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대회

평소라면 몇 명의 사람들만 뛰어다니던 학교 운동장은 많은 사람으로 꽉 찼다. 대부분의 사람은 운동장 앞에 있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각 디자인과 사람들은 같은 과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있다. 학교 행사 중 큰 행사였다. 오전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 소수는 경기를 응원한다고 운동장 앞쪽에 모였다. 반대로 이 이벤트에 크게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서 친한 사람들끼리 수다를 떨며 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행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민구는 이날만을 기다렸다.

체육대회였다. 가만히 앉아서 노트북 키보드와 마우스만 클릭하는 것은 온몸을 찌뿌드드하게 만들었다. 늘 뛰어다녔던 민구는 이런 생활이 꽤 힘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구는 가만히 앉아 노트북과 씨름해야 하는 디자인과였다. 운동을 사랑하는 이로서 이틀에 한 번 운동복을 입고 학교주변과 집 주변을 러닝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행사는 민구에겐 특별했다. 찌뿌드드한 몸을 마음껏 불사를 수 있는 행복한 날이었다.

민구는 거의 모든 종목에 신청했다. 과에서 운동을 좋아하는 여자 학생들도 있었지만 관심이 없는 쪽이 더 많았다. 그래서 참여도가 조금 저조했다. 소수의 남자학생들도 여자학생들과 비슷했다.
“신청할 사람 없어..?”
대답 없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민구는 혼자 손을 들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재희는 깜짝 놀랐다.
봄에게 꽃으로 얻어맞은 이후로 재희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놓고 그를 욕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식으로 던졌던 가벼운 인사도 사라졌다. 그 입장에선 그럴 만 했다. 당시에 민구는 화가 많이 났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렇게 두들겨 맞을 정도였을까? 싶기도 했다. 쫓겨나는 꼴이 꽤 불쌍했다. 그 상황에선 그냥 웃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에겐 꽤 창피한 기억일 것이다.
아무도 손을 안 들고 눈치만 볼 때, 민구가 유일하게 손을 드니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 놀랐다. 재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는 민구였다. 학과 행사도 딱히 관심 없어 보이던 그가 체육대회에 진심으로 참여하는 것이 의외였다. 계속 혼자 열심히 손을 든 민구를 보고 재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쟤 왜 너 떪은 감 보듯이 보냐.”
가만히 있던 재훈은 민구에게 귓속말 했다.
“저번에 민희랑 재희 우리 가게 온 적 있었어. 그때 싸워서 그래.”
민구는 조용히 속삭였다.
“헐, 진짜? 너 왜 말 안했어.”
“그냥~ 말씨름하던 중에 마침 사장님이 오셔서 재희 꽃으로 후드려 패고 쫓아냈거든. 그 이후로 저러네.”
“미친..! 진짜? 골때리네. 어쩌다가 그렇게 된거야? 쟤랑 싸웠다고? 왜? 쟤랑은 그나마 좀 친한거 아니였냐?”
재훈은 웃음기를 참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게…”
“잡담은 나중에 해주세요.”
속닥거리던 소리는 죽고, 과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민구는 재훈에게 입 모양으로 ‘나중에’라고 했고, 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참여도는 저조했으나, 열심히 손을 드는 민구 덕에 어찌어찌 사람들 각자 참여할 종목이 다 정해졌다.
체육대회 관련 공지를 다 듣고 나서 재훈에게 집까지 가는 동안 다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강의실 앞에서 엿들었던 내용은 뺐다. 그 이야기는 그냥 모르고 지나갔으면 했기에.
“그 사장..”
재훈은 팔짱을 낀 채로 걸으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사장.. 아직, 난 믿을 순 없지만 그래도 그때 걔네 후드려 팬건 마음에 드네. 아니 재희 걔 뭐야? 사이코패스야? 왜 그래?”
“글쎄다…. 뭐, 근데 이미 사장님이 많이 혼내줘서 별로 화가 안나.”
진심이었다. 그때 이후로 모든 일들이 다 괜찮아진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사장님 덕이었다.

