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니까 그랬겠지

엠티에서 두 번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봄은 창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새벽 세시가 넘어가도록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봄은 한참이나 그들의 그림자라도 찾았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차가운 창문 앞에서 얼굴을 기댄 체 잠들어버렸다.
“봄아.”
민국은 창문 앞에 무릎을 세우고 잠이 든 봄을 흔들었다. 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몇 시에 잠이 든 것인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민국은 한숨을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이불도 꺼내와서는….”
“어…?”
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 위에 덮인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아… 재훈이랑 민구는 들어왔어?”
“어. 지금 아침 먹고 있으니까 일 층으로 내려와.”
“응…”
민국은 안쓰러운 마음에, 헝클어진 봄의 머리칼을 옆으로 넘겨주고 나서 상체를 일으켰다. 봄은 제 몸 위에 덮인 이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일어섰다. 앉은 자세로 잠이 들었더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뻐근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긴장을 안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떠났던 바다로부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민구를 흘끗거리며 보았다. 가는 내내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고요히 잠만 잤다. 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빠르게 지나가는 도롯가를 바라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매고 있던 손수건 매듭도 풀어버렸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째. 민구는 봄을 피하고 있었다.
“야.”
봄은 거실 옆 벽에 기대서서 그를 불렀다. 거실 탁자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던 민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안 자?”
“저 할 게 있어서요. 사장님 먼저 주무세요.”
“…”
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저 괘씸한 뒤통수를 흘겨보다 침실문을 열고 들어갔다. 닫히는 문소리가 꽤 컸다. 무덤덤한 말투로 대꾸하던 민구는 계속 자판을 두드렸다.
"...."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트북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다 굳게 닫힌 침실문을 슬쩍 보았다.

혼자 침대를 독차지한 봄은 이불도 덮지 않고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문틈 사이로 거실의 불이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저 불이 이렇게나 얄미울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동안 피하는 게 어딨어. 말을 하고 싶어도 저렇게 피하면 어떡해 말해. 봄은 애꿎은 침대 매트리스만 주먹으로 팡팡 때렸다. 한참을 매트리스와 권투를 하다 홀로 지쳐서 몸을 뒤집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하는 꼴이냐.
봄은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을 다시 줍고 침대 위에 얌전히 몸을 누웠다. 눈을 꼭 감아보지만, 옆자리가 너무 휑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몸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새벽의 해가 동쪽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나서야 정말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민구는 며칠간 혼자 가게를 봤다. 봄은 어디를 간다는 말없이 그냥 하루 옷을 다르게 챙겨 입으면 가게에 없는 날이 되었다. 한이불 덮지 않은 지도 벌써 이주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민구는 오늘따라 조용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며 멍을 때렸다.
“맨날 어디를 가시는 거지…”
민구는 오늘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고 나가는 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봄도 말이 없어졌다. 잠깐씩 보이는 얼굴의 미세한 우울을 보니 마음이 쿡쿡 찔렸다. 조금 미운 마음에 소심하게 항의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표정한 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제는 미안하고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나, 밤이 되서 잠을 자러 가야 할 때. 머리에 솟은 레이더가 온통 봄에게로 향했다.
삐링-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며 후회를 하고 있을 때,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오른손을 넣어 뒤적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의 화면에 오랜만에 가족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초록색의 수신 버튼을 눌러 옆으로 옮기고 귀로 가져다 대니.
“오빠!”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날아왔다.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오빠!”
같지만 묘하게 다른 여자의 목소리도 날아왔다.
“어. 민아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민구는 무의식적으로 픽 웃음이 나왔다.
“헐, 오빠 민아한테는 왜 그렇게 말하고 나한테는 왜 그렇게 정나미 없이 말해? 정말 실망이다.”
권 민지는 자못 서운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 익숙한 툴툴거림이 괜스레 따뜻하게 느껴져 쿡쿡 웃음이 나왔다.
“오빠. 언제 집에 와? 어제는 올 줄 알았는데.”
전화를 권 민아가 다시 가져간 것인지 좀 더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 왜?”
“오빠 오늘 생일이잖아.”
“아.”
계속 봄 생각하느라 오늘이 생일인 줄도 잃고 있었다.
