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은 몰라도 돼.

“앞으로 저런 손님 오면 그냥 쫓아내.”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손님인데.”
“저런 손님 들어오면 골치 아프기만 하지. 진상 한 명 내쫓았다고 우리 가게 매상에 크게 문제없다.”
민구는 봄의 말에 납득했다.
다행히 단골 진상 이후로는 경찰을 부를 정도의 사건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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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가지로 빽빽하던 대학로 벚꽃 나무 가로숫길에 점점 봄기운이 물들었다. 밤낮으로 차갑던 바람도 따듯해질 즘, 민구는 재훈과 함께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민구는 이제 13일의 금요일이라는 타이틀이 희미해져 가는 금요일에 재훈과 나란히 앉아 전공 수업을 들었다.
시곗바늘이 수업 시작한 지 1시간을 조금 넘어갔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10분 정도 쉬는 시간을 쥐여주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야.”
“왜?”
“너 그 알바한다는 꽃집 말이야. 괜찮냐?”
재훈은 민구로부터 간간이 들려오는 봄의 소식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의외로 순진한 민구가 혹시나 무슨 짓은 당하고 있지 않을까, 사기라도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재훈은 민구를 보면 거의 물가에 애 내놓은 심정이었다.
“응. 괜찮아. 사장님 생각보다 괜찮은 분이신 거 같더라고.”
‘네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하는 놈들 중에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민구는 정말 봄이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알바를 한 지 한달이 딱 되자마자 알바비는 곧바로 그의 계좌에 들어왔다. 게다가 봄이 있는 날에 민구가 밥을 안 먹었다고 하면은 늘 밥을 사주곤 했다.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조용한 날이 더 많았다. 민구는 지금까지 한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평화로운 알바를 하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긴 하나, 사장님으로서는 최고였다.
“오늘도 가냐?”
“응. 오늘 이 수업 마치고 과제 좀 하다가 저녁 먹고 가야지.”
“야, 나도 가자.”
“어? 너 오늘 알바 없어?”
“그 알바 그만뒀다.”
“뭐? 왜?”
“자꾸 내 시간 아닌데도 불러대잖아. 그렇다고 추가 수당을 제대로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초반에는 챙겨줘서 갔는데, 계속 가주니까 그냥 막 부르더라.”
“헐, 완전 악덕 고용주였네.”
“에이씨, 알바 다시 찾아봐야 해.”
두 친구는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고 함께 ‘큐티’로 갔다.
“어. 문 닫혀 있는데?”
“열쇠 받았어.”
민구는 전에 봄에게 받았던 가게 열쇠를 검은색 백 팩의 작은 주머니 안에서 꺼냈다.

