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민구는 웃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편하고 후련한 웃음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지만, 마음이 편했다.
“맞아요. 사장님은 유니콘 사장님이세요.”
“어?”
“어? 왜, 왜요?”
봄은 깜짝 놀란 듯 길고 시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봄이 놀라니, 민구도 잇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그란 눈들에 물음표가 떠다녔다.
“웃었네!”
“저..저 평소에도 웃지 않나요?”
“아냐 아냐, 평소엔 입꼬리만 이렇게 올리고 지금은 완전히 눈까지 웃었어!”
봄은 양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자신의 양 입술을 억지로 올렸다. 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봄은 가끔 잘생긴 얼굴을 막 썼다. 근데도 어이가 없는 것은 저런 짓을 해도 잘생김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랬나요?”
민구는 다시 얼굴을 폈다.
“뭐야, 잘 웃다가 갑자기 왜 정색해.”
봄이가 보는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얼굴에 있는 솜털 하나하나까지 뜯어 볼 같은 강렬한 눈빛이었다. 너무 쳐다보니 얼굴에 열이 오를 것 같았다.
“그.. 너무 웃으면 더 무섭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어서..”
“누가 그래? 귀엽기만 한데. 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어~!”
“…사장님만 그렇게 얘기하세요.”
“사람들은 참 뭘 모르네.”
몇 분간 대화를 더 나눈 뒤, 두 사람은 식탁을 같이 치웠다. 막상 먹자고 꺼내놓은 케이크는 많이 먹지도 않았다.

“사장님.”
“응?”
봄은 침대에 누운 채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같,이 자나요..?”
“응.”
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구가 침대 앞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 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팔을 딱 붙잡더니, 침대로 끌어당겼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민구는 봄의 위로 넘어졌다. 굉장히 어정쩡한 자세였다. 다른 사람이 만약 문을 열고 이 방에 들어온다면 눈을 가리고 다시 조심스레 문을 닫을 것 같은 자세였다.
“사..사장님??”
“여기까지 왔으면 이런 건 예상하지 않았니?”
뭘요?!
“고민상담 값을 해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구야.”

“…”
“…”
민구는 첫날 아침처럼 잠에서 깼다. 너무 잘 잤다. 터가 좋은 집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그날 아침처럼 봄이가 누워있었다. 다른 것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민구는 어제 잠들기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동안
일반적인 대화를 했더니 사장님의 특이한 성격을 잊고 있었다.

“사.사사장님! 죄송해요. 저는 절대 그런 의미로…!”
봄은 자신 위에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민구를 자신의 옆으로 눕혔다. 민구는 밀리면 밀리는 대로 옆에 누웠다. 봄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덮은 뒤, 민구를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사장님…?”
“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뭐긴, 자려고 하는 거지.”
민구는 봄에게 붙잡혀 꼼작 없이 갇혀버렸다.
“사장님, 값이라는 게 그냥 이렇게 껴안고 자는 건가요..?”
“응, 오늘 밤 내 죽부인 해라. 야, 너 신기한 게 몸은 딴딴한데 끌어안고 자니까 겁나 잠 잘 오더라. 그 뭐냐? 그래, 그립감 최고야. 너.”
“…”
“엉큼한 자식~! 뭘 생각한 거니? 어휴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더하다더니. 역시 제일 엉큼하구먼. 엉큼한 알바생을 뽑아버렸어~!”
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민구를 농락했다. 민구는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봄이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얼른 자세요.”

