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호의조차 불쾌함으로

운동장 주변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걷다가 걷다, 학과 건물까지 도착했다. 설마, 여기까지 왔을까? 살짝 고민했다. 곧 결심하고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더운 바깥 날씨에 비해 건물 안은 어둡고 시원했다. 땡볕에 돌아다니던 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하기 전에 금방 식어버렸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던 복도는 조용했다. 탁, 하는 걸음 소리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자연스레 엘리베이터에서 멀지 않은 3학년 과실 문앞에 섰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강의실 안은 어두웠다. 살짝 열린 문틈을 손으로 잡고 조용히 열었다. 끼익, 하는 녹슨 문 경첩 소리가 차분한 강의실을 떠돌았다.
“여기서 뭐 해.”
“…”
민희는 2학년 과실에서 만났던 그 날처럼 똑같이 창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강의실 안에는 창문 바로 위 천장에 달린 커튼 사이로 미세한 빛만 새어 나왔다.
“..왜 왔어.”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 기를 조금 머금고 있었다. 아마 여기 혼자 숨어서 울고 있던 거 같다.
“약값.”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잠시 조용하더니, 픽 웃었다.
“그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
민구는 운동복 뒷주머니에서 검은색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자시 눈앞에 놓은 지폐를 보더니 다시 울음을 꾹 삼키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들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민구와 눈을 마주했다.
“… 알겠어, 받을게.”
그리고 민구 손에 쥐어진 지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민구는 뒤로 슬쩍 손을 뺐다. 그녀는 뭐하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거 때문만은 아니고.”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럼 뭔데?”
“하고 싶은 말. 다 못했다며.”
“..듣기 싫다고 강경하게 말할 땐 언제고.”
“솔직히, 그렇게 듣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음, 뭐랄까. 나중에 찝찝할 것 같아서.”
“찝찝하다고?”
“응, 그때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하고 나중에 궁금할 것 같아서.”
“….”
그녀는 황당한 웃음을 뱉었다.
무서워서 듣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무섭지 않았다. 그냥, 정말로 그녀가 왜 그랬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그녀는 민구의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별은 그의 청춘과의 이별과 마찬가지였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외면해왔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졌다. 이별에 대해 진심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지난 추억의 잔재를 한 번 되돌아보게 했다. 이별은 아프지만, 추억은 소중했기에.

그녀를 제대로 마주한 것은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않은 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의 민구는 지금처럼 거구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냥저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냥 반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평범한.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전학을 온 최민희입니다.”
지방의 시골의 중학교에서, 15살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학생도 그리 많지 않은 작은 시골 학교에서 전학생은 지루한 학생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큰 이벤트였다. 지금보다 좀 더 앳된 시절의 민희는 전학을 온 첫날부터 모든 전교생이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티 없이 뽀얀 피부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은 붉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크고 동그란 눈과, 가지런한 눈썹. 작고 오밀조밀한 코를 가진 그녀의 외모는 사춘기시절 소년 소녀들의 눈을 반짝이게 하였다. 그 얼굴과 더 잘 어울리는 가늘지만 상냥한 목소리와 친절한 말투는 확실한 인기요소였다.
민구도 그녀를 처음 봤을 땐,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리엔 늘 사람이 가득했다. 사람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자리와 구석탱이 쪽의 창문가에 있는 그의 자리는 너무나 멀었다. 그래서 살짝 소심했던 그는 그녀에게 감히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냥, 가끔 소란스러울 때 조금 쳐다보는 것이 다였다.

운동장에 날리던 낙엽 위에 흰 눈이 쌓일 때까지 그 둘은 그랬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가다가 학교로 돌아왔다. 오늘 숙제로 나왔던 수학 교과서를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많이 쌓여 있던 눈은 길 양 끝으로 치워져 있었다. 양 끝엔 아침보단 적은 양의 눈이 쌓여있었다. 길바닥에 살짝 덜 치운 눈이 자전거 바퀴에 밟혀 뽀득, 소리가 났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이 시렸다. 뽀얀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뒤로 흩날렸다. 차가운 공기로 인해 목 안쪽이 얼어붙을 정도로 시려져서야 학교에 다시 도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이던 운동장은 평온했다.
학교 건물 뒤쪽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1층 출입구에 자전거를 세웠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전거 바퀴가 멈췄다. 목에 두른 목도리를 좀 더 꽁꽁 맸다. 그리고 시린 손에 뜨뜻한 입김을 불며 1층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리문의 쇠 손잡이는 매우 차가웠다.
탁탁, 운동장 흙과 눈이 묻어 조금 지저분한 신발을 털고 나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차가운 실내화 때문에 발이 시려 부르르 떨고 나서, 양손을 겉옷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조용한 학교 복도 안에 그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어.”
교실 미닫이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교실 안을 보았다.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책상의자에 앉아있었다. 책상 위엔 그녀가 늘 골똘히 들여다보던 교과서가 아니라 조그마한 연고 하나와 밴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 민구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아침부터 신고 있던 검은색의 스타킹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모으고 있던 다리를 필 때 그녀의 맨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맨다리엔 타박상이 가득했다. 드르륵, 깜짝 놀라 그는 무의식적으로 교실 문을 열어버렸다.
“…!”
그녀는 깜짝 놀라 책상 위에 올려둔 것들을 급하게 책상 밑 서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똑바로 앉은 채 다리를 최대한 의자 밑으로 숨겼다.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민구를 발견했다.
“아, 안녕!”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아..안녕.”
그도 그랬다. 갑자기 문을 열어버린 스스로가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뒤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사물함의 여닫이문을 열어 꽂아두었던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매고 있던 책가방의 차가운 지퍼를 열어 넣었다. 사물함 문을 조심히 닫고 다시 교실 문앞까지 걸어갈 때까지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그녀에겐 긴장감이었을까?
“저기…”
민구는 교실 문을 열기 전 뒤돌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앉아 그를 응시했다.
“응..?”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했다.
“집에 안가..?”
“아! 나는 공부, 공부하다가 갈려고. 집에서는 집중을 잘 못 하는 편이라..”
“아..그래?”
“응!”
“그래? 그럼.. 잘 있어.”
“응!”
문을 반쯤 열다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저기.. 괜찮아?”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흠칫, 일그러지는 듯했다. 일그러지는 듯하면서도 그녀는 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응? 뭐가?”
“..아니야.”
민구는 교실 문을 열었고 복도로 걸어갔다. 마음이 불편했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민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어디 넘어져서 저랬나, 생각하려 했다. 그렇다고 보기엔 멍도 이리저리 많이 들었고, 긁힌 상처들도 많았지만…

