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에리카(3)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였다. 인류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형에게 나는 열등감을 느낄래야 느낄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불쌍해보였다. 어린 나의 눈엔 친구 하나 없이 우두커니 구석에서 책을 읽는 형이 그렇게나 안타까워 보였다. 그러나 곧 인식은 바뀌었다. 죽어버린 명문가의 자제들- 그러니까 학생들 앞에서 피를 묻히고 당당하게 서 있는 형은, 그냥 답도 없이 미친놈이였다.

-아레우스의 일지, 3권-

_

“뭐, 됬겠죠. 네 발버둥같은 걸로 쉽게 무너질 탑이 아니니까요.”

셰이드는 입고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인형을 통해 다시 자신만의 세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내가 널 죽일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동생님.”
“동생,이라고 부르지마, 윽- 역겨우니까…”
“그럼 너는 날 왜 형이라 부르는거죠?”
“그거,야 그게 내 남은 마지막 정이거든-”

아레우스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고 웃었다. 검푸른 피가 입안을 메우고도 모자라 흘러내렸다. 마나코어가 박살난 영향이 몸에도 간 모양이였다.

어릴적에는 저 새카만 머리카락이 마치 백발인 나와 맞춰 태어난 형, 이라고 생각했다. 흑과 백만큼이나 깔끔하게 어울리는 색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짜증나…’

셰이드의 흑발이 가증스러웠고, 자신의 백발이 가증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염색해도 며칠만에 돌아오는 망할 백발은 [총책임자]라는 희생양을 위한 일종의 재물 직책이였다.

백발의 의미를 깨닫고 난 뒤, 처음에는 수긍했다. 그래도 제국에 도움이 되고 죽는 것이니 긍지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갈수록 가관이였다. 마치 나 자신이 아니라 [총책임자]로서 꾸며진 것 같았다. 차라리 돌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고, 결국 탈출을 감행하여 탑의 눈길을 빠져나왔다.

셰이드에게 쉽게 당해서 그렇지, 아레우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우선 [총책임자]라는 것으로 말 다했다.

[총책임자]가 되려면 적어도 탑주의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평범한 탑주들과 맞먹을 정도의 힘. 백발과 벽안. 푸른 피. 이 4가지가 충족되어야 했다.

사실상 외모와 피의 조건만 타고나도, 힘은 딸려오는 법. 정말이지 더러웠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

셰이드는 어이없다는 듯 미소만 띄웠다. 그의 표정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더 대화할 필요는 없겠죠. 이만 꺼져주세요. 나도 바쁜 몸이랍니다.”

상큼하게 쏘아붙인 셰이드는 회의실 문을 닫고 떠났다. 아레우스가 참고 있던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칠때, 셰이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켈을 향해 갔다.

‘쓸모없는 패는 버리는 겁니다, 동생님. 호구처럼 살다가는 다 죽어.’

셰이드는 픽 웃었다. 이제 자신의 인형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새하얀 정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있는 미켈이 눈에 들어왔다. 인형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던 고개가 올라갔다.

“…셰이드.”

소름끼칠 정도로 깊은 보랏빛의 눈에 순간적으로 아찔함이 느껴졌다. 다리를, 팔을 붙잡고 밑바닥까지 끌려내려갈 듯한 위압감이 감돌았다. 심해의 바닥같은 느낌이였다.

“아, 미켈- 클라우드군. 그런 눈으로 쏘아보지 말아요. 가슴이 아픈걸요? 당신을 여기에 앉혀준게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길.”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켈은 무시하기로 했다.

“당신은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입니까?”

셰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턱을 넘어, 구둣굽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친 셰이드가 눈웃음을 지었다.

“…….”

그는 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로 미켈의 목에 넥타이를 감았다. 그리곤 넥타이가 가볍게 앞으로 당겨졌다. 저절로 셰이드의 눈 앞까지 머리를 대령한 미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딴 장난질을 하려고-”
“이것봐요.”
“…하”
“클라우드군은 내게 이리도 쉽게 자신의 목을 내어주죠. 물론 그만큼 자신도 있다는 뜻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넥타이가 신경질적으로 새하얀 목을 당겼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피차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묘하게 짜증이 난 듯한 말투. 비릿하게 웃음을 지은 미켈이 입을 열었다.

“곧 무대에 나가야 할 사람에게 이래도 됩니까? 목에 자국이라도 생기면 책임질건가요?”
“물론, 놓아주겠습니다.”

셰이드는 재빨리 넥타이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자국이 생기면 회복포션을 퍼부으면 됬겠지만, 귀찮았다. 그는 평소처럼 생글 웃으며, 다시 문턱에 가 섰다.

그동안 미켈은 옅은 붉은끼가 맴도는 목을 한번 슥, 쓰다듬었다. 살짝 욱씬거렸지만 굳이 아프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럼 준비 잘해주시길, 우리의 주인님.”
“…말만 번지르르하군요. 제게 과분한 칭호입니다.”
“이래서 난 클라우드군이 좋아요. 말은 꽤나 아프게 하지만 주인 행세, 제대로 해줄거잖아요?”

X발, 이 미친 영감이 누굴 호구로 아나.

“그냥 말 없이 멀리 가줄래요.”
“예, 본부대로.”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셰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거의 완벽한 90도. 제 3자의 시점으로 본다면 정말 미켈이 갑으로 보였다. 그 속의 심리싸움이 반대라는 사실은 오직 탑주들만이 알터였다.