“민희 언니랑 데이트한다고 안 오는 거 아니야?”
바로 옆 민지가 있는지, 작지 않은 크기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어졌어.”
민구는 덤덤한 투로 얘기했다.
“뭐…?”
민아의 목소리에서 상당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어쩌다가…?”
“어… 차였지 뭐.”
“민희 언니가 찼어? 아니, 그 착한 언니가 왜?”
다시 전화를 민지가 가로챈 듯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하하. 오빠, 나중에 또 전화할게. 오늘 생일 즐겁게 보내고. 아빠·엄마한테 전화 좀 해! 전화 없다고 서운하다고 그러시더라! 그럼 안녕. 방학 때 꼭 집에 한번은 와!"
다급한 목소리가 끝으로 전화는 급하게 끊겼다. 민구는 갑작스럽게 전화 오고 갑작스럽게 끊어진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오늘 생일이구나.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 일만 없었으면 지금쯤 사장님이랑 같이 즐겁게 케이크나 자르고 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조금 울적해졌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하고 예쁜데. 마음은 그 화창함의 십분의 일도 따라오지 못했다. 한숨 쉬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봄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면 다시 깊은 한숨이 푹푹 내려앉았다.
밝았던 창밖이 어둡게 가라앉을 때까지 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먼저 들어가셨으려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게를 정리했다. 가게 한쪽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시침이 10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다. 가게를 밝히던 조명까지 다 끄고 가게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은색의 자물쇠로 가게를 단단히 잠근 후, 건물 옆 계단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하고 힘없이 운동화와 보도블록 바닥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울적했다.

“어…?”
“어.”
바닥에 내려두었던 시선을 올려 계단을 바라보니, 뜬금없는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재훈이었다. 재훈은 일시 정지라도 된 것처럼 몸을 굳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민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눈동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짧은 순간, 재훈의 얼굴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간 것처럼 보였다.
“아..아, 어. 글쎄.”
재훈은 이상한 웃음을 짓고서 대답을 삼켰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2층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재훈아. 민구는… 허업.”
민국이었다. 민국은 재훈과 똑같은 표정으로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양손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샴페인 두 병을 달고 있었다.
“사장님…? 뭐하시는 거에요?”
민구는 대체 뭐하는 상황인가 싶어 계단 위를 천천히 올라갔다. 재훈은 어쩐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앞으로 먼저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계단 위로 올라가니, 민구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그런 민구를 발견한 봄의 얼굴도 멍했다. 봄은 오른손엔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성냥 하나, 다른 손에는 얇은 촛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밑에는 키가 큰 초가 두 개. 작은 키의 초가 두 개 꼽힌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넌 눈치 없이 좀 모른 척 하고 이따가 올라오지, 왜 바로 올라온 거야.”
재훈은 괜히 어색해져서 민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하, 민구 씨 생일 축하해요.”
민국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작은 폭죽을 펑, 터트렸다. 고깔 모양의 폭죽에서 길쭉하고 알록달록한 종이 끈들이 민구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봄은 다급하게 나머지 초에도 불을 붙였다.
“…생일 축하해.”
봄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크 옆에 놓아두었던 폭죽을 터트렸다. 폭죽 안에 담겨있던 알록달록한 가루들이 흩날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민구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봄은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케이크를 들었다. 민구는 훅, 하고 숨을 불어넣어 작은 불씨들을 껐다. 환하던 촛대 위로 희뿌연 연기가 조금 올라오더니, 금방 사라졌다.
봄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긴장은 곧 사라졌다. 민구가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약간의 긴장으로 굳어있던 분위기는 금방 풀어졌다.

2층 마당의 바깥 조명을 켜니, 케이크의 형태가 완전히 드러났다. 뽀얀 크림 위에 글씨와 캐릭터와 글씨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중간 부분에는 아마, 민구를 그려 넣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귀여운 캐릭터 아래에는
‘권민구 23세 축하해.’
라고 나름 반듯해 보이는 글씨체로 초콜릿 펜으로 쓰여있었다. 그 주변을 꾸며내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조그마한 그림들에서 봄의 취향이 고대로 드러났다. 민구는 그러한 점이 눈에 보일 때마다 웃음이 피어났다.
