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패턴의 손수건

뭐야, 그 싹수없는 놈은.”
재훈은 민구가 겪은 일을 듣자마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험악한 얼굴보다 더 험악한 말로 욕을 했다.

민구는 그래도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 조사한 게 있었구나. 다시 수정해봐야겠다.
하지만 이후로도 병규는 민구가 하는 말마다 태클을 걸었다. 민구는 약간 기가 죽었다. 열심히 한다고 해왔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나? 그래도 다행인 건 병규가 태클을 걸 때마다 재희가 그를 감싸주었다.
재희는 민구의 의견을 수렴해주면서도 그 의견에 살을 붙여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조장을 정하진 않았지만 재희가 조장처럼 두 사람을 이끌었다. 재희는 재훈에게 들었던 대로 정말 똑똑했다. 민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섬세함을 잡아서 조사해야 할 것을 추가했다. 재희가 없었다면 민구는 꽤 힘들었을 것이다.

“그 새끼, 뭐야 존나 재수 없네. 너한테 왜 그래?”
“글쎄다….”
“아오, 갑자기 혈압 오르네. 넌 그냥 그걸 듣고 있었냐?”
“그 상황에서 내가 화내면 조별 과제 분위기 완전 파탄 나잖아.. 그래도 재희가 도와줘서 나름 평온하게 끝났어.”
“그게 평온한 거냐? 미친.”
민구가 물이라면 재훈은 불이었다. 늘 재훈은 억울한 일에 대해서 들으면 자기가 더 화나서 바락바락 화를 냈다. 그래서 민구는 웬만하면 재훈에게 이런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 저러다 제 친구가 화병이라도 걸릴까 봐..

“진,진정해..”
지금 당장 하고 있던 과제도 내버려두고 병규를 찾아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것 같은 재훈을 말렸다.
억울하다가도 이렇게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이를 보면 화가 풀렸다. 겨우 진정한 재훈의 등을 토닥여 주며 민구는 다시 힘을 냈다.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친구도 나한테 더는 뭐라 하진 않겠지.
“얼른 과제 하자. 오늘은 잠은 자야지.”
“아. 맞다. 그래야지..”
두 사람은 12시가 넘어서야 학교를 나갈 수 있었다.

알바할 땐 과제할 것을 들고 가지 않았다. 일하는 중이니 다른 거에 신경 쓰는 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할 거 많지 않아?”
오늘은 민국의 가게에 가지 않은 봄이 건너편에서 다크써클이 가게 바닥에 내려앉을 것 같은 얼굴의 민구에게 말했다.
“네..?”
민구은 멍한 표정으로 오늘 들어온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평소라면 깔끔하게 셔츠를 입고 올 민구는 오늘은 처음으로 운동복 차림이었다. 제대 이후 꽤 길은 머리도 깔끔히 정돈해서 왔던 그지만 오늘은 모자도 아래로 푹 눌러쓰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중간고사 기간에 찌든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다크써클 엄청나게 심한데, 잠은 자고 다니는 거야?”
“아. 괜찮아요…”
“과제 좀 가게에 들고 와서 하지.”
“네..? 아..근데, 일하는 중인데….”
“내가 그렇게 융통성 없을까 봐? 할 일 없을 떈 너 해야 되는 거 해도 돼.”
“감사합니다..”
“조금 있어 봐, 차 한잔 타줄게. 너무 피곤하면 조금 쉬었다가 해.”
“네..”
봄은 읽던 책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민구는 장미를 내려놓은 채 눈을 살짝 감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하루에 길면 4시간 짧으면 아예 못 자고 강의 끝나고 남는 공강 시간에 잠깐 눈을 붙이는 게 다였다. 지금 당장 가게 바닥에 머리를 대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하면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올래?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만.”
티백이 담긴 머그잔 두 잔을 가지고 와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봄이 말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다시 손질하던 장미를 든 민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피곤함에 찌든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졌다.
“큼..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흠..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 대학생~”

