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신스

“..저기.”
벽시계에 잠시 고정했던 시선을 내렸다. 열린 가게유리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지난번의 그 경찰서에 잡혀갔던 진상이었다.
“어..?어서오세요.”
늘 술에 잔뜩 취해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들어오던 사람이었다. 머리도 산발에, 얼굴도 완전히 새빨개져선 엉망인 채로 가게에 왔는데, 처음으로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멀쩡한 모습으로 가게를 찾아왔다. 검은 생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남색과 흰색의 조합의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때 봤던 그 진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멀쩡하게 입고 오니 훈훈한 20대 후반 일반적인 직장인 같았다.
“오늘..봄이는 없는 날이죠?”
크고 경박하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다. 공손한 말투가 어색해서 살짝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네.사장님은 오늘 안 계신 날이에요. 오늘은..무슨일로.”
“정말..지난번 일에 대해서 사과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남자는 민구에게 상체를 완전히 90도로 숙인채 쥐고 있던 검은색 종이봉투를 민구에게 내밀었다.
“정말..지난번의 모든 추태, 정말 죄송합니다….!”
하도 들이미는 통에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살짝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지난번에 봄이가 민구에게 주었던 같은 브랜드의 물건이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금박 로고가 보였다. 남자는 몇 번이나 민구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가게를 나갔다. 뭐지? 지난번의 초콜릿 상자보다 더 컸다. 상자 위의 비닐로 처리된 부분을 통해 안을 보니 조각 케이크가 담겨 있었다. 민구는 가게 안쪽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 상자 채로 넣어두었다.
마감 시간까지 가게는 조용했다. 10시가 되고 나서 민구는 가게 정리를 하다 냉장고에 있는 케이크를 떠올렸다. 케이크 가져가시라고 연락드리는 게 좋을까? 민구는 가게 안쪽에 있는 냉장고와 벽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고민하던 민구는 가게 청소를 다 한 뒤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 있는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어? 너 왜 아직 안 가고 있어?”
봄은 아직 켜져 있는 가게를 보고 깜짝, 놀라 들어왔다. 그곳에서 민구는 한쪽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사장님.”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는지, 봄은 물방울이 끝에 조금씩 흐르는 검은색 우산을 갖고 가게에 들어왔다.
“잠든 거야?”
“어..”
왜 기다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네,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들었나 봐요…”
“야 이 녀석아! 가게 문도 안 잠그고 잠들면 어떡하니? 위험하게.”
봄은 가볍게 민구의 등을 툭, 쳤다. 꽤 엄한 말투였지만 그를 때린 손의 힘은 약했다.
“죄송해요..아, 사장님. 지난번에 그 경찰에 끌려갔던 분이요.”
“그 사람 왜? 가게 찾아 왔어?”
“지난번에 죄송했다고, 케이크 주고 가시던데요?”
“아~ 그거 너 꺼야.”
“어? 제 꺼요?”
“어, 지난번에 민국 형네에서 일할 때 찾아왔는데. 그때 나한테 초콜릿 주면서 사과하더라. 나 말고 너한테 사과하라 했는데.. 오늘왔구나. 케이크 네 꺼니까, 가져가면 돼~”
“아..그렇군요.”
민구는 멍하니,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넣었다. 봄은 바로 가게에 나가지 않고 민구의 얼굴을 살펴봤다. 가방을 멘 민구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봄과 눈이 마주쳤다.
“야.”
“네…?”
“가출청소년. 오늘은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가출청소년이요…?”
“너 지금 마음 복잡해서 밖으로 나돌고 있는 거 아니야? 딱 느낌이 가출청소년이다. 인마.”
“…딱 알아보시네요.”
“내가 그런 마음 잘 알지!~”
봄은 팔짱을 딱 낀 채 그 특유의 방정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케이크 들고 나와,”
봄은 민구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서 가게 유리문쪽으로 걸어갔다.
“아, 빨리 가게 문 닫아야죠..”
“케이크 들고, 2층으로 올라와.”
“네?”
“지금 12시야. 버스 다 끊겼어. 자고 가. 비도 많이 온다.”
봄은 저 말을 끝으로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종이 가볍게 딸랑- 울렸다.

