.”
민구도 연한 홍조를 뺨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점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뺨에다 그나마 시원한 손등을 대었다. 따뜻한 뺨이 식는 듯 했으나, 손에도 열이 차올라 뺨과 손 둘다 뜨끈해져 버렸다.
“…그렇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요.”
민구는 낮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완전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어떻게 안 쓰이겠는가.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잘난 사람이 전 연인이었다고 한다면…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다시 또 마주친다면 완전히 태연하게 있을 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봄이 얼마 전에 말해주었다. 내가 좋다고. 사귀고 사이 맞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작은 것에 그리 불안에 떨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작게 시작했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부풀어 올랐지만 그의 확답을 들은 순간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봄은 시선을 돌린 채 찻물을 들이켰다. 꼴깍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사장님 좋아한다고 말해주세요.”
민구는 봄의 옆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시선이 완전히 봄에게 고정된 채였다. 봄은 소파 팔걸이에 허벅지가 딱 붙을 정도로 밀려가 버렸다. 구석에 완전히 붙어버려서 더는 물러날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민구는 말하지 않으면 비키지 않을 것처럼 손에 쥔 머그잔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거 아니니?”
봄은 거의 서로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에게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가자, 그의 검고 긴 속눈썹이 잘 보였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 미세한 떨림 속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민구의 심장도 쿵쿵 뛰었다.
“좋아하지.”
봄은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쑥스러워했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민구는 진심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기에. 좋았다.
키스할 때는 전혀 안 쑥스러워하시면서.
민구는 기분이 좋아져 헤헤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봄은 괜히 그를 흘겨보았다. 저렇게 뺨을 붉히고 째려봤자 그냥 귀여울 뿐이었다. 봄이 왜 귀여운 거에 못참는지 이제 완벽하게 이해가 될 거 같았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손을 꼼지락 거리게 만들었다.. 귀여움이라는 것은.
“한 번 더 말해주세요.”
“말했잖아.”
“한 번만 더요.”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속닥거리듯이 말했다. 봄은 들고 있던 머그잔을 결국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민구의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훅하고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좋아해.”
작게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화들짝 놀라기도 전에 어둡던 시야에 다시 조명이 눈이 부시게 들어왔다. 민구는 간지럽고 뜨거워진 왼쪽 귀를 마구 문질렀다. 문질러도 문질러도 그 간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각이 선명해졌다. 그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자 봄은 시익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달린 은색 피어싱이 반짝거렸다.
쪽-
민구는 봄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가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려 왼손으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
하지만 곧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으니 왼손을 슬쩍 내렸다. 봄이 픽- 웃으며 그의 입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민구가 아무 말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 봄은 그의 왼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의 입술은 다시 맞닿았다. 조금 전 도장을 찍듯이 지나간 것과는 다르게 길고, 느린 입맞춤이었다.

후두둑, 늦장마라도 되는 양 비가 이 층의 지붕을 시끄럽게 두들겼다. 토요일 아침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점심시간이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이 층의 페인트칠 된 마당에도 조그마한 호수들이 고였다. 이 정도면 하늘에 구멍이 뚤린 건가 싶기도 했다.
파랗던 하늘과 태양은 얼굴을 감추고 흐릿한 어둠만을 내렸다. 두 시 밖에 안되었음에도 가게 창문 너머는 어두웠다.
“오늘 진짜 비 많이 내리네요.”
민구는 주문받은 꽃바구니를 만들다 말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창문에는 송골송골 맺힌 빗물들이 아래로 흘러갔다.
“그러게, 저렇게 비 오고 나면 갑자기 또 추워지려나. 오늘 날씨 좀 선선하던데.”
“오늘 좀 선선한 거 같긴 했어요. 근데 또 저러고 엄청나게 덥거나 하지 않을까요?”
“으으 빨리 여름 갔으면 좋겠네.”
“그래요?”
“여름이면 찝찝하잖아. 차라리 난 추운 게 더 나아.”
“그래도 여름은 뭔가 운치 있지 않나요. 밤에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해 떠 있을 땐 그렇게나 뜨거웠는데, 밤이 되면 또 시원하고.”
봄은 그의 말을 듣고선 팔짱을 낀채 몸을 기우뚱했다.
“그런가…? 네 말 들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잠시 생각하더니 맞는 거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봄을 보며 싱긋이 웃어주고는 민구는 은은한 노란빛의 장미를 바구니에 꽂아 넣었다. 완성된 꽃바구니는 화사하면서도 포인트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산호색과 복숭아색. 새빨간 꽃송이들이 중간중간 끼어 있는 모습이었다. 꽃들을 뒷받침해주는 싱싱한 초록빛들도 화사함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길고 쭉쭉 초록 줄기와 그 줄기에 달린 풀꽃들도 싱싱했다.
“완성했어요.”
민구가 그에게 꽃바구니를 보여주었다. 봄은 꽃바구니를 한번 빙그르르 돌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가 웃으니 민구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응, 예쁘네. 잘 만들었다. 손님이 좋아하시겠어.”
“몇 시까지 배달이었죠?”
“지금 시간이….”
봄은 가게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 초침이 세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가면 될 것 같긴 해. 가까우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밖에 바람은 안 부나?”
봄은 테이블 의자에 일어나 가게 창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방충망에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매달려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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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27 15:30 | 조회 : 709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아니 폭스툰 왜 로그인 거부하나요... 원래 어제 연재였는데, 오늘 올리게 되었네요. 대신 조금 있다가 한 편 더 올라갑니다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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