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넌?

봄의 옆에 있는 사람은 키가 컸다. 나란히 섰을 때 봄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을 정도의 키였다. 낯선 남자는 봄에게 친근하게 웃으며 무언가 이야기했고, 봄은 피식 웃으며 그 남자의 얘기를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봄과 일하면서 한 번도 그의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게에 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민구는 무의식적으로 봄이 자신처럼 인간관계가 좁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훈이 들려주었던 김봄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와 전혀 달랐고,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민구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서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사람은 민구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민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민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알바생은 몰라도 돼~’
봄이 가게를 나가기 전 민구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금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그냥 알바생이니까 친절하게 대한 것일까. 그는 괜스레 씁쓸함을 느꼈다.

꽤 어색한 기분을 안고 봄은 다음날 ‘큐티’에 도착했다. 문을 열기 전 그는 작게 심호흡했다. 처음에 이곳에 찾아온 날처럼 긴장되었다. 양손을 살짝 쥐었다 폈다 반복한 뒤에 가게 유리문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어서와~”
봄은 민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평소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봄의 옆에는 어젯밤 보았던 낯선 남자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뒷모습만 봤기에 잘 몰랐는데, 이 남자도 봄에 비해선 아니었지만, 꽤 준수했다. 검은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고, 왁스로 포마드 스타일을 연출했다. 웃지 않아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여유로움 덕분에 풋풋함보다는 성숙함이 돋보이는 봄보다 연상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민구는 봄에게 평소처럼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고, 그 남자에게도 살짝 고개를 움직였다.
“아~ 얘가 이번에 새로 뽑은 알바생이구나?”
“응. 귀엽지.”
“그렇네.”
그 남자는 민구를 살짝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장님, 이분은 누구세요?”
“지인이야.”
“에이, 지인이라니,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이상한 소리하지 마.”
그 남자는 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봄은 그런 남자를 흘겨보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의 귀여운 다툼을 보고 있는 외부 사람처럼 두 사람과 자신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았다.
“사장님, 오늘은 외출 안 하세요?”
“오늘은 쉬는 날이야.”
질문은 봄에게 갔지만, 대답은 그 남자에게서 돌아왔다. 민구는 지금 이 상황이 처음이었지만 묘하게 익숙하게 느꼈다. 아, 그래. 예전에 사장님을 찾아왔던 그 남자들이랑 비슷하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와 진상들이 다른 점은 진상들은 대놓고 민구를 경계했다면, 이 남자는 은근슬쩍 봄과 민구를 떼어놨다는 것이다. 민구는 의문이 들었다. 단순한 알바생을 이 정도로 경계할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이야? 꼭 사장님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한 것처럼….
