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첫사랑의 끝

그를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물이라도 뿌려줄 생각이었다. 모른 척, 기억 안나는 척 연기해온 것이 너무나도 괘씸했고 화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금방 당황스러움에 의해서 사라졌다.

중학교 때, 나는 윤겸을 그냥 나쁜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심각할 정도로 둔해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두 명이 있어도 모르는 심각한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던 그의 모든 것은 전부 달랐다. 그는 중학교때 제아와 있었던 일과 나를 다시 만났던 날, 그리고 영주와 했던 이야기까지 전부 이야기 했다.

"..."

그가 모른척 기억안나는 척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굴었 는데, 내 행동이 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혀 모르던 속 이야기가 있엇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랬구나.' 하고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사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둔해서 나를 차고 바보같이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제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현실이 막장인 경우도 많잖아.'

순간, 윤겸을 다시 만났던 날에 영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얘기 안했어?"

"...."

"중학교때 일. 왜 말 안했어?"

'나 때문에, 나를 걱정해서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너한테 피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게 무슨....."

지나간 일에 대해서 이렇게 열띠게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까? 끓어오르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지금와서 내가 '왜 그랬냐.' 말을 해봤자, 지난 과거의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지난일은 지난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 정신으로는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내가 그에게 화가 난건지, 아니면 우리의 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서 슬픈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인데,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지금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미안해."

"변명같은 말은 안해?"

윤겸은 카페 내 계속 과거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서사를 쭉 읊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일말의 자기변명도 없었다. 그리고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차분해보였다.

그리고 계속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냥, 너무 미안해."

"지금 미안하다고 하지마."

"..."

"미안하다는 말 받아줄 수 없으니까."

윤겸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아래로 향했다. 마치 그날과 같았다.
처음으로 서로에게 말로 상처를 주었던 날, 그때도 그는 이렇게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윤겸은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 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질거야?"

"응."

"꺼지라고 하면 꺼질꺼야?"

"응."

"...."

그는 마치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간에 다 받아들일 것 같았다.

"...기다려."

"...응?"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나는 그 말을 뒤로 하고 급하게 도망치듯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윤겸은 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듯 했지만 나는 그 손을 무시하고 도망갔다.

그에게서 도망쳤다. 반복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싸우고 나서 그의 존재를 잊으려 했던 날과 똑같았다.




종강하고 나서 나는 본가로 내려갔다. 본가로 내려가서 알바를 두 개정도 찾아서 정신없이 일했다. 하고 싶었던 학원강사 알바는 평일과 주말에 걸쳐서 했고, 영화관 알바는 평일에 2일정도 나갔다. 일주일에 하루 한 번 쉬는 날이 있는 꼴이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집에만 오면 피곤해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복잡한 생각은 잠시 미뤄둘 수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현우에겐 거의 매일 문자가 왔다. 답을 자주 하진 못했지만 늘 연락이 왔다. 윤겸과 카페에서 이야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현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우도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 묻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걱정은 많이 되니까, 이렇게 연락이 매일 오는 것이겠지.

나는 오랜만에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현우는 전화를 받았다.

"오, 웬일로 너가 먼저 전화를 했냐? 어! 요즘 답장도 잘 안하더니."

"미안, 미안."

"알바 끝났어?"

"응."

"수고했어~ 알바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방학인데, 좀 놀지."

"요번에 돈 많이 벌어놔야지. 학교 다니면서 알바하는 건 힘드니까."

"그건 그래..학원알바는 좀 할만해? 나같으면 절대 못할 것 같은데.. 입시를 다시 하라니, 끔직하다 야."

"나름 재밌어."

"너가 애들이랑 잘 지내는 성격이라서 그런가보다."

"그러게."

오랜만에 현우와 전화해서 조금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못하고 본가로 내려갔으니까, 하지만 그 걱정은 쓸모없었다는 걸 금방 알수 있었다. 현우는 평소랑 똑같이 조잘조잘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말해줄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는 그의 배려에 답하기 위해선 나도 이제 털어놔야겠지.

"나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윤겸?"

"응..."