“이거 저에요?”
민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봄을 바라보며 물었다. 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제 케이크네요.”
“그거 봄이가 만든 거야.”
민국은 두 사람 옆에 붙어 서서 말을 덧붙였다. 봄은 괜히 민국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자. 케이크 자르고 이제 생일파티나 해요.”
계속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들을 재훈은 2층 마당에 놓여있는 테이블로 불렀다. 평소엔 쓰지 않아 구석에 접어 보관해두던 물건이었는데. 언제 빼내서 깨끗이 닦아놓았는지. 뽀얗게 내려앉아 있던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크에 정신 팔려 잘 못 봤는데. 테이블 위에는 다른 음식들도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민국이 들고 있던 샴페인 외에도 다른 샴페인 병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울적하던 마음과 고민은 이 밤 전부 흘러내려버렸다.. 네 명의 남자들은 따뜻한 조명 아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민구는 오랜만에 휴대폰 카메라 앱을 켰다. 그리고 열 번이나 넘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하고 휴대폰 뒤쪽에 달린 작은 셔터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가 끊길 줄 모르자 재훈은 그를 타박했다. 그만 찍고 이제 먹자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빈 샴페인 병이 테이블 위를 나뒹굴었다. 민국은 엠티의 첫날밤처럼 잔디밭이 아닌 흰 페인트가 칠해진 시멘트 바닥에 샴페인 병처럼 뒹굴고 있었다.
“어휴. 이 진상. 맨날 취하면 이렇게 뒤집어 눕는다니까. 여기가 아저씨 안방이야?”
봄은 껌딱지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는 민국을 흔들어 깨웠다.
재훈도 그를 거들었다.
“아저씨. 일어나. 이제 집 가야지.”
재훈은 은근슬쩍 그를 밟으며 말했다. 봄은 그런 재훈을 슬쩍 올려보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봄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재훈은 봄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봄은 빙그레 미소 지은 채 재훈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재훈은 괜히 입을 샐쭉거리며 대답했다.
“민구 때문에 온 거에요. 얘 생일이니까. 원래 내가 데려가서 생일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그쪽이 먼저 선수 치는 말해서 내가. 어? 양보한 거라고요."
“고마워요.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울려 줘서.”
재훈은 그런 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 옆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봄은 고개를 돌렸다. 재훈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민구...”
“…?”
“그러니까. 엄… 조금 오지랖이긴 한데요. 잘... 지내주세요."
재훈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민구 옆에 있는 거 싫어했잖아요.”
봄의 얼굴에서 조금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재훈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 재훈에게 밟히던 민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악!”
민국은 밟힌 옆구리를 두 손으로 문지르며 창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났네. 이제 가자. 진상처럼 누워있지 말고.”
재훈은 그런 민국을 보며 꾸중하듯 말했다.
“어후… 재훈아. 나 꿈에서 걸리버한테 밟히는 꿈꿨어…”

재훈과 민국이 계단으로 내려 간 뒤 민국이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양손에는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어. 재훈이랑 사장님. 아 아니, 민국 사장님 갔어요?”
“응. 조금 전에 내려갔어.”
“아. 감사하다고 말을 못 했는데…”
“내일 얘기하면 되지 뭐.”
봄은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네…”
민구는 조용히 대답하며 조금 지저분한 테이블로 걸어갔다. 빈 유리병을 쓰레기봉투에 조심스레 넣었다. 봄도 그 옆에 서서 테이블을 민구가 가져온 행주로 닦아내었다.
빈 유리병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테이블 위에 놓인 쓰레기의 부스럭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그러다 민구는 아직 따지 않은 샴페인을 발견했다.
“어? 사장님. 이거 한 병 남았어요.”
“그렇게 많았는데 어디서 솟아난 거냐?”
"사장님. 이거 지금 그냥 마실래요? 어차피 내일 일요일인데.”
“...그럴까?”
“좋아요. 제가 잔 두 개 다시 들고 올게요.”
민구는 후다닥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깨끗해진 테이블 위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짠- 하고 고요한 적막 아래 다시 돌아온 평온을 즐겼다. 두 남자는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의 샴페인 한 모금 들이킨 뒤 잔을 내려놓았다.