다음날, 점심시간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였다. 민구는 어제 집으로 가는 길에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약국에 들렀다. 상처가 너무 많았다.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쪼그만 연고로는 다 바르지도 못할 것 같았다.
뭐가 제일 좋을진 모르겠으나, 연고를 이것저것 사고 나왔다. 시골 약국의 초록색 로고가 그려진 묵직한 흰 봉투들 자전거 핸들에 끼웠다. 그리고 세워둔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책상 서랍에 조심스레 넣어두었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
학교 운동장 주변을 스윽 돌아보고 교실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던 교실에는 학생들이 몇 명 들어와 있었다. 소수는 칠판 앞에 컴퓨터가 있는 자리에 앉아서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의 뮤비를 보며 소란 떨고 있었다. 민희는 그런 소란 속에서도 자기 자리에 앉아 다음 시간 교과서를 꺼내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거 봤나?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교실 안쪽으로 들어가다, 그는 멈춰 섰다. 교실 뒤편에 있는 파란색 쓰레기통 앞에서. 휴지 뭉치며 다 먹고 남은 과자 봉지며 온갖 쓰레기들이 섞여 있는 곳에 연고들도 함께 있었다.
“…”
고개를 들어 민희 쪽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는 민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 속에선 미묘한 불쾌감을 잠시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교과서에 박았다.

“오늘 시내 놀러 가자!”
민희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는 그녀 옆에 딱 들러붙으며 말했다.
“오늘?”
그런 그녀에게 미소 지으며 받아주었다.
“응! 시험도 끝났잖아~ 그러니까, 놀러 가자~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놀았잖아! 시험 기간 아닌데도 계속 공부한다고 그러구.”
소녀는 서운하다는 듯 비죽거리며 말했다. 그런 소녀를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오늘은 그럼 놀자.”
“앗싸~!”
소녀는 기쁨에 신난 듯 민희를 꽉 끌어안으며 웃었다.
민구는 그 날 이후로 민희가 신경 쓰였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그녀는 늘 학교 방과 후 수업이 다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았다. 그녀 친구들의 말을 우연히 들었을 땐 학교에 남아서 늘 공부를 한다고 했다. 매일 그렇게 집에 안 가고 학교의 경비원 아저씨가 나가라 할 때까지 공부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는 학교에 전학을 오자 마자 1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럴 만했다.
“…!”
그녀는 시선을 돌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구와 눈이 마주쳤다. 눈과 눈이 마주친 지 1초도 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
상처를 발견하기 전까진 눈이 마주치면 그냥 살포시 웃으며 인사하던 그녀였다.
그때 본 그녀의 다리에 있던 상처들이 완벽해만 보이던 그녀의 치부였을까. 아무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그래서 작은 호의조차도 불쾌함으로 느껴졌을까.

솔직히 기분이 상했다. 쓰레기에 처박힌 연고들을 봤을 당시엔 그랬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양 떼처럼 학교를 빠져나갈 때 그녀도 오늘은 그 양 떼에 합류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로 민구는 홀로 자전거를 끌며 걸어갔다. 휴대전화에 이어폰을 꽂고 하교할 동안 노래를 고르고 있을 때,
“우와 누구야 저 사람?”
“그러게! 잘생겼다!”
“얘는, 아저씨잖아.”
“아저씨라도 잘생겼는데?”
민구 주변에 있던 소녀들은 학교 정문을 바라보며 서로서로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는 검은색 차량이 서 있었고, 시동이 꺼지지 않은 차량 앞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고급처럼 보이는 정장을 차려입고 차와 똑같은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나이가 들었지만 깊은 눈매와 짙은 눈썹, 차가워 보이는 표정은 소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외모였다. 큰 키는 남자를 더 위압감 있게 보였다. 남자는 정문에서 흘러나오는 학생들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때, 민구의 뒤로 시선이 향하더니 침묵하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민희야.”
민구는 오른쪽에 끼워든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봤다.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들도 민구와 똑같았다.
“헐, 대박. 민희야 저분 누구야?”
오늘 그녀의 옆에서 귀여운 아양을 떨던 소녀가 민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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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9 17:55 | 조회 : 71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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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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