“야, 진짜 날아다니네..”
재훈은 그늘진 계단에 앉아서, 무표정하게 돌아오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봤다. 어떤 종목이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고 돌아온 민구의 자태는 위풍당당했다.
“와.. 선배, 진짜 운동신경이 좋으시네요. 운동 많이 하실 것 같긴 한데. 홍길동처럼 재빠를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
“우리 과 운동 에이스가 있었네!”
“..고마워.”
민구의 활약으로 예상치 못한 종목들에서 점수를 따오니,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짝거렸다. 평소에 말을 잘 걸어오지 않았던 이들도 민구에게 응원의 말들을 건넸다. 칭찬도 받았다. 이런 대우가 어색한 민구는 좋으면서도 좀 부끄러웠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차가운 물 한 병을 손에 쥐고 들이켰다. 그리고 열이 오른 뺨에 물병을 대었다. 물병에 맺힌 이슬들이 뺨에 닿아 차가웠다. 하지만 계속되는 칭찬 릴레이에 차갑던 물병은 금방 미지근해졌다.
“민구선배랑 처음 말해보는 것 같다.”
재훈과 민구가 앉아 있는 자리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민구보다 2살 어린 21살 여자 학생은 그 옆에 앉았다. 살갑게 이것저것 말을 건넸다. 어색한 민구는 그저 더운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할 뿐이다.

오전 경기가 끝났다. 땀을 잔뜩 흘린 학생들은 다 같이 그늘진 계단에 모여 점심으로 시킨 치킨을 같이 먹었다. 몇 명은 병맥주까지 사 와서 마셨다.
“민구 선배, 한 잔 하실래요?”
그 옆에 계속 앉아서 친근하게 말을 걸던 여자애가 민구에게 맥주가 가득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거절하면 조금 민망할까 싶어 받았다.
“고마워.”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재훈은 민구에게 속닥였다.
“뭐야. 뭐야, 우리 구. 체육대회 날아다니더니 점점 인기가 오르고 있네?”
“뭐래..”
민구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입에 넣은 치킨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촘촘한 탄산들이 입안에서 톡톡 튀었다.

