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은 그림자와 같아서

봄은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거리를 돌아보았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새벽 한 시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사람들의 머릿수도 이전보다 덜 셀 수 있었다.
봄은 어쩐지 가게를 나오고서부터 기분이 묘하게 언짢아 보이는 민구를 힐끗거렸다. 언뜻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는 봄과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한 시네. 내일 아홉 시 수업 가려면 조금 피곤하겠다.”
민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적막 속에 몇 걸음을 더 옮기니 가게에 금방 도착했다. 어두컴컴한 보도블록 위로 작은 가로등만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여름의 끝물에 다다랐는지, 이제 달이 뜬 밤에 부는 바람은 꽤 선선했다. 바람이 얇은 반소매티셔츠를 통과해 스쳐지나갔다. 선선한 바람에 소름이 돋아 버린 팔뚝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손가락을 도어락 버튼위에다 가져다 대었다. 비밀번호 숫자의 반을 누르다 말고, 봄은 갑작스럽게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언짢을까?”
봄이 고개를 기울며 그를 바라보자, 흠칫 놀란 민구는 그저 고개를 피하기만 했다.
“오늘 온종일 말하고 싶었던 거 때문에? 아니면 선우 만나서 기분이 안 좋아졌어?”
봄은 언뜻 그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입가엔 미묘하게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장님.”
머뭇거리던 민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봄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심통 난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 홍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는 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살짝 의문이 들긴 했으나 얼굴을 붉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장님이 좋아요.”
민구는 피하던 시선을 거두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봄은 픽- 웃어버리며 대답했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려나. 했는데. 오늘 아침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봄이 태연히 대답하니, 민구는 그런 봄의 반응이 영 석연치 않아 보였다. 그러다 한 번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 호흡 속 미세한 떨림이 고스란히 봄에게 전해져왔다.
“사장님도 제가 좋아요?”
민구는 말을 하고 나서 언뜻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바로 눈에 힘을 딱 주며 봄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긴장감도 엿볼 수 있었다.
“응.”
봄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몇 초의 정적도 없이 바로 날아온 대답에 민구는 잠시 멍해졌다.
“정말요?”
“정말이지, 그럼 가짜니?”
봄은 고개를 돌려 다시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작은 도어락에서 삐리릭, 하고 전자음 소리가 나더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봄은 민구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탁, 하고 닫기자 곧바로 잠금장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손을 잡힌 민구는 한순간에 신발장의 타일 벽으로 몰렸다. 불빛 하나 없는 집안에서 시야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잡힌 손의 감각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민구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봄은 다시 그의 선 위를 훌쩍 넘어갔다.
“…!”
민구의 입술이 봄의 입술로 막혔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이 잠시 위에 머물렀다. 몇 번 촉,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민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익숙치 않은 감각.
말랑한 입술이 왔다 갔다 하니, 살짝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봄은 픽- 작게 웃으며 희미하게 눈을 뜬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그의 손이 뜨거운 것을 보니, 두 눈 꼭 감은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아 진짜 얘를 어떡하면 좋을까.
온종일 무엇 때문에 그리 고민하는지 궁금했는데 겨우 자기를 좋아하냐 라니. 당연한 것을.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것이 천천히 입구를 열었다. 조금 놀란 민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민구는 확실히 경험이 없는 것이 티가 팍팍 났다. 지금 이 순간도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가 제게 입술을 처음 부딪쳐 왔을 때. 하도 세게 들이박아서 입술이 얼얼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와의 첫 키스를 했을 때도 막상 호기롭게 부딪히기는 했으나, 그 뒤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게 너무나 잘 보였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해서 오래 입을 맞추지도 못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봄은 조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입술을 떼었다. 떼자마자 민구는 고개를 떨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봄은 오른손 검지로 그의 입술을 스윽 닦아주며 말했다.
“너 키스 정말 못하는구나?”
“…죄송해요. 별로, 였어요?”
뭐가 그리 또 죄송한지.
봄은 그의 턱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속에 그의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이 담겼다.
“아니.”
봄은 한 번 더 그의 입술에 촉 소리를 내며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떨어졌다.
“못해서 더 좋아.”
손에 닿은 그의 뺨이 너무 뜨거워 데일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꽤 쌀쌀하다 생각했는데 금방 공기가 후끈해졌다.
“…”
“보증금도 이미 다 모아 놓고서 시치미 뚝 떼고 있는 애를 왜 계속 옆에다 두겠어?”
“아.”
알고 계셨구나.
민구는 가슴이 뜨끔했다.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리고 왜 가슴은 만지고 도망가겠냐? 난 좋…아하는 사람 가슴 아니면 안 만져.”
봄은 어쩐지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뒷말에 나오는 이유는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럼 저희… 사귀는 거예요?”
민구는 오늘 온종일 내내 고민하던 것에 대해 드디어 입을 떼었다. 그의 말을 들은 봄은 멍한 얼굴을 하더니, 말을 더듬었다.
“사,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였어요?”
두 사람 전부 멍한 얼굴을 했다. 봄은 눈만 깜빡거리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너. 사귀지도 않는 사람한테 키스하는 남자였니.”
봄은 충격이라는 투로 그에게 말했다. 민구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뭐라 대답을 못 하자 봄은 짓궂은 말투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어,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보다 더한 나쁜 남자네!”
봄은 킥킥 거리며 그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놓아주었다.
“조금 충격이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오늘 재훈이랑 얘기했는데. 사귀자는 말을 안 하면 사귀는 사이가 아닌게 하고….”
