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미묘

조원들과 회의를 하기전에 민구는 봄이의 도움을 몇가지 더 받았다. 두 번째 회의할 때. 다시 정리해왔던 자료를 재희와 병규에게 보여주니, 재희는 밝게 웃으며
“진짜 수고하셨어요!”
라고 말했다. 민구는 긴장되어 살짝 힘이 들어갔던 손에 힘이 확, 풀렸다. 여전히 병규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민구에게 뭐라 하진 않았다. 그냥 쓱 훑어보더니 프린트물을 과실 책상 위에 사뿐히 내려놓는 것이 다였다. 회의는 일찍 끝났다. 다 같이 해온 자료들을 총합해서, 피피티에 들어갈 구상을 같이 의논한 뒤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수고하셨어요.”
재희는 가방을 챙겨 들고, 민구에게 인사를 한 뒤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병규는 고개만 살짝 까닥인 뒤 재희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오늘은 무사히 끝났네. 근데,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저 친구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 민구는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지금까지 병규와 자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둘이 제대로 된 대화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병규는 늘 재희와 어울렸고, 민구는 재훈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모르겠다! 민구는 알 수 없는 고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노트북을 열었다.

회의가 끝나고 한 두시간 정도 민구는 재훈을 과실에서 기다렸다. 재훈과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건조한 눈을 잠시 비비며 쉬고 있을 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끝났어?”
“어어, 나 건물 앞 다왔어. 지금 나와.”
“응, 알겠어.”
책상에 널부러진 노트북, 공책, 필기구들을 챙기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가방엔 여전히 봄에게 주기 위해 샀던 손수건이 담긴 종이봉투가 있었다.

“사장님!”
민구는 그 날 몇 번이나 손수건을 건낼 타이밍을 찾았다 하지만 막상 주려니 이 뭐랄까, 교복 입던 시절에 초콜릿을 건내던 수줍은 여학생 같은 기분은 뭘까. 그리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자꾸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저기…”
“응?”
민구가 계속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이니 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와 눈을 마주하니 더 긴장되었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민구가 호기롭게 소리치자 마자, 여름 소나기가 후두두 쏟아내렸다. 아침부터 구름이 살짝 껴 있더니 오후가 돼서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어? 비 오네. 민구야 가게 밖에 있는 화분 들르자.”
“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망설인 거지, 사장님은 그때 뭐라고 생각하셨을까. 흑역사까진 아니지만 조금 민망한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좀더 친해지고 익숙해지면 드려야지.
고개를 세차게 돌린 뒤, 가방을 메고서 강의실을 나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는 버튼을 꾹 누르고 서 있으니,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3학년 과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리는 소리를 따라 민구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 강의실 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잘 지내나 보네.. 그 곳에는 최민희가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한쪽 귀로 넘긴채 웃으며 두 사람과 대화를 하며 웃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이 알던 민희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3명이다 싶었지, 재희와 병규였다. 두 사람은 민희와 굉장히 친해 보였다. 왜 병규가 나한테 그랬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네. 병규가 민희에게 관심이 있어서 전 남자친구인 민구를 경계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민구는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 위로 올랐다.

“아까 전화할 때까진 괜찮더니, 갑자기 왜 또 죽을상이래.”
전화할 때만 해도, 살짝 피곤한 목소리긴 해도 이 정도로 음울한 분위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재훈은 밥을 먹는건지, 밥알을 세 알리는 건지 모르겠는 민구에게 물 한잔을 떠서 내밀었다.
“어..고마워.”
민구는 물 한 컵을 받아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턱에 구멍 난 사람처럼 물을 질질 흘리고서야 정신 차리는 민구를 보고 재훈은 한숨을 쉬었다.
“최민희라도 봤냐?”
“어?”
역시 그랬군.
“미련있냐?”
“아냐! 미련은 없는데….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이상하네.”
식탁에 흐른 물을 닦기 위해 티슈를 한 장 뽑았다. 얇은 티슈가 작은 물웅덩이에 닿으니 금방 스며들어 흰색이 흐려졌다. 손끝에 물기가 묻어나니, 민구는 한 장 더 뽑아서 닦았다. 다 닦고 난 휴지를 동그랗게 뭉친 뒤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으며 재훈에게 물었다.
“야. 혹시. 있잖아.”
“왜?”
“민희…. 새로 사귀는 사람 있데?”
재훈은 민구만큼은 아니지만,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민희와 완전히 연락을 끊은 이후로 민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재훈도 몰랐다. 드문드문 과 건물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그에게 인사하는 민희를 무시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이젠 민희도 재훈을 보면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지나갔다.
“왜, 걔 누구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재희랑 병규랑 아는 사이더라고..”
“너 조원?”
“어.”
“재수 털려, 그래서 너한테 자꾸 시비 걸었네.”