셰이드의 구두소리가 멀어지자 미켈은 겨우 숨을 내뱉었다. 저 기묘한 녀석과 말을 섞을 때마다 마치 뱀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였다. 능구렁이같은 얼굴로 내뱉는 말들이 하나하나 짜증을 솟게 만들었다.

“하.”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겠느냐만은.

미켈은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 정복 망토가 바닥에 끌렸다. 반짝이는 자태가 마치 별을 박아놓은 듯 했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 모든 별들은 보석이였다. 꽤나 비싼 돈을 퍼부은 모양이다. 게다가 마나가 담겨있었다.

분명 위압감을 더하기 위한 용도겠지.

질린 표정이였다.

돈지랄은 좋지만 굳이. 차라리 마법사로서의 격을 끌어올린 채 나타나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시간이 지나갈 동안 미켈은 혼자 중얼중얼 탑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시종들은 옷과 몸의 정돈이 흐트러진다며 질색했지만, 그는 담담했다.

“이제 슬슬 나가실 시간입니다, 미켈 클라우드님.”

무대 앞에 서야 할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미켈은 입고리를 틀어올렸다.

그는 바닥에 끌리는 망토를 잡아주겠다는 시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긴 복도를 걸어갔다. 대관 홀의 상층부에서 미켈의 모습이 드러나자, 홀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성스러운 백발과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 고고한 자태로 아래에 모인 자들을 훑어보던 미켈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의 주인이시여.”

셰이드가 재단을 향해 무릎을 꿇자, 그를 중심으로 선 나머지 네명의 탑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홀의 사람들도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했다.

“반갑습니다. 미켈 클라우드라고 합니다. 그대들을 보살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보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였다.

“서, 성스러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저 미켈은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아, 사실, 더러운 기분을 삼키기 위한 미소였다.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였다.

“우리 남쪽의 탑은 그대에게 앞으로의 세계의 미래를 바칠 것을 맹세하며,”

청량한 톤의 베키시가 먼저 선서했다. 세계의 미래라니, 꽤나 큰 것을 들고왔다.

“우리 동쪽의 탑은 그대에게 충실하고 정직한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며,”

예랑이 말을 이었다. 동방탑은 굉장히 충실한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림자의 배출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탑이였다. 참으로 그 다운 맹세.

“우리 서쪽의 탑은 그대에게 빛의 창을 내릴 것을 맹세하며,”

란테온이 말했다. 평소의 껄렁한 차림은 어디갔는지, 꽤나 엄숙한게 웃겼다.

그보다, 말에 뼈가 있었다. 빛의 창은 세상의 어둠을 꿰뚫는 서방탑의 전설 무기였다. 실제로 존재하진 않지만 하나의 전설처럼 남아있는데, 그는 창을 내리겠다고 했고, 그 뜻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창이 벌이 되느냐 보상이 되느냐.

미켈은 불쾌한 감정을 꾹 눌러참았다. 어떻게든 저 놈은 치워버려야지.

“우리 북쪽의 탑은 그대에게 한없는 영광과 부를 안겨드릴 것을 맹세하며,”

북방탑의 주인, 란느 드 레키시아. 과거 약소국이였던 레키시아의 왕녀로 태어난 그녀는 부를, 무엇보다도 영광을 중요시여겼다.

이 맹세는 그녀만의 암묵적 룰이겠지. 자리를 넘보지 않겠다는. 영리한 사람이였다. 강자에게는 굽히고 들어가는게 나았다. 망할 란테온 놈처럼 선전포고를 할게 아니라.

“우리 중앙의 탑은 그대에게 빛나는 자리를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긴 맹세를 마무리지은 셰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미켈은 그를 보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마 상대 역시 마찮가지였으리.

“나 미켈 클라우드는 오늘, 이시간 이후로 빛나는 탑의 귀속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매끄러운 접대용 미소를 지은 미켈이 셰이드를 향해 걸어갔다. 셰이드가 시종으로부터 건내받은 은빛의 컵과 검을 건낸 순간이였다.

(픽ㅡ)

순간적으로 마나파동이 일더니 허리깨가 불타는 듯한 고통으로 휩싸였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구멍이 뚤린 배에서는 울컥거리며 검푸른 피가 솟아올랐다.

“쿨럭- 큭”

무슨! 말도 안돼!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셰이드는 놀란 표정으로 피를 토해내며 무너지는 미켈을 지탱했다.

“침입자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밤을 밝히던 불은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셰이드가 뒤를 돌아 탑장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신호라도 되듯, 그들은 각자 흩어졌다.

셰이드가 크게 소리쳤다.

“모두 멈추십시오! 당장 문을 봉쇄하세요!”

란테온이 어두워져가는 실내에 불을 밝혔다. 붉은 마나가 천장에 흩뿌려졌다.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듯 퍼져나가는 마나가 쓸데없이 찬란했다.

베키시와 예랑은 마력파동을 일으킨 자들을 붙잡기 위해 깨진 창문 주변을 둘렀으며, 란느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에게서 방출되는 마력을 조사했다.

셰이드는 패닉에 빠진 미켈을 부축했다. 미켈의 표정이 창백했다. 깔린 카펫을 검푸른 피가 다이아몬드마냥 반짝이며 적셔가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속이 다 뒤집어지는 느낌이였다.

“제길ㅡ”

눈앞이 핑글 돌았다. 미켈은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축 늘어졌다. 최악의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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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0-03 16:57 | 조회 : 1,002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연재시작 3화만에 주인공이 쓰러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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