후끈거리는 더위는 점심을 먹고 나서 그늘에 가만히 앉아 쉬니 금방 가셨다.
“넌, 종목 뭐 나가더라?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민구는 자신 옆에서 다리를 쭉 피고 앉아서 쉬는 재훈을 돌아봤다.
“그, 뭐더라. 릴레이 옮기기? 그런거 한다던데.”
“게임 같은 건가?”
“응, 그럴걸?”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쨍쨍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평화롭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란을 가져왔다. 오후 경기로 민구가 잠깐 운동장에 있을 때였다. 흩어져서 앉아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소란스러운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체육대회를 진행하던 단과대학 대표들도 당황했다. 민구는 소란스러운 쪽을 살펴봤다. 멀리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야, 시디과 지금 싸움 났다는데?”
민구 바로 옆으로 지나간 사람의 말이었다.
민구도 그 사람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투고 있는 두 남자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솜뭉치처럼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갔다. 완전히 앞쪽으로 빠져나오니,
“야, 이 새끼야!”
재훈과 병규가 거의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뒤에서 붙잡고 말렸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많이 흥분한 듯 말려도 듣지를 않았다. 서로 먼저 할 것 없이 주먹을 날렸다. 아주 개싸움이었다.
“뭐..하는 거야.”
깜짝 놀랐다. 다급하게 재훈을 뒤로 잡았다.
“..! 민구.”
재훈은 민구와 눈이 마주하곤 주먹질을 멈췄다. 분노는 여전한 듯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더러운 게이 새끼! 저 새끼가 먼저 쳤어! 놔! 이거!”
그때, 병규를 겨우 붙잡고 있던 남자가 그를 놓쳤고 다시 재훈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뒤에서 달려들었다. 민구는 그의 손을 막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대 맞았다. 맞은 방향으로 얼굴이 돌아갔다. 맞은 왼쪽 뺨이 얼얼했다. 살짝 감각이 없는 것 같다가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손을 들어 입 쪽을 슥 닦으니, 피가 조금 묻어나왔다. 손이 닿았을 때 따금한 것을 보아 입술도 터진 것 같았다.
“이 개새끼야! 얠 왜 때려!”
다시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재훈을 저지했다.
“진정해. 너 얼굴 다쳤다.”
피가 조금 뭍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슥 지워냈다. 입술을 움직이니 상처 난 부위가 약간 따가워 얼굴을 찌푸렸다. 뒤에서 발작하는 놈을 무시한채 재훈을 데리고 가려했다.
“더러운 게이 새끼! 저 봐! 둘이 붙어먹은 거 맞네! 야! 누가 여자냐? 어?”
옮기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병규는 머리를 쥐어 뜯긴건지 산발이었다. 게다가 얻어 맞은 부분은 빨갛게 부어 올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들을 토해냈다.
“하…”
발작에 가까운 발광을 하는 병규에게 민구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화가 났지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뭐! 뭐!”
민구가 그에게 점점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까이 다가오자, 병규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민구는 최근 꽃다발만 열심히 만들던 손에 힘을 꽉 쥐었다. 큰 주먹에 큰 핏줄들이 돋아났다. 힘을 준 채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니 관절들이 뚜둑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흠칫 소름이 돋았다.
“야,”
민구는 병규를 내려다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뭐,뭐!”
병규는 바로 전에 정신 나간 패기는 어디 갔는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런데도 민구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쾌했다. 눈에서 악의가 가득했다.
“제발, 좀”
그의 어깨에 오른손을 턱, 올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쇄골의 패인 부분을 짚고 꽉, 눌렀다. 정말 세게, 그냥 으스러져 버려라 하는 심정으로.
“악!”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꽉 눌렀다. 꽤 아팠을 것이다. 맞은 부위만 빨갰지만, 이제는 얼굴 전체가 새빨개진 채 내 손을 떼어내려 아등바등했다.
“닥쳐, 진짜 뒤지기 싫으면.”
“아악! 그,그만! 그만!”
한 10초 정도 구멍이 뚫릴 정도로 꽉 눌러주었다. 놓아주니,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쓰레기 새끼.”
좀 더 때려줄까, 싶었다. 근데, 바닥에 나자빠져서 부들거리는 꼴이 영 아니어서 욕만 뱉어주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재훈과 함께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주역이 사라지자 잠시 조용했다.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 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구 옆에 앉아서 살갑게 말을 걸던 학생이었다.
“야, 조병규 너 미쳤어?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 해?”
그를 꾸짖는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녀를 시작으로 한 명씩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손가락질했다. 조병규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픔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신을 욕하는 이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뭐! 박재훈 저 새끼가 먼저 나 뒤에서 깠다고!”
“병규야. 이제 그만해. 네가 먼저 민구선배 뒷말했지 않아. 방금 한 말도 그렇고 선 넘었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싸움을 관망하던 재희가 말했다.
“뭐..?”
병규는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구겼다.
“야, 내가..내가 누구 때문에..”
병규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 진짜 그랬어?”
“진짜, 미쳤다. 왜 저래?”
“재훈 선배는 괜찮은가? 민구 선배도 그렇고 저렇게 진짜 화내는 건 처음봐.”
“화날 만도 하지, 병구 새끼 뇌 절했잖아.”
병규는 먼지가 나뒹구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밀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도망간다.”
“지도 쪽팔린거지.”
그는 없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계속 떠다녔다.

“재희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누가 싸운건데?”
민구와 재훈이 사라진지 얼마되지 않아 다급하게 도착했던 민희는 재희에게 물었다.
“재훈선배랑 병규요.. 병규가 말실수를 해서.”
재희는 곤란한 듯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재훈이랑 병규가? 민구는? 다치지 않은 거야?”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점점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그 둘을 찾았다. 하지만 그 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민구선배가 재훈 선배 데리고 갔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병규가 뭐라고 했길래…재훈이가.”
“입에 내뱉기도 좀 그런 말이에요. 안 듣는 게 나아요.”
재희는 놀란 그녀를 위로하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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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8 00:23 | 조회 : 88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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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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