찜찜한 마음은 풀리지 못하고 다음날이 되었다. 금요일이었다. 찜찜한 민구의 감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휴대폰으로 오늘 날씨를 확인했더니, 오후에 비가 있었다. 자취방에 하나 있는 편의점에 산 투명한 비닐우산을 들고 집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교양 강의를 마치고 난 뒤, 조별과제를 마무리하기 위에 과실로 향했다. 조용한 과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민구는 얼어버렸다. 민희가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강의실은 흐린 날씨 탓에 평소보다 어두웠다. 강의실의 창문 앞에서 민희는 비가 오는 바깥풍경을 바라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안녕.”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민구는 그만 인사해버렸다.
“안녕..”
민희도 조금 놀란 듯 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슬쩍 미소를 지었다.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대놓고 얼굴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다시 강의실에 나가 다른 곳에 있다가, 재희에게 연락이 오면 다시 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즘 민희는 민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민구야. 그 때…내 할말만 하고 가서 미안했어.”
민구는 양 손을 꽉 진채 움직이지 못했다.
“…괜찮아.”
하나도 괜찮은 것이 없었다. 차인 이후로 생활이 엉망이었다. 겨우 괜찮아진 것도 최근이다. 근데, 그런 민구와는 달리 민희는 헤어지기전이랑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민구는 약간 억울한 감정도 느꼈다. 나만 힘들었던 건가?
“사실..그때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어.”
“..”
“혹시, 오늘.”
“미안한데, 나 너랑 따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꽉 쥐고서 목소리를 겨우 쮜어짜내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민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천천히 모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그렇겠지..?미안…”
얼마나 내가 우스우면 저런 식으로 나올까, 민구는 조금 화가 났다. 마음대로 이별 통보하고서 가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럴까. 민구는 차이고 나서 딱 한 번 민희에게 전화했다. 결국 신호음 소리만 들렸고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때의 창피함을 민구는 잊을 수 없다.
“미안해..”
그녀가 고개를 드니, 큰 눈에는 유리구슬 같은 눈물방울들이 매달려 있었다. 화가 났지만, 막상 저런 얼굴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민구는 마음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차 놓고 자기가 우는 것은 또 뭐란 말이야?

