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싸움,약값

둘은 운동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학교 내부 북카페 앞까지 걸어갔다. 걷는 동안 두 사람은 둘 다 말이 없었다. 재훈은 주머니 속을 뒤적거렸다. 모서리 부분이 살짝 구겨진 담뱃갑을 열어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북카페 바로 뒤쪽에 있는 흡연구역까지 걸어갔다. 민구는 재훈을 뒤따라갔다. 그리고 흡연 구역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채, 그에게 물었다.
“걔가 뭐라고 했길래, 주먹질까지 한거야?”
재훈은 편의점에서 샀던 싸구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끝 부분이 빨갛게 불이 붙더니 금방 까맣게 변하며 미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재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난 뒤 아래로 연기를 뿜었다. 희뿌연 연기가 허공위로 떠올랐다. 아무 대답 없이 담배만 묵묵히 피우는 재훈에게 민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야, 뭐라고 그랬냐니까?”
재훈은 아래로 내리던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민구를 바라봤다.
“알아서 뭐하게, 그냥 그 새끼 면상이 더러워서 때렸다. 아까 걔 얼굴 봤지? 내가 이겼어.”
재훈은 히죽 웃었다. 담배를 문 채 양손을 제 허리에 척 올렸다. 그 모습은 당당했다. 민구는 그 당당한 포즈가 어이가 없었다.
확실히 병규의 꼴을 봤을 때, 흠씬 두드려 맞은 거 같긴 했다. 머리털도 좀 많이 뽑혔던 거 같고.. 걔 탈모 오는 거 아냐?
“어휴.. ”
민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넌 왜 얻어맞았냐? 피해야지 바보야.”
재훈은 흰 연기를 연신 뿜으며 이야기했다.
“갑자기 달려드는데 어떡해? 그냥 한 대 맞아야지 뭐, 되갚아 줬으니 됐어.”
민구는 방금 전 헛소리하는 병규를 혼내줬던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 보았다.
병규의 어깨를 잡고 꽉, 눌렀을 때 으득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던 거 같다. 순간 화가 너무 나서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고 후련했다.
“아, 맞아. 너 이 자식 이제 욕도 막 하더라? 너 이 자식! 그런 나쁜 거 누구한테 배웠냐?”
재훈은 반 정도 닳아버린 담배꽁초를 흠연구역 중간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손을 탈탈 털어내고 흡연구역을 나왔다. 그리고 민구에게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은 ‘나쁜 짓’이라고 했으나, 그는 속 시원하다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담배 냄새나.”
민구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차가워! 널 위해서 싸운 친구를 이렇게 외면하냐!”
재훈은 상처받은 척 가녀리지 않은 몸뚱이를 스스로 감쌌다. 저 포즈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했던 거 같은데. 왜 쟤는 때리고 싶지?
“누가 주먹질하고 싸우래! 싸울 거면 완전히 안 맞든가! 위험하게.”
민구는 엄한 투로 재훈에게 꾸중했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재훈이 주먹까지 쓴 것일까. 평소 재훈의 성질이 불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먹을 쉽게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싸워도 말로만 싸웠지. 물론 입이 주먹보다 더 세겠지만 말이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나 때문에 다친 거 잖아.
“방금 욕하면서 누구 승모근 빵꾸낼려고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재훈은 영 좋지 않은 얼굴을 한 민구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민구는 그를 외면한 채, 아까 맞은 부분을 매만졌다. 상처 부위에 손이 닿으니 살짝 쓰라렸다.
“화내지 마라,”
잠시 아무말 없다 재훈은 입을 열었다.
“화 난 거 아냐.”
민구의 목소리는 힘이 빠진 것 같기도 했지만 톤은 엄했다.
“그럼 삐졌냐?”
“야!”
“아, 그럼 왜!”
“어디 맞고 다니지 마!”
“내가 더 많이 때렸거든?!”
유치한 말싸움을 주고받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다시 오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직 차례가 멀었던 재훈은 느적느적 화장실에 갔다 왔다. 돌아와보니 본래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엔 병규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낯선 것을 보아 다른 과 사람들인 것 같았다. 아씨, 자리 뺏겼네. 혀를 츳, 하고 찼다. 원래 자리를 포기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빈자리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본래 자리와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거슬리는 말들이 귀를 간질였다.
