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쓰레기

봄은 한없이 가벼웠다. 딱 깃털 수준의 가벼움.
서툰 유혹에도 느긋한 미소로 선우의 손을 잡고 바를 나갔다.

“하…”
선우는 멍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텔의 어두컴컴한 방안. 침대 옆 작은 라이트의 불빛만을 의지해 침대맡에서 담배를 피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머리 위로 올라오는 흰 연기가 약한 빛이 비쳐 흐릿하게 보였다.
정말이지... 엄청 났다.
하는 내내, 정신을 못 차렸다. 첫 경험이라 강렬한 것인지. 아니면 저 사람이 그것을 너무 잘하는 것인지.
선우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마침 봄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얼굴이다.
선우는 몇 분 전까지 이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했던 일이 떠올랐다. 저 예쁜 곡선을 가진 허리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것을 떠올리니 다시 아래가 저릿하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봄은 무표정하게 자신에게 닿지 않은 선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봄의 표정이 너무나 무정해서 뻗은 손이 무안해졌다. 처음에 말을 걸어왔던 그의 다정한 것 같은 목소리처럼 따스히 잡아줄 줄 알았는데.
어색하게 손을 거두고 선우는 상체를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예요?”
“봄.”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는 작게 내뱉었다.
“이름이 봄이에요? 우와 신기하다. 그럼 봄이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던가.”
짧아진 담배를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껐다. 작게 치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길고 미세히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라졌다.
“제 이름은 안 물어봐요?”
봄의 얼굴에 잠깐 당혹이 스쳐 갔다.
“별로 안 궁금한데.”
여린 마음을 긁어버리는 냉정한 말투였다.
“하룻밤 같이 보낸 사인데.”
“하룻밤 뿐이지.”
“…와, 너무 냉정하다. 아까까진 뜨거웠잖아요.”
“…”
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겠다는 듯 나체의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그의 허벅지 사이로 바로 전 서사의 흔적이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금방 걸음을 옮기더니 바닥에 대충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입었다.
“처음 예약할 때 하룻밤 예약했잖아요. 안 자고 그냥 가게요?”
선우는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선우는 잠시 멍하니, 그가 사라진 도어락 문을 응시했다.
뭐야. 볼일 다 끝났다고 가는 거야? 먹고 버리는 거야?
대체 뭐야.
이 장소에 더 있다간 기분이 더 울적해질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선우는 찝찝한 것을 대충 샤워실에서 헹궈내고 모텔 건물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선우는 무슨 마음이 들어서인지 다시 ‘봄’을 만나러 그 가게에 들른 참이었다. 복사 붙이기를 해놓은 것 마냥 똑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그 주변인들이 조금 바뀌었을 뿐. 봄은 어젯밤이랑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옷도 그전 날과 똑같은 옷이었다.
선우는 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앞으로 대놓고 걸어가기엔 용기가 없었다. 주변인들의 인상이 하나같이 다 세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선우를 힐끔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희미한 조롱이 담긴 눈빛이 불쾌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쪽 무리랑 안 어울리는 게 좋아요.`
선우는 전날, 가게 점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봄은 술을 몇 모금 더 들이키다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라이터를 들고 밖을 나가는 것을 보니, 담배를 피우러 가는 듯했다.
선우는 그가 나가는 방향을 조심스레 지켜보다 따라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니, 가게 문앞에서 전날 밤처럼 담배를 묵묵히 태우고 있었다.
“저기요.”
봄은 시선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누군지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다 입 모양으로 아, 하고 소리 내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집어 아래로 내렸다.
“왜?”
“맨날 그렇게 하고 가버리는 편이에요?”
선우는 살짝 긴장되어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넌 같이 자고 싶지 않더라.”
봄은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콕콕 가시 박힌 그의 말에 선우는 잠시 머리가 띵했다. 그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 전부 매서웠다.
“나한테 먼저 왔잖아요. 관심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선우는 언뜻 따지는 듯한 투로 그에게 물었다.
“…”
봄은 귀찮은 듯 응수하지 않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존심 상해.
재수 없다고 욕이라도 퍼부어줄 생각으로 따라 나온 것이었는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수 없다고.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려고 왔는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나인데, 왜 저 사람은 자기가 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건드리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지속적으로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니.”
“그럼 저랑 파트너 하는 거 어때요?”
“…?”
봄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저랑 파트너 해요.”
“…”
봄은 아직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검은색 컨버스화바닥으로 밟아 작은 불씨를 껐다.
“그래.”
“어.”
홧김에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근데 흔쾌히 또 수락하자 선우는 오히려 자기가 당황했다.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봄은 픽- 웃었다. 조소인 것 같기도 한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갈까?”
이 말을 끝으로 봄은 그를 끌고 그전과 똑같은 모텔로 데려갔다.