“뭐야?”
안 좋은 일은 늘 겹친다고, 어색한 이 강의실에서 병규가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애처롭게 울고 있는 민희를 보면 안쓰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병규는 울고 있는 민희를 보고는 화가 잔뜩 나서 민구에게 주저 없이 다가갔다. 민구는 아무 말 없이 다가오는 병규를 바라봤다.
“민희 선배한테 뭐라고 했길래, 민희 선배 울고 있냐고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민구의 낯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민구는 기분이 한층 더 우울했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근데, 왜 울고 있는 건데?”
병규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자, 민희는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한쪽 팔을 잡아 말렸다.
“병규야..! 그러지마. 진짜 민구는 아무것도 안 했어..그냥…. 내가.”
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렸다. 이거 아무리 봐도, 내가 괴롭힌 것처럼 보이잖아. 민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이런 상황이 되니 아주 그냥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싶었다.
“누나는 가만히 있어봐요.”
병규는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민구의 얼굴을 뚫을 것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
역시, 민구의 예상대로 였나보다. 민희는 병규와 사귀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병규가 금방이라도 민구에게 달려들 것처럼 씩씩 대는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민구도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 앞에서 울고 있다면 병규처럼 나왔을 것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예상치 못하게 곧바로 병규는 민구의 멱살을 잡았다. 병규는 민구의 생각보다 더 참을성이 없었다. 멱살을 잡힌 게 처음이라 민구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병규의 입에서 민구를 더 당황스럽게 할 말들이 나왔다.
“미련 있다고 이런 식으로 괴롭히면 돼요? 민희 선배 이미 재희랑 사귀고 있으니까,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
어? 네가 민희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그렇다면..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데?! 민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민희랑 사귀는게…재희라니, 민구는 재희를 꽤 좋아했다. 병규가 이유 모를 트집을 잡을 때 자신을 늘 도와줬다. 그리고 회의하면서 의견을 주고 받을 때,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재희에게 물어보면 굉장히 친절히 설명채주었다. 재희는 친절했다. 과에서 재훈이 말고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재희였다. 잡힌 멱살을 풀어내려고 손을 올렸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쳐다봤을 때 재희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어..? 뭐, 뭐하는 거야?”
멱살 잡힌 사람, 멱살 잡은 사람, 멱살 잡은 사람을 말리는 사람 세 사람은 동시에 재희를 쳐다봤다. 아주 야단법석인 광경이었다.
“야..야, 너 왜그래?”
재희는 민구의 멱살을 잡은 병규의 손을 잡고 떼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민구는 아무 잘못 없어! 그냥,, 내가. 내가 그냥 운거야!”
민희는 민구를 한번 힐긋 보고난 뒤, 강의실에서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누나..! 무슨 일인데 그래..?”
나가는 민희를 재희가 불러보지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어색해진 세 사람. 민구는 민희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괴로웠다.

너무나 어색해진 적막 속에서 민구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꺼냈다. 재희는 병규에게 눈치를 줬고, 병규는 뻘쭘해서 아무 말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한 조별회의는 정말이지 어색했다. 숨 쉬는 것도 거슬릴 정도의 적막 속에서 회의는 끝이 났고, 민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고했어.”
아무 말 없는 두 사람 앞에서 물건들을 빠르게 챙기고 강의실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갔다.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재희가 그를 불러세웠다.
“민구 선배..!”
엘리베이터 바로 옆의 벽에 몸을 기댄 채 민구는 재희를 바라봤다. 어색해서 바로 도망나왔는데 왜 붙잡는거야. 재희에게 티는 안났지만 민구는 뇌속에서 어쩔줄 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왜 붙잡았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지금 재희 얼굴 보기가 너무 거북했다.
“그.. 민희 선배랑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별 대화 없었어.”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안와? 고개를 들어 층수를 보니, 엘리베이터는 7층에 머물러있었다. 민구는 현재 4층에 있다. 그냥 계단타고 뛰어내려갈 걸 그랬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민구의 눈치를 살피며 서 있던 재희에게 민구는 몇 가지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민희한테 미련 없어.”
“네?”
“민희 남자친구라며, 나 미련 있는 거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아..아니에요! 민희 선배랑 아직 사귀는 건..”
뭐야, 그럼 병규가 그냥 던진 말이었나?
“…그래?.”
띵- 엘리베이터 문이 타이밍 좋게 열렸고, 민구는 고개를 한번 까딱 움직이고 나서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그리고 빠르게 닫음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밥맛도 없어서 민구는 저녁을 그냥 굶고, ‘큐티’로 바로 갔다. 봄은 오늘은 없는 날인지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일찍 가야 했는지, 5시가 안된 시간인데도, 가게안은 비를 내리는 하늘보다 어두웠다. 쓰고 왔던 우산에 맺힌 물기를 다 털어내고 열쇠로 가게문을 열어 들어갔다.
가게에 가만히 앉아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비 내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더니, 사람들도 점차 사라졌다. 멍하니 가게 벽면에 달린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가게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저기.”

3
이번 화 신고 2021-01-13 17:41 | 조회 : 757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