“아, 재수없어.”
병규의 목소리였다.
“왜? 누구?”
그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마시던 캔 음료를 계단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민구 새끼. 말이야.”
병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팔꿈치를 무릎에 받치고 턱을 괸 채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운동장을 바라봤다.
“아, 저번에 말했던 너네 과에 험악하게 생긴 사람?”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병규의 이러한 태도가 익숙하다는 듯 받아쳤다.
“그래, 존나 거슬려.”
“왜, 이번엔 또 뭔데?”
“시크한 척 하는 거 같아서 재수없음. 민희 선배랑 사겼어서 더 재수없어. 민희 선배는 대체 저런 사람이랑 왜 사귄거야?”
병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투로 말을 뱉었다.
“민희 선배? 아 너네과 3학년 과대? 근데, 헤어졌다며. 왜 네가 그렇게 열불 내는 건데? 너 설마… 민희 선배한테 관심 있냐?”
“미쳤냐? 아니거든. 민희선배 재희랑 거의 사귀기 직전이라고.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냐?”
병규는 운동장에 두었던 고개를 훽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열불내는데?”
“...재희 민구 새끼 때문에 얻어맞았다고! 민희 선배도 같이!”
병규는 분하다는 듯 화를 바락바락 냈다.
“뭐? 누구한테? 맞아?”
남자는 놀란 듯 눈썹을 지켜올렸다.
“몰라! 정확한 얘기는 못 들었어... 여튼 그때 이후로 민희 선배랑도 좀 멀어졌다 그러고, 재희는 계속 저기압이고..”
병규는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서 자신의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알았다, 너 민희 선배가 아니라 재희였구나?”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규를 멀뚱히 보던 친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헤죽 웃었다. 그리고 이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냐?! 더럽게?!”
병규는 과하게 당황하며 그 말을 던진 친구의 등을 퍽 때렸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친구는 태연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 이거 반응이 너무 큰데? 너 게이였어?”
“이 미친놈이? 아니거든?”
“근데, 왜 그렇게 신경을 써? 맞구먼 맞아.”
“아니라고 이 새끼야! 박재훈도 아니고, 더럽게!”
저 새끼가, 뒤질려고
모든 이야기를 뒤에서 삐딱하게 선 채 다 듣고 있던 재훈은 슬슬 열이 오르고 있었다.
‘더럽다.’ 이정도 얘기는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은 많이 봤다. 아닌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포비아는 많이 만나봤으니, 그냥 똥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민구는 달랐다. 민구는 욕을 먹어선 안되는 사람이었다. 재훈에겐 그랬다.
“더럽다니, 야. 그거 아주 시대착오적인 마인드인거 아냐?”
“더러운 걸 더럽다고 하지. 에이씨.. 민구 새끼만 없으면 둘이 잘 됐을 텐데.”
“뭐, 그게 꼭 저 사람 탓인가?”
친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저 새끼 탓이지! 전여친 잊지도 못하고 질척거리던 거 내가 봤거든? 강의실에서 어떻게 단둘이 있던 건지.. ”
“단둘이 있었다고? 미친..”
“그래! 단둘이 있었다니까? 것도 어두운 강의실 안에서! 뭔 얘길 했는지 민희 선배는 울고 있더라. 그때 내가 가서 민희 선배 도와주려고 했는데, 민희 선배는 오히려 민구 새끼 감싸주더라니까? 어휴, 착해빠진 사람.”
“야, 근데 너 이렇게 막 욕해도 되냐? 그래도 그 사람 선배라며.”
“그 사람 찌그레기야. 친구라고 있는 것도 게이새끼 한명 뿐이고. 지난번에 멱살 잡을 때도 나한테 한마디도 못하던데? 개 좆밥이더라. 면상만 그렇지.”
재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음료수 캔을 찼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음료수가 쏟아지며 빈 캔이 앞으로 나뒹굴었다. 계단 한 칸씩 내려갈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뭐, 뭐야?!”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더러운 게이 새끼다. 왜.”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재훈은 음료수가 묻은 오른쪽 발로 병규의 등을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병규는 계단 한 칸 아래로 고꾸라졌다. 이후로 두 사람의 난투극이 시작됐다.