양팔도 붙잡혔기에 불편해서 일찍 못 잠들 줄 알았는데,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눈을 감고 있는 봄의 얼굴을 잠시 감상했다. 가만히 있을 땐 정말 모든 부분이 화보 같은 사람인데, 가끔 저 잘생긴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어제 잠들기 전에 했던 말들이 그랬다. 보통 잠자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 좀 못난 얼굴이 되지 않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얼굴도 살짝 그러기 마련인데, 봄은 새삼스럽지만 정말 조각 같았다. 긴 단발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리기도 힘든데, 베게 위로 살짝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햇빛에 받아 반짝거렸다. 가끔 같은 사람인가? 싶었다.
“그렇게 보기 좋니?”
멍청히 있으며 얼굴을 감상하고 있을 때, 아침이라 살짝 잠긴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떠다녔다.
“… 언제 일어나신 거에요?”
“네가 뒤척일 때부터..”
봄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어둑하던 초여름의 하늘은 맑게 개었다. 거칠게 쏟아붓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웅덩이들도 밝은 태양 아래서 바싹 말랐다.

평화로운 주말을 보냈다. 금요일이 지난 토요일 민구는 봄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나서 둘은 같이 아침을 먹었다. 일찍, 집에 가려는 민구를 봄이가 붙잡았다. 여기만 오면 도망가려고 하냐는 말과 함께 말이다. 민구는 얌전히 봄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었다. 고소한 두부 된장국과 집에서 직접만든 집반찬들은 정말 그리운 맛이었다. 될 수 있다면 이곳에 들어와 살고 싶을 정도였다.

맑게 갠 날씨처럼 매우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평일이 되었다. 학교에서 여전히 만나기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민구는 어쩐지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바뀐 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으나 마음이 물의 파동이 일지 않는 호수보다 평온했다.

중간 조별과제는 무난히 끝이 났다. 재희가 병규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후로 병규는 그에게 이전처럼 이상한 트집을 잡지 않았다. 의외로 조별과제는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바뀐 것 하나 없고, 멱살 잡힌 것에 대한 사과도 듣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상처가 있는
끝이었지만 민구는 그래도 만족했다. 민희와 재희가 ‘큐티’에 오기 직전까진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서오세요.”
이 장소만큼은 민구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물론 이제 아주 가끔 진상들이 오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마다 봄이가 그를 도와주었다. 봄이가 없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좋았다. 자신에게 이유 없이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이유 없이 그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재훈이 그런 사람이었고, 새로운 인연 봄도 그러했다.