다음날 주말에 민구는 노트북을 들고 가게에 출근을 했다. 봄은 민국네 가게일을 도우러 간 것인지 가게 문은 어제와 달리 잠겨있었다. 열쇠를 열고 들어간 민구는 기지개를 한번 위로 쭉 피고 나서 앞치마를 맸다. 오늘 해야 하는 거 얼른 끝내고 앉아서 10분만 잘까, 찌뿌드드한 어깨를 한 두 번 정도 돌려주고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아르바이트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 즘 봄이 검은색 종이봉투를 들고 가게 문을 열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응~ 그렇게 됐네. 자 오늘 보너스다.”
그렇게 말하곤 민구에게 검은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어..이게 뭐에요?”
종이봉투를 열어보니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상자가 들어있다. 게다가 상자 뚜껑 위에는 브랜드 로고가 금박처리 되어있다. 딱 봐도 굉장히 고가 브랜드의 물건 같아서 민구는 입이 떡 벌어졌다.
“초콜릿! 오늘 선물 받았는데, 너 주려고.”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음..몰라?”
“저 주셔도 괜찮아요?”
“난 어차피 단 거 안 먹어서, 너 먹어라~”
“감사합니다..”
“오늘은 노트북 들고왔네?”
봄은 입고 입던 셔츠를 벗어서 의자에 살짝 걸쳐두었다. 셔츠를 벗으니 속에 입고 있던 흰 티셔츠가 드러났다. 목에는 검은색의 얇은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봄의 끝물에서 여름이 된 날씨에 봄이 입는 옷들은 꽤 더워 보였다.
“할 거 많아?”
“앗, 네.. 빨리하고 다른 거 해야 하는데….”
“뭐가 잘 안돼?”
“아. 프로그램을 잘 못 다뤄서.. 지금 어디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인터넷에 찾아봐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 어디 봐봐.”
봄은 민구의 뒤로 와서 그의 노트북 스크린을 유심히 보더니,
“잠깐만.”
무선 마우스를 손에 쥐고 몇 번 클릭했다. 그러니, 막힌 하수구 구멍을 뚫듯이 민구가 고민하던 것을 몇 번의 클릭으로 해결했다.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이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민구는 감탄했다.
“어! 이렇게 해야 돼요?”
“응. 가끔 안되는 부분 두 번 클릭해서 새 컴포지션 뜨면 거기서 작업하면 될 때도 있어. 그리고 계속 렉걸리면 디스크 캐시 정리 좀 하고. 렉 너무 많이 걸리면 프로그램 자기 멋대로 꺼지더라. 저장 자주 하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 프로그램 잘 아시네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지갑을 찾으러 갔을 때 봄이 민구의 과 교수님하고 대화하는 것을 봤다. 사장님이 혹시 우리 과 졸업생이었나?
“대학생 때 배웠던 거니까.”
“사장님 우리 과 졸업생이에요? 지난번에 교수님하고 아는 사이 같던데..”
“졸업생은 아니고, 자퇴생이야~”
또 실수발언이었을까? 민구는 자퇴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짝 굳었다. 봄은 살짝 당황해하는 민구를 바로 알아보고서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대학생 때 완전 날아다녔었지~ 근데 휴, 우리 학교가 날 담을 그릇이 못되더라고 그래서 자퇴했어! 보통 유명한 사람들 봐라. 다 자퇴하잖아!”
봄은 민구의 왼쪽 뺨을 쥐고서 찰흙처럼 주무르며 웃었다.
“그래요..?”
“응!”
민구는 하도 주물럭거려서 이제는 익숙해진 봄의 손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디자인 쪽으로는 안 가셨네요?”
“음.. 뭐, 그렇게 됐네~! 자, 이제 사장은 집에 간다. 너도 곧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쉬어”
봄은 민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 뒤 가게 문을 열고 나겠다. 민구는 멍하니 봄이 나간 유리문을 쳐다봤다.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잘 없다. 그건 민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은 정말 소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엔 결국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후회가 남지 않는 쪽은 최선을 다한 쪽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구에게 봄이가 그랬다. 첫 만남이 요란하고 이상하고 과거엔 어땠을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민구에겐 적어도 좋은 사람이었다.