“뭐야?”
재훈이 민구 너머 있는 사람을 보더니,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다.
“왜?”
민구는 고개를 돌렸다.
“..다쳤다고..들어서.”
민희는 흰색 비닐봉투를 들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급히 뛰어온 것인지 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네가 뭔 상관인데? 네 남자 친구나 챙겨.”
다시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재훈을 민구가 막아섰다. 재훈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으로 민구를 노려봤다.
“이거.. 받아.”
민희는 다른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흰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비닐 봉투 안을 보니, 연고와 밴드가 들어있었다. 가까운 약국에서 급하게 사 온 모양이었다. 민구는 아무 말 없이 그 봉투를 받았다. 돌아서 재훈을 보니, 영 맘에 안 드는 듯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민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채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재훈아.. 민구야. 미안해.”
“네가 왜 사과해?”
민구는 약이 담긴 봉투를 재훈에게 안겨주고 민희를 바라봤다. 민희는 동그란 머리를 숙인 채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싸운거 아냐..? 병규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해서.”
“지랄. 너 때문에 싸운 거 아니거든? 재수없.”
민구는 쉴새 없이 험한 말이 튀어나오는 재훈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재훈은 눈으로 항의했다.
“네가 미안하다고 하지 마, 사과할 사람은 병규니까.”
“그래도…. 원인은 나였잖아. 그냥.. 다 미안해..미안해.”
재훈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탁, 치워버렸다. 그리고 낮게 으르렁 거리며 말을 던졌다.
“미안하면 네 남자 친구 간수 똑바로 해. 너 때문에 얘가 무슨 소리 듣고 있는지 너 아냐?”
“그만해.”
민구는 답답한 숨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네 남친이랑 남친친구가 쌍으로 괴롭히는 게 쟤 때문인데!”
재훈은 민희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화를 냈다.
“…”
민희는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만 묵묵히 숙이고 있었다.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됐지. 민구 얘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한테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딴 놈이랑 바람을 피워? 병규 새끼는 그냥 존나 멍청해서 걍 재수 없는 정도인데. 넌 그냥 진짜 못돼 처먹었어. 아냐? 그러니까, 재수없게 이제와서 걱정하는 척 하지마. 진짜 같잖으니까.”
“…..”
모든 소리를 다 들은 민희는 말없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더니 결국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야,”
“뭐.”
모든 말을 다 토해내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재훈은 씩씩거렸다. 그리고 제 품에 있는 약봉지를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면했다.
“너무 성질 내지 마. 나 괜찮아.”
“괜찮기는 쥐똥. 차이고 나서 스펀지밥만 보면서 집에 박혀 있었으면서.”
“..그건 그랬지만, 지금은 괜찮아. 정말로.”
“…”
재훈은 아무 말 없었다.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였다.
“저 벤치 앉아서 약이나 바르고 있어.”
북카페 앞에 있던 나무로 된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재훈의 어깨를 몇 번 툭툭, 두들긴 다음 걸어갔다. 민희가 뛰어간 방향으로.
“어디가.”
“약 값 주러.”
재훈은 소리 내지 않고 욕을 내뱉으며 약 봉투를 노려봤다.

“어디까지 간거야..?”
민구는 민희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운동장으로 돌아가도 그녀는 없었다.
“어? 민구 선배! 괜찮으세요..?”
그에게 살갑게 말을 걸던, 21살의 여자가 그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어.. 괜찮아.”
민구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없었다. 어수선하던 체육대회는 일단은 진행되고 있었다.
“재훈 선배는요?”
“어.. 걔도 괜찮아. 별로 안 맞아서 조금 다쳤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어.. 그, 민희는 어딨는지 알아?”
“민희 선배요…?”
여자는 민구를 살짝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민희를 찾나 싶었다.
“여기 안 왔어?”
“네.. 아까 재희랑 무슨 얘기하더니, 어디론가 뛰어가고서는 안 왔어요.”
“그렇구나.. 그래, 알겠어. 고마워.”
민구는 다시 그녀를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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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8 23:23 | 조회 : 64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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