조잘 거리던 그의 발랄한 목소리는 곧 진지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 이야기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현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흥분해서 금방 화를 버럭버럭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진짜 화나네."

현우는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아. 짜증나. 그러니까, 걔는 그냥 지가 어!! 사과하기 어려우니까 질질 끌다가 여기까지 온거 아니냐. 진짜, 미안하면 빨리 사과를 하던가. 사람을 몇개월을 속여?!"

조용하던 그의 목소리는 그라데이션처럼 빨라지고 커졌다. 이게 바로 한국인의 그라데이션분노인가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내가 뜬금없이 웃자, 현우는 어이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냥 웃긴 생각이 떠올라서.."

"하... "

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하니까 머리가 좀 맑아진 거 같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응. 고마워."

"..별 걸 다 고마워하네. 당연한거야."

현우는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거야? 연락은.. 아직 안했지?"

"...안했어. 모르겠다. 그냥..."

"....어휴, 그냥 만나게 하지 말걸 그랬다."

"그게 더 나았을까.."

그를 계속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그의 존재 자체를 잊었을 지도 모른다. 기억하더라도 그냥 그때 그랬었지. 하고 추억팔이로 기억이 순화되서 넘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이렇게 머리 아픈 경험은 하지 않고...아픈 기억을 다시 건드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기회는 많이 있었으니까.

"...헤어질거야?"

"..."

"...아니다. 천천히 생각해봐. 너가 제일 행복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네."

"고마워."

"그래그래, 고마우면! 어! 요번주 쉬는 날 오랜만에 만나서 놀자. 영주형이랑 만나서 한 판 떠야 될 거 아냐. 그 요망한 아저씨."

윤겸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차서 영주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맞다. 응.. 그럼 요번주에 한 번 올라갈게."

"점심쯤 만나서 같이 밥먹고 좀 놀다가 영주형네 가게 가자. 그 사람 멱살 같이 잡아서 흔들자고!"

"하하. 좋아."

무거웠던 대화는 가볍게 웃으며 끝냈다. 전화를 끊고 현우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헤어질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상태로 몸을 뒤로 젖힌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앉아있던 책상의자에서 일어나 방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한 시간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 현우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점심을 먹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서 영주의 가게에 들렀다.

"어서오세요....아."

영주는 평소처럼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다, 나와 현우인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것 처럼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심히 굳은 것 같기도 했다.

"이 요망한 아저씨가!"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아직 없었다. 우리가 가게 연지 얼마되지 않아서 들어와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현우가 큰 목소리로 영주에게 소리치며 그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도 보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 알았구나."

"다 알아버렸구나? 야, 이 아저씨야! 너 때문이야! 쓸데없이 바람을 넣어서 재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만하고 일단 앉자."

"너도 멱살 잡아! 멱살 잡아도 솔직히 할 말 없다."

우리는 잠시 소란을 떨고 나서 앞에 앉았다. 영주는 가게의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를 우리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우리 자리로 와 앉으며 이야기했다.

"미안해, 재우야. 내가 쓸데 없이 오지랖 부렸어."

그리고 영주는 정수리를 보이도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솔직히 윤겸과 똑같이 모른 척 했던 영주가 괘씸하긴 했지만 화낼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현우는 답답하다듯이 자기 가슴께를 툭툭 두들겼다.

"한 마디라도 하지!"

"지금와서 화내서 뭐하냐."

"그래도...! 어휴.."

현우는 한숨을 크게 푹 내쉬고 영주가 내온 과일을 하나 집어서 씹었다.

"윤겸씨랑은 어떻게 됐어?"

"아무것도.."

나는 칵테일잔을 들어 홀짝였다.

"...헤어진 거야...?"

"...."

내가 아무말 안하고 있자 옆에 앉아있던 현우는 영주의 입을 찰싹 때렸다. 입다물라는 무언의 협박의 눈초리와 함께.

나는 조금 웃었다. 여기 오기로 마음 먹었을 때,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에요."

"..."

영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너무나 미안함이 가득해서 나는 마음을 그냥 풀었다. 화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으면 지금 내가 너무 힘들것 같기도 했고...

