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에리카(2)

제일 처음 그 소년을 봤을 때 느낀건, 젊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다 포기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였다. 그가 가진 새하얀 머리카락만큼이나 하얀피부, 옅은 분홍빛을 띄는 볼은 마치 [인형]같았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인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떠올린 이 인형이란 생동감과 현실감이 없다는 소리다.

-예랑의 일지, 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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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금방 흘렀다. 그 시간이라고 해봤자 하루였지만, 대충 탑장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시간이 대부분이였으니까.

아침을 맞아 일어났을 때, 미켈은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발표를 한다고?”

하얀 천이 몇개나 걸쳐져 있는지, 겨울에 입어도 따뜻해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얼굴까지 반투명한 천으로 가린다니 이거야 원, 쪄죽어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전통]이니까요.”
“…….”

예- 그러시겠죠, 망할 전통. 니네가 내 심정을 알아? 어차피 나중에 죽을텐데, 그때까지라도 복지를 누리게 해주면 오죽 좋겠냐고.

뒷골목에서 살았을 때는 이런 걱정 없이 살았다. 배를 굶긴 했어도 다가올 죽음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고, 더럽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많은 사람들의 지켜보는 듯한 그 눈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그때가 자유로웠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들과 약조를 나누었고, 내 목숨과 남은 생을 바꾸었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호화롭게 살다가 제국을 위해 순직한다- 라니 이 얼마나 처절한 삶인가.

그래도 나는 다시 억누르기로 했다. 이미 이렇게 되버린 이상, 내게 다른 길은 없었다.

“하아…”

옷을 입고 나서 보니 확실히 더웠다. 겨울도 아니고 봄이다보니 날씨에 비해 엄청 껴입은 꼴이 되었다.

“미켈도 그렇게 입으니 멋지다! 평소에는 툭 쳐도 쓰러질 것 같아서 무서웠는데.”
“제..제가 그런 이미지였나요.”
“히히힛, 그런 미켈도 귀여웠어!”

뒤에서 초긍정적으로 웃고 있는 이 여자는, 남쪽 탑의 주인인 베키시 쟌이다. 솔직히 외모는 대충 12살쯤 되어보이는 꼬꼬마인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하더라.

베키시는 평소 연한 홍빛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묶고다니는데 이 모습 때문에 어린아이로 보이기 쉽상이였다. 외모만 그러면 모를까, 말투에 성격까지 단순하고 순진해서 정말 애같다. 아, 물론 욕은 아니다.

“근데 베키시는 회의하러 안가요? 오늘 탑장 전체 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거?”

베키시는 키득거리며 사탕을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일부러 불참했어.”
‘일, 일부러라니, 그거 가능한거에요…?’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삼키고, 반사적으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포커페이스같은 건 기본이지. 암암.

“미켈이 원한다면 지금 가서 참석할게.”
“어… 베키가 가고 싶으면 가는거죠. 거기에 대해 제가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키시는 왠 엉뚱한 답을 들었다는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하지만 미켈은 총책임자잖아?”
“그건 아직 아닌걸요.”
“하지만 그렇에 될거잖아. 거봐. 미래의 미켈은 총책임자가 될거고, 현재의 미켈과 미래의 미켈은 같은 인물인거지? 결론적으로 시간만 다를뿐 미켈은 미켈이야. 즉, 총책임자지.”

저건 또 무슨 논리래.

“그렇다고 칩시다…”

애초에 저 논리는 맞지 않다. 하지만 베키시가 타고난 괴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었다. 반박했다가는 하루 종일 저 꼬맹이한테 시달릴지도 몰랐다.

“히힛, 그렇지?”
“그렇다고 치자니까요.”
“그래!”

쾌활한 인사와 함께 베키시가 총총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홀로 앉은 미켈의 나풀거리는 하얀 정복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_

“이번 총책임자는 괜찮을 것 같죠?”
“확실히 그래. 능력도 좋고. 책임은 질 줄은 아는 모양이더군.”
“반쯤 마음대로 맺어버린 계약도 잘 지키고 있는걸 보아하면 성격도 전전 책임자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그럼 결정난 건가요.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왠일로 싸우지 않고 끝난 전체 회의였다. 중앙탑장은 이 현상이 꽤나 달가웠다. 안그래도 다들 개성이 강해서 통제가 힘들었었다.

“미켈…….”

잘컸으려나. 처음 데려왔을 때, 눈이 죽어 있었지. 그 눈에 이끌려서 데려온 거기도 했지만. 그 나이에 눈이 죽기는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노려보던 그 눈빛은 여전히 흥미로울 정도...

“하!”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 중앙탑장은 고의적으로 미켈을 예랑의 곁에 붙여두었다. 예랑은 정이 많은 편이였기에, 망가져가는 인형인 미켈을 조금이나마 살릴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였다.

전체적으로는 평이 좋은 모양인데. 한 번 보고 싶군.

중앙탑장은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차피 발표에서 보게 될테니까… 3시간이 남았군요. 슬슬 나도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그는 조끼 밖으로 흘러나온 남색 넥타이를 집어넣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다른 탑장들은 돌아간지 오래였다.

“아니… 아니죠.”