“야, 뭐해?”
재훈과 민구는 교양 시험을 끝마치고 대학로를 거닐며 손톱만 한 여유를 조금 즐겼다. 그러다, 민구는 아기자기한 것을 파는 소품 가게에 눈이 갔다. 가게 밖에도 몇 가지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민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봄이 좋아할 만한 패턴의 손수건이었다. 민구가 그 손수건이 있는 쪽에 가서 구경하고 있을 때 재훈이 그 뒤쪽에 섰다.
“뭐야, 손수건?”
“이거 귀엽지 않아?”
민구는 사장님과 닮았다 생각하는 여우 캐릭터 패턴이 있는 손수건을 손짓했다.
“귀..엽긴 한데, 너 설마. 그 사장 주려고?”
“응.”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너 그 사장 좋아하는 거 아니지?”
“뭐? 아냐, 그런 쪽으로 그런 건 아니고…. 비싼 거 받은 게 있어서.”
재훈은 민구가 걱정되었다. 그 구제불능쓰레기적인 면모를 눈앞에 봤던 재훈은 봄이 민구가 일하는 가게 사장이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두라고 말하기엔 알 바 시급도 셌고, 이후로 민구에게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자면 어? 할정도로 너무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찜찜한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재훈은 봄을 믿지 않았다.
재훈이 보기에 민구는 순진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없는 민구는 조금이라도 그에게 잘해주면 그는 그것에 감격하고 배로 갚아주려고 했다. 끝이 어떻든 간에 말이다. 둘이 얼굴을 트게 된 것은 최민희의 소개였다. 하지만 만난 지 얼마 돼지도 않았을 때도 민구는 재훈이 조금 친절하게 대하니, 금방 마음을 열고 잘해주었다. 그래서 재훈은 걱정이 되었다. 최민희랑 헤어지고 나서 좀 괜찮아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이상한 사람이랑 엮인 게 아닌지 몰라.
“너, 그 사장 좋아하지 마. 남자를 만나더라도 다른 사람 좋아해.”
재훈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참…”
민구는 조금 더 고민하다 결심하고서 그 손수건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이 여기 오면 진짜 좋아하시겠네, 아. 이미 와보셨으려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다양한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큐티’ 안에 두어도 괜찮을 만한 물건도 몇 가지 보았다.
“저기….”
“어머! 깜짝이야!”
계산대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던 젊은 여자 직원은 민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저런 반응이 이미 익숙한 민구는 매고 있던 가방에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네..네?”
“이거 계산하려고요. 얼마인가요?”
“아..그. 6,000원이요.”
“여기요. 수고하세요.”
민구는 직원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 나서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민구는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모르고 작게 흥얼거리며 가게에서 나왔다.
“가자!”
“진짜 너 무섭게 생겼다고 피하는 사람 제일 이해 안 된다. 이렇게 소녀 감성 뺨치는 군필 대학생이 어딨냐고.”

알바를 가기 전 민구는 자취방에서 손수건을 손수 포장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포장을 하고 방에 있던 종이봉투에 상자를 넣고 나니 살짝 걱정되었다. 너, 너무 오바한건가? 아니야. 이 정도는 평범하지…. 않나. 선물상자가 담긴 종이봉투를 뚫어지라 보다가, 일단 매고 다니는 백 팩에 종이봉투를 넣었다. 출근 준비를 얼른 끝내고 나가기 전 민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구두 상자를 보았다. 아 맞다, 저거 버려야 하는데. 잠깐, 고민하다 민구는 어제처럼 나중에 버리지 뭐, 하고 생각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익숙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늘 그렇듯 민국의 가게에 가지 않는 날, 봄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민구를 반겨주었다.

“왔어~?”
“안녕하세요.”
민구는 요주의 물건이 들어있는 자신의 가방을 구석 쪽에 내려놓고 앞치마를 입으며 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봄은 오늘도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흰 티를 입고 와 손수건을 목에 매고 있었다. 여름에 자주 입는 봄의 알바착장이다.

“사장님,”
“어, 왜?”
봄은 읽던 책에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여름인데 맨날 목에 손수건 두르고 있으면 안 더우세요?”
봄은 고개를 살짝 돌려 민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원래 패션을 잘 아는 사람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거란다. 그리고 패션의 완성은 액세서리지.”
패션을 잘 모르는 민구였지만 저 손수건이 패션피플들이 매고 다닐 것 같진 않았다. 패션으로 찬거라기엔 손수건의 패턴에 있는 고양이의 얼굴들이 너무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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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2 17:24 | 조회 : 796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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