“열쇠요?”
“어. 요즘 바빠져서 내가 일찍 나가야 하는 날도 있거든? 그때 그냥 네가 열고 들어가라고.”
“앗, 네.”
전에 봄에게 받았던 여분의 가게 열쇠였다.
‘어디 일하러 가시는 건가…?’
민구는 봄이 매주 어디를 그렇게 가는지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너…. 너, 진심이야?”
“…조용히 해.”
민구는 알바를 할 때 늘 입던 옷 위에 예쁜 분홍색 앞치마를 입고 일을 했다.
“이거 네 거야?”
“아니.. 내 것은 아니고 사장님이 주셨어.”
재훈은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리는 민구의 모습에 빵 터져 한참이나 웃었다. 처음 앞치마를 받았을 때 민구도 경악했다. 분홍색의 앞치마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앞치마에 그려진 앙증맞은 토끼 캐릭터 패턴이었다. 자신보다 좀 더 큰 당근을 꽉 안고 있는 토끼들이 날뛰고 있는 이 앙증맞은 앞치마는 가게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민구와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이..이거밖에 없나요?”
“내가 널 위해 특별히 새로 장만한 거야. 어때 귀엽지?”
“귀, 귀엽긴 한데.”
“너랑 진짜 짱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샀다.”
봄은 친절하게도 민구에게 앞치마를 손수 매주었다. 허리에 리본도 묶어주면서 말이다.
“완벽해, 퍼펙트.”
민구는 뿌듯해 하는 봄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이 망측한 앞치마를 입고 일했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 다행이었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던 민구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장 취향 참…. 독특하긴 하다. 매니악하네. 야, 보다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놀리지 마라.”
한참을 둘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손님이 들어왔고 그 둘은 이제 서로 각자 할 일을 했다.
가게 밖이 살짝 어두워졌을 즘, 가게는 한가해졌다. 재훈은 가게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과제를 했고, 민구도 그 앞에서 오늘 들었던 전공 강의를 복습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 노트북 키보드 소리와 연필이 종이 위에 움직이는 소리만 작게 들려올 때, 재훈은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렸다.
“아오, 힘들어. 너 영상과제 했냐?”
“아직, 노트북 자취방에 두고 와서 알바 끝나고 가서 하려고.”
“그래? 야, 우리 영상수업 중간 기말 조별로 평가한다던데.”
“헐, 그래..?”
“아오, 조별 진짜 너무 싫은데.”
“조는 어떻게 짜려나..”
“아마, 복불복일걸? 아, 과대랑 조별과제 하는 애들은 좋겠다.”
“과대? 그.. 이름 뭐더라, 도재희였나.”
“그래! 걔! 걔 엄청 잘한다고 유명하던데. 걔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도 있잖아.”
“아 진짜? 신기하다.”
“넌, 진짜 주변에 관심이 없구나… 걔 주변에 맨날 사람 몰려서 시끄럽잖아.”
“그랬나..?”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어, 사장님?”
아직, 저녁 10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봄이 가게에 들어왔다. 보통 10시 딱 맞춰서 가게에 돌아오던 그가 일찍 들어오자 민구는 깜짝 놀랐다. 곧 민구는 더 깜짝 놀랐다.
“사장님…? 왜 머리가 젖었어요?”
평소 한쪽으로 가지런히 묶인 머리가 오늘은 비라도 쫄딱 맞은 거처럼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묶지 않은 젖은 머리가 그의 목과 뺨을 감싸고 있었고, 입고 있는 셔츠도 물기에 조금 젖어 쇄골 부분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디 가서 물 싸다구라도 맞은 모양새였다.
민구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가니 달큼한 칵테일 향이 코에 훅 스쳤다.
“아~ 오늘 술 세례를 받아버려서 찜찜해서 일찍 왔어.”
“예? 어쩌다가….”
“괜찮아. 괜찮아~ 가끔 있는 일이야.”
‘술 세례가 흔한 일이야..?’
놀란 것은 민구 뿐만이 아니었다. 재훈은 봄을 보자마자 테이블 의자에 벌떡 일어나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재훈이 갑자기 일어나니, 그가 앉고 있던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잠시 휘청이다 멈추었다.
“어? 저 사람은 네 친구야?”
“어, 네.”
“에고, 손님한테 못볼꼴 보여드려 버렸네. 바로 집으로 올라가서 씻을 걸 그랬다. 너 좀 놀라게 해주려고 여기로 온 건데.”
“사장님, 그.. 괜찮은 건가요?”
봄은 대답 대신에 민구에게 싱긋이 웃어주었고, 가게 문을 열고 나겠다.
“대체 밖에서 뭐 하고 다니시는 거길래… 넌, 왜 그러고 있어?”
재훈은 우뚝 선 채 그가 나간 문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 사장이야?”
“어..? 어..”
민구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재훈의 반응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있다가, 너 알바 끝나고 얘기해.”
“그래..”
재훈은 저녁 10시가 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인 건가..? 근데, 사장님은 모르는 눈치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거람..’
민구는 재훈과 단 둘이 있는 가게 안에서 그의 얼굴을 살피다보니 저녁 10시가 되었다. 재훈은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가고 민구는 가게 불을 다 끄고 문을 잠근 뒤에 가게 밖으로 나갔다.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알지. 잘 알지. 이쪽에서 예쁜 쓰레기로 유명했다.”