그가 회의실 문을 닫다말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을 다시 활짝 열어젖힌 중앙탑장은 흔들림없이 곧장 회의실 원탁으로 다가갔다. 그의 구둣발이 확 들어올려졌다.

쾅-!

발에 차인 원탁이 뒤로 넘어갔다. 그 아래에 숨어있던 작은 쥐새끼 한마리를 남겨두고 말이다.

“왠지 안보이나 싶었습니다, 아레우스. 모르고 넘어갈 뻔 했지 뭐예요?”
“아하하하… 들켰네.”

가는 미성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하기 힘들정도였다. 몸은 잿빛 망토으로 가리고 있었기에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중간에서 보이는 것은 미켈과 같은 백발 머리카락과 자안이였다.

“도망친 위선자. 세간에서는 그렇게 들리더군요. 본인의 감흥은 어떻습니까?”

아레우스는 쿡, 웃더니 말했다.

“그놈들이 마음데로 정의한 나를 덮어씌우려 들지 마시지. 형은 그럴 권리 없어.”

평소의 중앙탑장, 셰이드는 냉정을 잘 유지하는 편이였다. 모든 상황과 인물에 빠르게 적응하며, 항상 냉소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권리, 규칙, 가지고 있는 그의 능력 등을 모욕하는 것만은 달랐다. 그의 소유였다. 감히 그걸 건드리다니. 그는 위에 서 있어야 했다. 모든 일의 중심에, 주인공이, 영웅이자 신화가 되어야했다. 더러운 취미였다.

“개소리.”
“하핫”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귀찮은 놈. 동생따위 있어도 없어도 상관 없었는데. 눈 앞을 방해할 장애물로 자라났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상관없을’ 존재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였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아레우스에게 셰이드는 비웃음을 선사했다.

“정말 미안한데 형,”

전혀 미안해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그는 이어 말했다.

“사고 좀 칠게.”

셰이드는 의아한 표정이였다. 멍청한 표정으로 섰던 그의 얼굴에 빠르게 냉정함이 들어섰다.

“우선적으로 그 말이 불안해서 견디기 힘듭니다만.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요.”

이만큼이나 공들인 탑이 무너지면 안됬다. 아니, 애초에 공들여서 지었기 때문에 무너질 이유도 거의 없었다.

셰이드는 심드렁했다. 또한 짜증이 치솟았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글쎄.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해. 이걸로 형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지.”
“…….”

셰이드는 그런 시답잖을 놀이에 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아레우스의 왼손을 덥썩 잡았다.

“…!”
“오늘은 미안한데 방해하지 마세요. 그럴 수도 없겠지만.”

우드득, 듣기에도 기분 나쁜 소리가 퍼졌다.

셰이드는 아레우스의 마력 공급원이 그의 왼손 중심의 마나코어인 것을 알고 있었다. 마나코어는 마나의 원천이자 마법사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코어였다.

아레우스의 코어는 마법사로서는 최악인, 적나라하게 상대에게 보일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코어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완벽한 아군이거나, 가족이거나. 이번은 후자였다.

“으, 으읏, 악- 큿, 잠깐-!”

푸른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총책임자였다는 증거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백발과 자안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피의 색이였다.

아레우스는 부러진 뼈를 타고 올라오는 고통과 공포감에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뭘 기대했을까. 처음부터 그의 형은 이런 사람이였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ㅕ

“그래봤자, 큭, 형은 막을 수, 없어. 나 하나로 끝인 줄 알아?!”

게다가 이번에 나서는 것도 내가 아니고.

아픔에 찌푸린 인상 속에서는 약간의 여유로움이 느껴졌기에, 셰이드는 살짝 긴장했다. 물론 속으로는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속이려 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의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자 아레우스는 쾌재를 불렀다.

“형은 몰,락할거야-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거야. 그 어줍짢은 자존심 때문에 말이지, 흐.”

겨우 할말을 마무리지은 그가 힘겹게 숨을 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공기를 매웠다.

‘제길, 아파- 겁나 아파!’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였다. 아레우스가 뭔가를 꾸민다고 생각될때마다 셰이드는 그의 왼손을 엉망으로 으깼다. 그때마다 아레우스는 회복과 고통에 애를 먹어야했다.

자신이 멍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희망이였다. 이 짓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다음에 또 찾아오겠지. 그리고 이 인간은 으레 그래왔었다는 듯 또다시 손을 부러뜨리겠지.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항상 들었던 감정이였다. 그래서 더 아팠다.

어차피 아레우스가 나설 일은 없었다. 이번 [그녀]의 작전에서 그는 제외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화에 이끌려서는 일을 그르치기 일수였기 때문이였다. 그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별 이유 없었다. 형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웃겼다.

“하핫ㅡ”

도저히 웃지 않고 배길수가 없었다.

아레우스는 볼 수 있었다. 눈빛으로 ‘미쳤냐’라고 묻는 듯한 셰이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웃겼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듯이 웃고 싶었지만 고통에 저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도 말이지, 윽, 형..”
“…뭐죠?”

아레우스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형을 존경했었어ㅡ”

존경은 개뿔.

셰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 그리고 아레우스는 다시 웃었다.

두사람의 형제지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긴 강을 건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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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0-01 09:24 | 조회 : 1,106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셰이드랑 아레우스... 화해하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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