민구는 하루종일 드라마에 나오는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1처럼 있었다. 평소 조용한 사장님은 오늘은 꽤 말이 많았다. 이따금 둘은 조심스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신경 안 쓰려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안 보는 척, 하면서 그 남자는 민구의 모든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민구가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 남자의 시선이 너무나 잘 느껴졌다.
“일은 잘하네.”
남자의 말투는 엄 짓 사장이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검증하는 듯했다. 문장은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말투에서 은근히 비아냥이 느껴졌다. 결국 민구의 얼굴이 살짝 굳자, 봄이는 그 남자의 등을 내리쳤다.
“아! 정말, 형이 궁금하다고 해서 데려왔더니, 애한테 왜 심술을 부리고 그래. 자꾸!”
“질투 나잖아! 너! 형이랑 보낸 세월이 더 길면서 저 알바생한테는 밥도 같이 먹자 그랬다고 하고! 나랑은 절대 밥 같이 안 먹어 줬잖아. 흑흑. 가게에 일하러 오면 맨날 자기 알바생 자랑하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민구는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 살짝 거북했던 것이 싹 날아가 버렸다. 사장님이 정말 저 사람한테 내 칭찬을 한 걸까?
“형이랑 쟤랑 같아?”
민구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남자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금방 얼굴을 풀며, 민구에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조금 심술이 나서. 하하”
“괜,괜찮아요.”
“봄이가 원체 사람을 옆에 잘 안 두고 안 만나는데, 민구씨 얘기는 자주 하더라고요.”
“사장님이요..?”
“네, 귀여운 알바생 들어왔는데, 나한테 얼마나 자랑을..”
봄은 앞치마 주머니에 있던 집게로 그 남자의 입술을 집어버렸다.
“미안하다. 역시 데려오지 말걸 그랬네.”
“음음!”
“조용히 해. 다시 제대로 소개해야 오해가 없겠다. 이 사람은 여기서 멀지 않은 지하 게이바 사장이야. 이름은.. 권민국이야. 매주 금토 내가 일 도와주고 있어. 쪼끔 신세를 진 게 있어서.”
“아…. 그러셨구나.”
“이제 나가. 아저씨는 가게 확인하러나 가쇼.”
봄은 입술이 집게에 물린 민국을 가게 밖으로 쫓아냈다. 쫓겨나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조금 부산스러웠던 가게는 금방 조용해졌다.
“어제 궁금하던 거 이제 풀렸지?”
“어..네.”
“음..어제 네 친구가 내 얘기했지?”
민구는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지? 욕이라 할 정도의 이야기밖에 없어서 그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봄은 피식 웃었다.
“친구 얼굴 처음 봤을 땐 기억이 안 났는데. 음. 지금 일하던 게이바에서 봤던 거 같은데, 맞아? 그 친구가 나 게이바에서 봤다고 그랬지?”
“맞을 거에요.”
“아~ 역시. 친구가 나보고 뭐라 그러디? 음.. 뭐라고 불렸더라. 구제불능 쓰레기였나?”
“…”
민구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민구를 보고 봄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죄,죄송해요.”
“에이, 아냐. 네 친구 말이 맞아.”
“예?”
“네가 보기엔 어때?”
“사장님 어떤지요…?”
“응.”
봄은 테이블 위에 오른손으로 제 뺨을 괸 채 민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다.
“사장님은.. 좋은 사장님이죠.”
“에이. 나한테 사회생활하려 하지 말고~”
“진심인데….”
“친구한테 내 얘기 들었을 때 좀 깨지 않았어?”
“…조금은 놀랐죠. 근데,”
“근데?”
“음.. 조금 놀란 게 다였어요. 그냥 음…. 그랬구나 한 거죠.”
“후후. 그래?”
봄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고는 팔짱을 끼고서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나쁘게 생각 안 해요. 진짜!”
“그래그래~”