나는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고, 어색하던 분위기도 조금씩 풀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 손님도 몇명 들어왔다. 우리와 이야기하던 영주도 이제 다시 오너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현우와 나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들이켰다. 안주도 몇개 집어먹었지만 생각이 없어서 술만 들이켰다.

답답한 마음을 술로 푸는 걸 평소에 정말 싫어했던 나였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야, 안주도 좀 먹어. 칵테일이라고 방심하면 훅 간다."

"괜찮아~"

이미 머리가 좀 몽롱했다. 그리고 별 거 아닌걸로 실실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취하긴 취한 것 같았다.

"취했구만. 그러게, 천천히 마시라니까 계속 들이킬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안 취했어. 조금 알딸딸한거지."

"그래그래,"

그러면서 현우는 내게 안주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나는 그 안주를 순순히 받아먹었다.

현우는 내가 마시는 걸 말렸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평소라면 술 특유의 알코올 향을 싫어하니, 딱 한 잔만 들이켰을 것이다. 근데, 다운되는 기분과는 별게로 오늘따라 알코올 향이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달게 느껴졌던 거 같았다.

몸에 힘이 쫙 풀려서 온 세상이 흔들리고 있을 때, 현우는 거의 기절한 나를 데리고 가게밖으로 나갔다.

"너, 내일 학원알바 있는 거 아니야..?"

"응...?"

"이렇게 취하면 내일 일 어떻게 할려고 그래."

"괜찮아.. 내일,은..."

"내일은?"

"헐, 고양이...!"

나는 비틀 거리며 길 가에 있던 길고양이에게 달려갔다. 고양이는 사람이 갑자기 뛰어오니 날쎈 몸을 날리며 도망갔다. 비틀거리던 나는 힘이 풀려서 거의 길바닥에 주저 앉았고, 현우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나를 부축했다.

"어휴! 이 주정뱅이! 예전에 내가 이랬을 때 안버린게 정말 고마운거였구만..."

"어.. 고양이 어디갔냐아.."

"오늘은 우리집에 자. 내일 일찍 깨워줄게."

"으응..."

이후로 어떻게 현우의 집에 갔는지 기억이 안난다.

눈 떴을 때는 머리가 신기하게 개운했다. 전날에 잠들기 전까지 머리가 엄청 아파서 다음날 죽을 줄 알았는데.

"일어났어?"

"응..."

"너 오늘 몇시 수업이야?"

"저녁 타임부터.."

"다행이네. 천천히 가도 되겠다. 머리 안아프냐? 그렇게 취한 것도 처음본다."

머리가 아프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취할 정도로 정신을 못차린게 처음이라서 내 자신이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서 잘 견디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속은 전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다시 윤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연락을 안한지 거의 한달이 넘어갔다. 그에게 문자나 연락은 일절 오지 않았다.

'그렇게 지독하게 들이댈때는 언제고,'

정말 이대로 내가 연락을 안하면 관계는 끝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질거야?'

'응.'

정말 헤어지는 건가? 이렇게 끝나나? 이렇게 쉽게?

도망치고 있던 가정을 다시 떠올리니,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얼굴이 사색이 된 나를 현우는 깜짝 놀라서 내게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현우야. 나 어떡해."

"왜.. 왜. 뭔데, 그래?"

"나.. 진짜, 진짜 너무 화나고 용서가 안되는데..."

"응.."

"그래도, 윤겸이 보고 싶어."

"...."

"보고 싶은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짜증나..."

아침부터 아주 눈가가 빨갛고 팅팅 붓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현우는 언제나처럼 우는 나를 토닥여주었다.

보고싶다는 걸 인정하면 내가 너무 멍청한 거 같았다. 그래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엔 이정하게 됐지만...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토해내니, 살 것 같았다.

"다 울었어?"

"응..."

"자, 휴지."

꽝꽝 얼은 호수처럼 꽝꽝 막힌 코를 팽! 소리나게 풀었다.

"너 하나도 바보 안같아."

"응.."