“그것 때문에 오늘 온종일 계속 안절부절못했어??”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사장님이 저한테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신 적도 없고… 게다가 오늘.”
“오늘?”
민구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전남친…도 엄청 걱정하시는 것 같고…”
우물쭈물 거리더니 겨우 입을 떼는 그였다.
“전남친!?”
봄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정말로 당황해서 높아졌다.
“잠깐. 잠깐만… 누구한테 들었어?”
“재훈이가 말해줬어요.”
“재훈이?! 아. 아니, 이 아저씨가 진짜 남의 과거를 왜 다 말하고 다니는 거야.”
“…”
어색한 적막이 잠깐 흘렀다. 두 남자 현관문 앞에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적막을 깬 것은 의외로 민구였다.
“불안했어요.”
그리고 봄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생일파티 해주셨던 날부터 사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가 싶기도 했고. 오늘 선우도 엄청 걱정하시는 거 보니까. 또 그렇고… 사람이 다칠 수도 있던 일이니까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알지만. 모르겠어요. 마음이 좋진 않았어요.”
민구는 봄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천천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들을 꺼내었다. 한 마디 한마디 입술 밖으로 나올수록 불안하던 감정이 흐릿해진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뺨으로부터 선명하게 전해 와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봄은 밴드가 둘린 오른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똑같네.”
미묘하게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민구는 무슨 의미인가 싶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불안했거든.”
봄은 제 검지에 둘린 밴드를 손가락으로 틱틱 건드려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불안감은 그림자와 같아서.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 빤히 보이는 데도. 자꾸만 확인하고 싶고, 널 시험하고 싶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쩌지. 난 네가 불안해하는 걸 보면 안심해.
그에게 아직은 할 수 없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사장님이요…?”
민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좋다고 그가 표현할 때마다 봄은 태연하게 ‘응’이라며 대답했다. 대답하던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불안의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불안했다고 말하다니.
“응.”
“어떤 점이요?”
“글세… 야, 그러고 보니까 우리 신발도 안 벗고 신발장에 서서 뭐하는 거냐? 빨리 들어가자.”
봄은 말끝을 흐리며 신고 있던 캔버스화를 훌렁 벗어버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점심 뭐 먹었어요?’
민구는 강의실 책상 아래 둔 휴대폰의 자판을 몇 번 두들겼다. 한 문장을 다 적어내고 바로 옆 종이비행기 버튼을 꾹 누르니, 바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글자들 아래 시간과 같이 표시되어있던 1 숫자는 금방 사라졌다.
지잉- 하고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김치찌개. 너는?’
그 글자들을 쭉 읽어내려간 민구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저는 재훈이랑 효진이랑 학식이요. 오늘은 덮밥 나왔어요.’
글자와 함께 찍어둔 사진도 보내었다. 아무리 찍어도 예쁘게 찍기 어려웠다. 수무장 넘게 찍은 사진 중 고르고 골라서 보낸 사진이었다.
1학년 때 분명히 사진 수업을 들었지만, 사진의 구도를 잡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봄에게 보내고 싶어서 열심히 찍었다.
‘덮밥 맛있었겠다.’
‘오늘 저녁에 해드릴까요?’
‘좋아!’
봄은 글자를 보내고 난 뒤, 동물캐릭터 이모티콘까지 보냈다. 오리 같아 보이는 캐릭터였는데, 신기하게 엉덩이에는 두툼한 꼬리가 붙어 있는 동물이었다. 무표정해 보이는 오리가 하트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귀여워.”
민구는 한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말없이 지켜보던 재훈은 얼굴을 불쑥 내밀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고 있냐?”
“앗, 깜짝아.”
예고 없이 들어온 재훈의 얼굴에 놀라 그는 화들짝 놀랐다. 재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다 안다는 듯한 투로 말을 뱉었다.
“곧 신성한 강의가 시작되는데, 휴대폰 만지작거리면 되겠냐?”
“아직 강의하시는 분 안 오셨잖아.”
민구는 멋쩍게 휴대폰을 뒤로 슬쩍 감추며 대답했다.
“뭐야, 뭐야. 민구 선배 연애해요?”
뒤에 앉아 있던 효진도 재훈처럼 얼굴을 불쑥 내밀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차 반짝거렸다.
“…응.”
민구는 조금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헐 대박! 누구에요? 누구? 알바하면서 만났나? 언제부터?”
효진은 소란스럽게 요란을 떨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민구가 조금 곤란해 하자 재훈이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뭘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그래? 연애하면 하는 거지.”
“민구 선배가 워낙 조용한 스타일이잖아요. 조금 비밀스럽기도 하고. 그러니까 궁금한거죠! 상대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키는... 크나?”
효진은 재훈의 말을 개의치 않으며 궁금한 것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그녀의 말을 끊어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두 시에 시작될 초청 강연의 주인공이었다.
본래라면 두 시에 시작되었을 강의는 십 분이나 초과하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던 학생들은 점점 시간이 넘어가니, 숙덕거리는 소리가 커져 소란스러웠다. 개중엔 언제 오냐는 둥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 불만을 털어놓던 학생은 강연의 주인공이 들어오자 의지대로 움직이던 혓바닥을 굳혔다. 그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강의실 안에 있던 학생들 전부 다 숙연해졌다. 민구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처럼 키가 엄청 크시네… 아니다, 사장님보다 조금 더 크려나?
민구는 멀끔한 정장을 입고 온 강의실 무대 위 중간에 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미쳤다. 얼굴이 세상 장난없네…”
효진의 감탄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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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20 17:43 | 조회 : 67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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