재훈은 게이다. 딱히 자신이 게이인 것을 숨기지 않는 재훈은 1학년때 대부분의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왜 그랬냐고 민구가 물었을 때 재훈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 번 이렇게 걸러내야 나중에 덜 피곤하더라.”

두 남자가 친해지고 동반입대를 하기 전 재훈은 새내기 시절을 즐겼다. 그래서 게이바에도 몇 번 가보기도 했는데, 그때 20살 재훈은 24살의 김봄을 처음 만났다. 그때의 김봄을 떠올리면 재훈은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재훈이 게이바를 갈 때마다 늘 봄이 있었고, 그 옆에는 후궁을 거느린 왕 마냥 많은 남자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단지 이쪽 세계의 남자들에게 인기만 많았더라면 재훈은 이렇게까지 봄을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24살의 봄은 정말 유명했다. 잘생기고 그것도 잘하는데, 한 사람만 만나지 않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노는 것도 굉장히 지저분하게 놀았기에 그와 어울리는 사람 중에는 질이 안 좋은 사람도 많았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라 욕했다. 재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재훈은 민구에게 24살의 봄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저 사람 질 나쁜 사람이야. 조심해. 웬만하면 어울리지 말고.”
봄에 대한 경고를 재훈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민구의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얘기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땐 놀랐다. 하지만 민구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재훈의 말대로라면 정말 봄은 나쁜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민구과 봐왔던 사장님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 매일 어디를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봄은 매일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책들도 다 하나같이 민구가 읽기엔 어려운 책들이었다. 개중엔 영어로 된 책도 있어서 속으로 감탄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준 적도 있었다. 처음 만난 날도 그랬고, 진상이 왔을 때도 그랬다.
‘정말 그런 사람인가?’
민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게에 찾아왔던 그 많은 남자를 보면..

다음날, 토요일에 민구는 ‘큐티’에 출근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봄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 민구를 가게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 오늘은 좀 일찍 왔네.”
“네.”
“오늘도 그럼 수고해줘~”
봄은 민구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서 그를 지나쳤다.
“저…”
“응?”
“사장님, 매주 어디 가시는 거에요?”
“…”
봄의 반응은 이상했다. 평소처럼 방정맞은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닌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얼굴에 감정이라는 것이 한 톨도 없는 그런 미묘한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봄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자, 민구는 뻘쭘해졌다. 그래서 시선을 돌린 채 그는 꽃다발에 들어갈 꽃들을 손질하기 위해 앞치마를 맸다.
“왜?”
봄은 가게 유리문 바로 앞에 있다가 민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거리감에 민구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뒤로 슬쩍 물러나 버렸다. 그러자 봄은 민구에게 거의 서로의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벽에 완전히 몰린 민구는 숨도 못 쉰 채 그와 눈을 마주했다. 민구의 뺨을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이 민구의 심장도 간지럽힌 걸까? 민구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짐을 느꼈다.
“왜 물어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었잖아.”
‘그..냥..궁금해서…’
민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도 깜빡이지 못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가면 같던 얼굴이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민구의 뺨을 두 손으로 꼬집더니 옆으로 죽 늘려며 말했다.
“알바생은 몰라도 돼~ 오, 생각보다 말랑한 것이 감촉이 괜찮은데? 야 너 몸은 딴딴하더니 뺨은 좀 말랑하니 괜찮다.”
“므..흐스느그으으”
“재밌구먼~”
봄은 민구의 뺨을 제멋대로 주무르다가 놔주고는 촐랑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수고!”
민구는 그가 나간 가게 유리문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뭐..뭐야…? 갑자기..”

민구는 그날의 아침처럼 봄이 사라지고 난 뒤 마음이 심란했다.
‘말실수였나…?’
결국, 저녁 10시가 될 때까지 민구의 머릿속에 물음표 오백 개만 가득 차버렸다. 봄은 바로 집으로 간 것인지 아직 오지 않은 건지, 10시가 넘어도 가게 앞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민구는 평소처럼 가게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가게에서 걸은 지 한 10분이 넘어갈 때쯤에, 민구는 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봄 옆에 처음 보는 다른 남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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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1-10 17:48 | 조회 : 85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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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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