그렇게 이상한 파트너 관계는 약 한 달간 계속되었다. 한 달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막상 만나는 날은 일주일에 두 번 채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을 가게에 오지 않았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미 다른 사람과 붙어있는 걸 보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봄’이란 외자 이름 빼고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번호도 몰라서 새벽녘이 되어서까지 가게에 혼자 그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은 모르겠다. 첫 경험에 대한 집착이었는지. 무엇인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요즘 너 따라다니는 애 하나 있다며?”
“어려 보이던데 몇 살이야?”
“몰라.”
봄은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주변인들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오랜만인 거 아니야?”
“맞아. 파트너 만든 거 오랜만이잖아. 너 설마… 그 어린 애랑 사실 썸타고 있는 거 아니야?”
봄 옆에 자주 앉아 있던 남자가 킥킥 거리며 말했다. 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남자를 스윽 보더니 픽-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두 남자는 은근한 미소를 띠고서 구석에 있던 선우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선우가 있는 걸 알면서 대놓고 그 앞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봄도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말을 할 때, 선우를 대놓고 보면서 입을 열었으니까. 방금 가게에 들어와 주문을 끝마치고 있던 선우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치고 올라오는 창피와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금방 들어왔던 문을 열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러다 1년 지나고 딱 한 번 다시 그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에 있는 가게 간판의 반짝거리던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 왔다.
1년이란 세월 안에 가게는 많이 바뀌었다. 실내장식도 이전처럼 어둡고 음침하지 않았다. 가게 내부를 밝히는 조명도 따뜻해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포근했다. 이전에는 `그런` 가게라는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는데, 현재는 일반 분위기 좋은 바와 똑같았다.
가게 손님들도 카테고리가 달라져 있었다. 다들 각자 애인과 조용히 데이트를 즐겼다. 차분하고 깨끗하고 좋은 가게가 되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차분한 분위기의 미남이 그를 맞이했다. 희미하게 남은 기억 속의 민국이었다. 1년 전엔 그냥 점원이었는데, 어느새 사장이 된 것처럼 보였다.
선우는 늘 앉았던 구석 자리에 테이블이 사라진 것을 보고 어색하게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대리석 패턴의 회색의 테이블이 아닌 따뜻한 나무색의 탁자 위 작고 귀여운 향초가 불을 피우고 있었다. 진하지 않고 은은한 샌달우드향이 좋았다.
“…”
이십 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선우는 금방 지상으로 올라왔다.
혹시 아직도 이곳에 있을까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비웃던 그 사람들도. 체온만 뜨겁던 그 사람도. 지우개로 지운 것보다 더 깔끔하게 그때의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것처럼 ‘봄’도 그의 인생에서 사라질 줄 알았다. 근데, 무슨 일.

2년 뒤에 또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안녕하세요.”
봄은 태연하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를 건넸다. 알아보는 지 기억 안 나는지 미묘한 표정이었다.
지나간 2년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얼굴에 늘 외로운 것처럼 지니던 그림자가 사라져 있었다. 더해서 꽃집에서 일한다니. 선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건물 위에 달린 꽃집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촌스러운 폰트로 크게 ‘큐티’라고 쓰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봄에게 인사했다. 봄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미소로 대답했다. 그 미소 하나가 보고 싶은 시절이 있었는데. 선우는 자꾸만 찌푸려지는 인상을 겨우 피었다.
“사장님! 캐리어 이것만 들고 가면 돼요?”
웬 덩치 큰 바위 같은 남자가 이 층 계단 쪽에서 큰 여행용 가방을 가뿐히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봄보다 키는 작았는데, 덩치 때문에 봄이 작아보였다. 봄은 그 남자를 보더니 후다닥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큰 여행용 가방을 같이 들어주었다.
“같이 들고 내려오자니까. 무겁게 혼자 들고 왔어.”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얼굴. 모든 게 낯설어서 팔이 소름이 돋았다.
순간 내가 알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비슷한 얼굴을 보고 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정말 친밀해 보였다. 선우는 뒷자리에 앉은 민구와 봄을 몰래 흘끗거렸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퍽이나 다정해 보였다. 봄이 눈을 접으며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험악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민구도 그앞에선 대단히 차분하고 얌전해 보였다. 조금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허벅지 위에 놓인 손에 자동으로 힘이 들어갔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괴로움을 느꼈다. 얼굴 낯빛이 안 좋아지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남우가 선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 괜찮아?”
무뚝뚝한 얼굴과는 다르게 얇고 고운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남우의 눈에서 걱정이 묻어나왔다. 선우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조금 멀미해서 그런가 봐.”
“선우 왜? 멀미해? 괜찮아?”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민국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우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 말했다.
“약 먹어요.”
뒤쪽 자석에서 생소한 병과 약 상자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선우가 고개를 돌려보니, 봄이 그에게 그것을 내밀고 있었다. 선우는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선우 괜찮아? 얼굴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재훈도 고개를 슬쩍 내밀어 그를 걱정했다. 선우는 따스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형, 약 먹고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죠.”
받은 약은 딱히 먹지 않고 생수병만 열어 타는 속을 좀 식혔다.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자꾸만 하나의 의문이 들려왔다.
나한테는 왜 그렇게 했어.
저 사람한테는 저렇게나 다정하면서, 그때 나한테는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어?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 오지도 않는 잠을 부르며 눈을 붙였다. 하지만 뒤에서 조금씩 들려오는 봄의 목소리가 신경이 쓰여서 잘 수가 없었다.

지난 똥 밟았다고 생각한 일, 잊으려 신경 쓰지 않으려 했건만, 어느새 정신차리면 시선이 봄에게로 가 닿았다. 그리고 자동으로 그 옆에 딱 붙어 있던 민구에게도.
권민구란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못돼먹은 봄. 저 사람이 절절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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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13 01:48 | 조회 : 641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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