"조금 바보 같긴 한데.. 아니, 뭐 내가 너보고 바보 같다고 할 처지는 아니니까."

"그렇긴 해."

"이 자식이! 큼.. 여튼,,, 너 그때 기억나지. 내가 그 망할놈이랑 헤어지고 너한테 추태 부렸던 거."

"기억난다.. 너 그때 술 완전 취해서 전화와선, 갑자기 차에 치였다고 하질 않나. 집 안들어갈 거라고 땡깡 부리질 않나."

"... 그래, 여튼! 나도 그랬던 적 있잖아. 나에 비해선 넌 진짜 엄청 훌륭하고 똑똑하고 장하지."

"....맞아. 내가 좀 그렇긴 해."

"..."

나는 바람 빠진 푸스스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울다가 웃는 내가 나도 어이가 없는데, 현우는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표정에 다 드러났다.

"이제, 좀 진짜 괜찮은가 보네."

"응. 이제 진짜 괜찮은 거 같아."

"휴. 그래그래. 깜빡이 좀 키고 울어라! 어휴, 깜짝 놀랐네."

나는 현우가 차려준 아침을 열심히 먹었다. 그러고 나서 몇분간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지만, 신호음이 끝날때까지 윤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는 건가..? 아, 아침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손이 차가워질 만큼 긴장하고 전화를 걸었건만, 전화를 안받으니 긴장이 확 풀렸다.
부재중 온거 보고 일어나면 다시 연락을 하겠지.. 싶어서 한 번 전화하고 말았다.

근데, 점심시간이 한 참 지나도 윤겸에게서 문자 한 통은 커녕 전화도 오지 않았다.

'아직도 안 일어난거야..? 오후 3시가 다 되가는데.'

나는 고민하다가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전화 안 받아?"

"어..."

"걔 원래 늦게까지 자냐?"

"이렇게까지 안받진 않는데..."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집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집까지 찾아가게?"

"응."

"음.. 그래?"

"응응, 나중에 보자!"

"그래."

급한 일도 없을 건데,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괜히 발을 동동 굴렸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기전에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몇 번 질렀다. 그리고 나서 겨우 초인종 버튼을 꾹, 눌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근데, 윤겸은 아니었다. 윤겸의 친구라고 한 두번 정도 얼굴을 봤던 최민아였다.

"어..?"

"어...?"

둘 다 서로를 볼 지는 예상 못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오랜만이네요."

"아...네. 저기.. 윤겸은.."

"아, 겸이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이요?"

병원이라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네."

"어디..어디 아픈 거래요?"

"...병원 같이 가요."

민아는 웃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문을 닫았다.

'왜..? 왜 어디가 아픈지 말을 안해주지?'

교통사고라도 당했나?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민아가 집에서 작은 종이 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같이 택시를 타고가는 내내 입술을 물어 뜯었다. 연한 피부 사이로 피가 조금식 새어나와 비릿한 맛이 느껴질때까지.

병원에 도착하니, 민아는 응급실로 들어갔다.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

윤겸은 응급실 병원 침상에 누운 채 링거를 맞으며 자고 있었다.

"하루 계속 연락이 안되서 집에 가보니까, 애가 또 뭘했는지 뭐 때문인지 또 아파서 쓰러져 있더라고요."

"...."

"그냥 몸살 난거래요."

"...네.."

큰 일로 다친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혀에 달린 가시가 따끔거렸다. 아픈게 나 때문이라 생각해서 조금 화가 난 것이겠지.

"이거는 윤겸 갈아입을 옷이에요. 아까 열나서 땀 뻘뻘 흘리길래 그대로 입고 가면 찝찝할 거 같아서 가져왔는데.. 일어나면 재우씨가 얘한테 주세요."

"아, 네...."

"....저기,"

"네?"

"그.. 둘이...."

민아는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평소처럼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에요. 나중에 겸이 일어나면 연락해달라고 해주세요."

"네,네..."