버스를 타고 가지 않아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민구는 그러지 않았다. 봄이 말한 대로 그는 냉장고에 넣어뒀던 케이크를 가지고 가게를 불을 다 끄고 나서 가게 문을 잠갔다. 비가 내리는 2층 계단에는 물웅덩이가 곳곳에 일렁이고 있었다. 한 칸 한 칸 내디딜 때마다 참방,하고 시원한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이층집의 현관문 앞에서 비닐우산에 매달려있는 물기를 탁탁 털어냈다.
그러고 나서 똑똑, 문을 두드리니
“어서 오세요~”
하고 봄이 문을 열어주었다.
“실례합니다..”
지난번에는 정신없이 나가느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가게의 분위기와 집안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가게만큼 집을 꾸미고 있는 가구들이 하나같이 귀여웠다. 앙증맞은 분위기에 박차를 가하는 인형 장식품들은 거실 티브이 밑 진열장에 꾸며져 있었고, 창문에 달린 커튼은 끝자락에 레이스 솔이 달려서 거실 분위기를 좀 더 아늑하게 만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작은 화분들도 몇 가지 있었다.
“사장님 취향은 정말 소나무네요.”
민구는 거실을 조심스레 둘러보며 읊조렸다.
“음.. 완전히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우리 엄마 취향이지.”
“어. 어머니요?”
“응.”
“사,사장님 혼자 사시는 집 아니에요?”
혼자 살기엔 큰집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지금 사장님의 어머니가 계신 걸까? 새벽에 이렇게 찾아온 게 좀 많이 실례인 것 같은데.
“지금은 혼자 살아.”
“….”
서,설마..또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을 건드린 건가?! 민구는 얼굴이 하얘졌다. 아무 말 없이 정승처럼 굳어서 서 있는 민구를 보더니, 잠깐이지만 봄의 얼굴에 장난기가 돋았다.
“휴..같이 살때는 좋은 줄 몰랐지..”
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민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봄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살짝 내려간 그의 시선은 지나간 추억에 잠긴 듯 보였다.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지..”
“사,사장님… 죄,죄송..”
얼굴이 거실 창문에 걸려 있는 하얀 커튼보다 더 창백해져선 말을 더듬으니, 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하던 집안에 새벽의 봄꽃이 피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선 멍한 상태로 민구는 눈물이 나도록 웃고 있는 봄을 쳐다봤다.
“하하..! 너 가끔 정말 너무 순진한 거 같다. 놀리는 맛이 있어. 어머니는 지금 잠시 아버지랑 여행 다니시는 중. 캠핑카 사서 전국순회 하고 계셔.”
“사장님…정말..!”
가끔, 이 사장이 정말 자신보다 4살 연상이라는 게 의심됐다.
“오, 화내는 거야?”
봄은 민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깐족거렸다.
“헹! 난 사장이지롱! 알바생! 어디 한번 사장한테 화내봐라. 임마!”
“그 정도만 하세요..”

한참 봄은 깐족거렸다. 그런 봄이를 뒤로 한 채 민구는 거실 소파 위에 자신의 가방을 올려두었다.
“케이크는 냉장고에 넣어둬.”
민구는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이거 한 조각 드실래요?”
“어, 지금?”
티브이 위에 걸려있는 시계를 올려다보니,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차, 지금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지.
“아, 너무 늦었죠…?”
“음..아냐, 좋아~ 조금 먹다가 자지 뭐.”
봄은 고개를 돌렸다.

거실과 부엌의 공간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부엌에는 4인 가족용의 베이지색 식탁이 있었다. 그 위에 선물 받았던 조각 케이크 두 개를 꺼냈다. 봄은 꽃내음이 나는 차 두 잔을 내려 식탁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집도 안 가고 그렇게 남아있던 거야?”
봄은 흰색에 금색 테가 둘린 머그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민구는 조금 망설였다.
“얘기 안 하고 싶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 아니요..그건 아니고. 그냥..”
“그냥?”
“그냥… 좀 창피한 얘기라서….”
“전 여자친구 문제구나?”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역시~ 그냥 때려 맞춘 거지 뭐. 너 취해서 차인 이야기했던 게 떠올랐거든. 휴 그땐 정말이지 깜짝 놀랐었지. 쾅 소리에 놀라서 나가보니까 바위 같은 사람이 가게 앞에 엎어져 있어서 난 뭐 큰일 난 줄 알았잖아. 그 뭐냐 뉴스에 나오는 묻지 마 살인사건 같은 거 일어난 줄.”