“케이크는 언제 만드신 거에요?”
평온한 적막 속 먼저 말을 건넨 것은 민구였다. 그는 손아귀에 놓인 유리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민국 형네 가게 가서 좀… 연습 좀 했지.”
봄은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럼 요즘 가게 안 오신 게 이거 때문이었어요?
“뭐...응, 맞아.”
“그랬구나…”
민구는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술잔 아래 비친 가로등 불빛을 응시했다. 따스한 불빛이 술에 비춰 반짝거렸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좀… 밉살맞게 굴었죠.”
“…”
봄은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좀 그랬지.”
“…”
서로를 마주하며 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린 두 사람이었다.
“…사장님.”
“응?”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민구는 지금까지 삼키고 있던 질문을 오늘 밤이 돼서야 꺼낼 수 있었다. 살짝 떨리는 손을 꾹 참으려 손아래에 있는 유리잔을 꼬옥 쥐었다.
“…몰라.”
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끝을 흐렸다.
“모르긴 왜 몰라요.”
민구는 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으며 되물었다. 그가 가까이 오자, 봄은 살짝 놀라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더 조급해졌다. 하지만 올라오는 말들을 꾹 눌러 참고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봄은 고개를 다른 쪽으로 훽 돌리며 작게 소리치듯이 대답했다.
“아! 몰라! 그냥 좋으니까 그랬겠지.”
봄이 말이 끝나자 민구의 입꼬리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민구가 쿡쿡 소리내어 웃자, 봄은 괜히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금방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민구가 그의 눈앞에 작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예전에 좀… 오래전에 샀던 건데. 이제야 드리게 되네요.”
전에 봄이 민구의 자취방에 가서 짐을 치울 때 보았던 물건이었다. 다급하게 치우길래. 전 여자친구에게 줄려고 했던 물건인가 했는데.
봄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 조금 머쓱해진 민구는 그의 손 위에 상자를 놓아주었다. 봄은 머뭇거리다가 상자 위에 정성스레 둘린 리본을 천천히 풀어냈다. 반짝거리는 포장지까지 조심히 뜯어 보니 작은 상자 안에 손수건이 보였다.
“진짜… 별거 아니긴 한데. 그냥… 지나가다가 사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샀던 거예요. 맨날 사장님 손수건 두르고 다니시길래. 매일 쓸 수 있는 거 선물로 드리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민구는 휑 설 소설 거리며 선물에 관해 이야기했다. 막상 주니까 생각보다 더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봄이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으니 더 그러했다.
“얼마나 오래전인 거야?”
“학기 초반이었어요. 근데… 막상 사고 나니까, 좀 걱정이 돼서… 괜찮아요? 너무 좀 그런가…”
“아니. 너무… 마음에 들어.”
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끈거리는 건 민구뿐만이 아니었다.
봄은 상자를 열어 손수건을 빼냈다. 그리고 정말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완전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귀여워.”
앙증맞게 생긴 여우 그림들이 봄의 눈에 들어왔다.
봄은 자신의 목에 둘러두었던 검은색 손수건을 풀어냈다.
아.
왼쪽에 앉아 있던 민구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목이 훤히 다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에 새겨진 흉터도. 길게 쭉 뻗은 형태의 흉터였다. 하지만 곧 그 흉터는 민구가 사다 준 손수건으로 가려졌다.
봄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목에 맨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부들 한 재질의 감촉이 기분을 한껏 포근하게 만들었다.
민구가 잠시 멍한 얼굴로 그의 목을 응시하고 있을 때, 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구야. 고마워.”
“…!”
그리고 봄의 입술이 잠시, 그의 입술 위에 머물다 떠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부들부들한 감촉이 생생했다. 민구의 얼굴이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마움의 뽀뽀인가요?”
“…아닌 거 알잖아.”
“맞아요. 사장님 조금 따라 해본 거에요.”
“너..”
봄의 말은 곧 막혔다. 화끈거리는 입술이 서로 닿았다. 누가 더 할 것 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이었다.

2
이번 화 신고 2021-02-13 01:50 | 조회 : 769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