“어…”
대학로에 있는 꽃집이니, 자신이 계속 일하는 동안은 언젠가 가게에 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막상 마주치니 완전히 마음이 평온치는 않았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가게로 들어왔다. 바로 나가길 빌었는데, 머뭇거리는 민희와 달리 오히려 재희가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그 웃음을 예전엔 사람 좋은 웃음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꽃집 알바라고 언뜻 얘기 들었는데, 여기서 일하고 계셨네요!”
“응.”
민구는 억지로 싫은 손님을 응대하는 것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가게의 테이블에 앉아 작은 노트에 적으며 정리를 했다. 대충 대답하면 적당히 있다가 갈 줄 알았다. 근데 재희는 마치 서로가 굉장히 친분이 있는 것처럼 계속 민구에게 말을 걸었다.
“꽃집 알바라니, 신기하네요. 어떻게 뽑힌거에요?”
“그냥..어쩌다 보니.”
“꽃집에선 어떤 일 하나요?”
불편하게 자꾸 왜 이럴까, 그냥 살 거면 얼른 사고 가버리지. 왜 자꾸 평소에 말도 안 걸었으면서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붙여오는 것일까. 민구가 병규에 멱살이 잡힌 날 이후로 재희는 더 이상 민구를 친숙하게 대하진 않았다. 말투는 친절했다. 하지만 행동이 이전과 다른 것은 확실했다. 민구를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민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오늘은 마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처럼 그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아닌가?
“너랑 잘 어울린다. 너 꽃 키우는 거 관심있었잖아.”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서 있던 민희도 그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 다정한 말은 전혀 민구에게 반갑지 않았다. 쌍으로 와선 불편하게 왜 억지로 친밀하게 구냔 말이다. 진짜 친밀한 것도 아니면서 가면 쓴 얼굴로 다정한 말을 건네니 불편할 뿐이다. 속된 말로는 두 사람 다 재수가 없었다.
“살 거면 사고 안살 거면 나가.”
손 닿으면 얼어버릴 듯한 차가운 목소리에 민희는 움츠러들었다. 가게엔 어색한 적막이 맴돌았다.
“민구선배. 아무리 사장님이 지금 안 계신다고 해도 알바하면서 손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적막을 깬 것은 굳은 재희의 목소리였다.
“뭐가?”
“아니, 그래도 우리 손님으로 온 건데. 말하는 방식이 좀 잘못된 거 같아서요.”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라는 얘기야. 바빠.”
민구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화를 내면 찜찜한 기분일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민구선배… 좀 너무하시네요.”
민구는 기가 찼다. 뭐가 너무하다는 건지.
“저는 좀 불편해도 선배랑 잘 지내려고 말 건 건데. 누나도 마찬가지예요. 선배랑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꼭 그렇게까지 나쁘게 말을 해야 했나요?”
민구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게 지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었다.
“나랑 왜 잘 지내려고 하는 거야? 왜?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그래도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서로 얼굴 붉히면서 불편한 것보단 낫잖아요.”
“그건 너희 생각이지. 난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왜? 너도 나 불편해했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쟤가 선배 불편해했다고요? 언제요? 저는 늘 선배한테 잘 해드리려 했는데…. 선배 재혼선배 말고는 과에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잘 챙겨드리려 노력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좀 속상하네요….”
펜을 쥔 민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쥔 펜의 플라스틱 부분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잘해주려고 했다고? 야, 넌 내가 우스워? 아주 병신같나 보다?”
살면서 처음 내뱉은 욕설에 목소리가 떨렸다. 물론 처음에 재희가 그에게 잘해준 것은 맞다. 친절했다. 발표가 끝난 뒤 병규와 그의 대화를 듣기 전까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필 저 사람이랑 걸려서는. 진짜 불편해 죽는 줄 알았다.. 설마 기말 조별도 같은 조였던 사람이랑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진짜 싫은데.”
병규의 목소리였다.
“왜, 조사하는 건 엄청나게 꼼꼼히 잘했잖아.”
재희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네가 불편하잖아. 왜 자꾸 그 사람한테 잘해주려고 그래? 너도 그 사람 불편해했잖아.”
“그냥.. 그 사람 불쌍하잖아. 재훈 선배 없으면 맨날 혼자 있고, 제대하자마자 차이고. 그냥 불쌍해서 그렇지 뭐.”
“야, 근데 너 그거 들었어? 재훈선배 게이라며? 둘이 맨날 같이 붙어 다니는 거 보면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된 거 아니냐?”
“에이, 설마. 민구선배 그전까지 민희선배랑 유명한 씨씨였잖아.”
“그러니까, 민구 선배 차이고 나서 재훈 선배랑 그렇고 그렇게 된 거지.”
“미친. 막장 드라마 쓰냐?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아. 지난번에는 어쩌려고 민구선배 멱살 잡은 거야? ”
“아니.. 난 네가 민희선배랑 잘 안되는 게 그 선배 때문인 것 같으니까, 너 도와주려고 그랬지.”
“그게 어떻게 도와주는 거야? 가만히 있어.”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가끔 재훈과 같이 만나서 과실에 과제를 같이 하기 위해 약속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충격적인 대화에 잠시 띵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 휴대폰 화면에 재훈의 연락이 떴다.
민구는 재빨리 과실을 벗어났다. 계단을 타고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연락을 받았다.
“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너 과실 도착했냐?”
“아니, 야. 우리 저녁 먹자.”
“엥? 벌써? 지금 5시도 안 됐는데.”
“점심 못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어.. ”
“어..그래, 뭐 나도 살짝 입이 심심하긴 했다. 일찍 먹고 쭉 과제 하지 뭐.”

“선배,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세요. 전 정말…!”
살면서 나쁜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정말 이렇게 앞뒤가 다른 사람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말 하는 방식도 언뜻 들으면 듣는 사람이 잘못한 것처럼 느끼게 말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3
이번 화 신고 2021-01-16 17:57 | 조회 : 83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