24살 흑역사 때 봄은 게이바에서 거의 살림을 차린 것처럼 살았다. 그 시절의 그는 정말 구제불능 쓰레기였다.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람 가리지 않고 밤을 보냈다. 상대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상관없었다. 아래위 구분도 없이 그렇게 어울렸다. 상대가 위라면 그는 아래로 깔렸고, 상대가 아래였다면 그가 상대를 깔았다. 게다가 연인이 있던 사람과도 어울렸다. 파트너가 있는 사람과도. 아마, 봄의 기억이 맞는다면 재훈은 파트너를 뺏겼던 사람 중 한 명이던 것 같다.
창피한 과거를 들켜버렸네. 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순진한 청년을 바라봤다.
“그..죄송해요. 멋대로 생각해서….”
민구는 누구보다 성숙한 얼굴이었지만 순수한 소년 같은 면이 있다. 지금도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잘못은 봄이 다했던 건데, 계속 사과를 하고 있다. 봄은 소년 같은 민구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 그를 길바닥에 보았을 때도 그랬다. 그는 처음에도 이랬다.

“아냐. 내가 욕먹을 짓을 많이 하고 다니긴 했어. 그 친구 말고도 나한테 앙심품은 사람들 많을걸? 너도 알잖아. 가게에 왜 그렇게 남자 진상 손님이 많겠니?”
“…그건..”
“그러니까, 그만 사과해도 돼. 진짜 괜찮아~”
평소처럼 방정맞은 웃음을 머금은 채 봄은 민구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게이바 사장 민국은 이후로 이따금 얼굴을 비치러 왔다.
민국은 늘 가게 유리문을 대차게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민국은 봄과는 다른 방향으로 매우 밝은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꽤 요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요란함은 조용한 가게에 생기를 주었다.
“안녕~ 민구씨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왜 또 온 거야.”
가게 의자에 앉아 읽던 책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병규는 봄 건너편에 앉아서 그가 내어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한테만 차가워! 나한테만! 너 너무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봐봐, 민구씨. 쟤가 저렇다니까. 그러니 내가 민구씨 얘기를 들었을 때, 난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잖아.”
민국은 민구의 의자 뒤로 찰싹 달라붙으며 치근덕거렸다.
“당연하지. 민구는 우리 소중한 알바생이니까. 걔한테 달라붙지 마. 변태 아저씨야!”
“하하…민국 사장님. 차 한잔 하실래요?”
“어머, 좋아 좋아.”

따뜻한 봄은 금방 지났다. 가게 앞바닥까지 굴러온 벚꽃잎들이 점점 사라질 즘,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 학기 중간이 되니, 점점 할 일이 많아졌다. 중간과제로 나온 것들은 하나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고, 교양까지 있으니 민구는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싶었다.
게 중에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별과제였다. 영상수업 조별과제는 재훈의 예상대로 무작위로 조가 되었다. 민구는 재훈이 같은 조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건조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손을 꾹 눌렀다. 따뜻한 손이 욱신거리는 눈을 누르니,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민구는 재훈과 과실에 남아 과제를 하고 있다. 요즘 그들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있었기에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가면 침대에 눕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해 그들은 약속했다. 과실에 둘이서 과제를 하기로, 그리고 잠 온다 하면은 서로 깨워주기로 말이다.
아픈 눈을 잠시 감은 채 목을 한번 빙빙 돌려준 뒤 민구는 눈을 떴다. 임시방편이었지만 이렇게 한 번 움직여 줘야 다시 노트북 화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야, 좋겠다. 너네 조에 과대 있잖아. 걔 도재희.”
키보드를 두드리던 재훈은 입을 열었다.
“아..재희..그래, 재희가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민구는 뭉친 승모근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왜, 무슨 일 있었냐?”
“음…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어.”
“그, 재희랑 맨날 어울리는 그 친구, 걔 이름이..”
“조병규.”
“아, 그래 그 친구 나 싫어하는 것 같던데.”
“엥? 왜?”
“모..몰라.”

민구는 재훈을 만나기 전 점심 먹고 나서 조원들과 과실에서 만났다. 조원은 도재희, 조병규, 권민구 이렇게 세 명이었다. 과실에는 그들 말고도 다른 조의 학생들도 있다. 조금 소란스러운 과실에서 민구는 도망치고 싶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진짜! 어!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민구의 모든 말에 다 태클을 거는 병규 때문이었다. 민구는 조별 과제를 싫어했다. 하지만 민폐가 되는 것이 더 싫었다. 그래서 전날 조별과제 단체 카톡에서 회의하기로 약속이 결정된 뒤, 민구는 미리 주제에 대해 조사를 해갔다.
“프린트도 미리 해온 거야? 대단하다~ 진짜 열심히 해왔네. 고마워.”
재희는 민구가 프린트해온 자료를 쭉 훑어 보더니, 수고했다며 민구에게 말했다. 프린트를 나눠줄 때부터 표정이 그리 좋지 않던 병규는 프린트한 것을 강의실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부분씩 잘못 조사한 것들이 좀 있는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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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1 20:58 | 조회 : 81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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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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