민구는 여전히 검은색으로 지워진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던 거지?
“아, 맞다. 저 취했을 때 다 얘기했다고 하셨죠…?”
“음..뭐, 그랬지.”
“제가 어디까지 다 얘기한 거에요?”
“음…글세, 아마도 전부…?”
“창피하네요….”
“괜찮아. 그럴 만도 하지. 6년의 네 모든 청춘을 쏟아부었던 사람인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민구는 눈앞에 놓은 차에 어렴풋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오른쪽 눈의 흉터도. 손을 들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더듬었다.
“왜 차인지 이유를 몰랐는데.. 오늘 알게됐어요. 차인 이유에 대해서 어렴풋이 예상하긴 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어요. 사장님 말 그대로 6년동안 모든 청춘을 함께했던 사람인데. 그 긴 추억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쉽게 깨질 수 있는 건가 싶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보니까, 아니었나 봐요.”
“다른 사람이 생겨서 차였구나.”
“다른 사람이 그래도 걔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 이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어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근데 또 모르겠네요. 오늘, 정말 오랜만에 전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듣기가 무서웠어요.”
“그랬구나. 여러모로 힘들었겠네.”
“….”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사장님과 길게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인 것 같아. 내려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리니, 봄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힘들었겠네.’ 이 말을 들으니 괜히 마음이 바늘에 콕 찔린 것처럼 따가웠다.
“조별과제가 있는데…. 저 말고 두 명이 있거든요. 한 명이 전 여자친구랑 썸타는 사이였어요..”
“으..얘기 듣기만 해도 불편하네.”
“그렇죠..? 다른 친구는 절 싫어하고.. ”
“그랬어?”
봄의 눈에서 왜? 라는 물음이 피어올랐다. 민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속에는 눌러놓은 많은 감정들도 함께 나왔다.
“사장님.. 사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건가요…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이런일이 생길까요. 왜 욕먹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멱살잡힌지도 모르겠고.. 그냥 내가 잘못인가 싶기도 하고..”
한 번 속에 있던 말을 꺼내니, 깊숙히 숨겨두었던 것까지 꺼내버렸다. 순간, 말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너무 무거운 감정은 털어놓고 싶지 않았는데.
“하하..죄송해요. 너무 무거운 얘기죠?”
민구는 꺼내고 나서 한입도 먹지 않은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서 한입 삼켰다. 꾸덕한 초콜릿이 혀에 닿으니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정말 맛이 좋은 케이크였다. 지난번에 봄에게 받았던 초콜릿도 이와 비슷했다. 역시, 비싼 게 좋은 거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우울한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원래 사는 건 노잼이야. 거지 같은 순간도 매우 많지. 근데, 나도 잘 몰라~! 사는 게 뭔지,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것인지.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정답은 대체 뭔지. 근데, 뭐 어떡해. 이미 살고 있는데. 살아야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보고 사는 거야. 가끔 이렇게 우울한 날 있으면 열 좀 내다가 맛있는 거 먹고 한숨 푹 자고 다시 일어나면 또 괜찮아지고. 그런 거지, 뭐.”
방금 비어낸 민구의 찻잔에 봄은 아직도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올리는 차를 따라주었다. 빈 찻잔에 고운 빛의 물줄기가 일렁이며 채워졌다.
“오늘 같은 날은 좀 힘든 거 얘기해도 돼.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감정을 잘 참는 게 강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지 않아. 감정은 표현하는 거야. 잘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서 표현해야 하는 거야.”
봄은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민구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큰 키에 비해 살짝 작고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민구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몇 번 톡톡 두들겼다. 아주 가벼운 손짓이었다.
“너무 참지는 말아.”
“…..”
“정신건강에 아주 좋은 말 알려줄까? 날 싫어하는 애들이 병신이다! 라고 생각해. 날 감히 싫어하다니, 그 친구들은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볼 거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큽..”
“알았지? 캬, 이런 사장님 또 어딨냐. 직원 밥 안 먹었음 밥 챙겨 먹여. 피곤하면 단 거 챙겨줘, 멘탈 관리서비스도 철저하고. 이런 복지 서비스 어딨냐? 그렇지?”
봄은 가게에 핀 히아신스보다 더 활짝 웃었다. 보고 있는 사람의 기분도 좋아지게 하는 어여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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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5 21:55 | 조회 : 819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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