나는 저 사람을 만날때마다 '네'만 반복하는 로봇이 된 것 같다. 그녀를 배웅하고 나서 나는 윤겸에게 돌아갔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누가봐도 며칠간 못잔 얼굴이었다. 살도 조금 빠진 것 같았다. 다크써클도 심하고 입술은 바짝 말라서 만지면 파스스 하고 사라질것 같았다.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 귀신이 친구하자하면 베스트프렌드가 될 상이었다.

'한 달 넘었으면 사람 하나 골로 갔겠네....'

그가 깨어날 때까지 거의 30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눈을 뜨고나서 나를 보더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 뭐야...?"

목도 많이 건조한 듯 목소리도 갈라졌다.

"아주 상태가 엉망이네, 약은 처방 받았어?"

"어..?어..."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서 그런지, 그도 나도 '우리'에 대해서 대화할 타이밍을 못잡았다. 그에게 갈아입을 옷을 건내주고 화장실에서 그가 다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같이 돌아갔다. 그의 집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윤겸은 내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비틀거리며 걸었다. 이게 조금 짜증이 나서 나는 오히려 그를 부축하고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마워..."

거부하는 그를 억지로 침대까지 고이 눕혀주고서 또 엉망진창이된 방을 치웠다.

"...."

그는 내말대로 고이 침대에 누운채 눈동자만 나를 졸졸 따라 다녔다.

"....어떻게 온거야..?"

"너 전화했는데, 안받더라. 그래서 집 왔더니.. 너 친구 만났어."

"아... 민아.."

"야, 너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무슨 애가 한 달만에 다이어트 한 사람도 아니고 살이 쪽 빠졌어."

"미안, 전화했구나..."

"그런건 미안해하지마. 그건 됐고, 너, 나 없으면 죽을거야? 왜 이렇게..."

쾡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그의 눈에는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됐다."

"고마워...걱정해줘서."

"...."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 한 달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나도."

"카페에서.. 너한테, 너가 원하는 대로 다하겠다고 다짐했는데."

"...."

"...마지막으로 한 번만..."

"...."

그는 일어나서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가 싫다고 하면 정말 어쩔 수 없다 생각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 애틋해서 눈을 깜빡일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붙잡고 싶어.."

"..."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을까?"

"....!"

마지막으로 그와 카페에서 대화했을 때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정말 깔끔하게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잠깐 잠깐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웠었다. 정말, 이대로 연락하지 않으면 그와 이번에야말로 끝이라고.

근데, 이렇게 붙잡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해서 더 충격이 컸다.

"...한 달 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

나는 어떤 답을 해야할 지 몰랐다. 무슨 말로 대답하면 좋을 지 몰라서 그냥 그를 끌어안았다.

"...!"

그는 깜짝 놀라며 내게서 떨어질려고 애썼다.

"보고싶었다면서 왜 밀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나..지금 너무 꼬질꼬질해서..."

'그래서 아까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걷고 부축하는 걸 피했던 건가?'

"상태가 너무 안좋은게..창피해서..."

"괜찮으니까, 밀어내지마. 밀어내면 헤어질꺼야."

"....응.."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가만히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그의 품에 안겼다. 내가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안고있자, 그도 두팔로 나를 꽉 안았다.

"미안해..."

"...바로 용서는 못해."

"응.."

"아직도 생각하면 너무 괘씸해서 정강이를 차버리고 싶으니까.."

"응..."

"환자니까, 오늘은 특별히 참아줄게."

"응..."

"...."

나는 한 번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는 몇 초 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정말 괘씸하고, 정말 밉고 짜증나고 그러는데..."

"..."

"진짜 미워할 수 없더라. 멍청이 같이."

"..."

"한 번만이야."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울듯말듯 얼굴을 구기다가 나를 꽉 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뭍었다.

"...붙잡아줘서..기뻤어."

반 정도 화해를 한 이날이 알바가 없는 날이었다면 더욱 더 좋았을 테지만, 나는 다시 본가로 내려가 학원에 가야했다. 아쉬운 마음을 꾹 참고서 그와 인사를 한 뒤 나는 그의 집을 떠났다.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방학동안 나는 멍청이처럼 잡아놓은 알바때문에 윤겸을 많이 보러갈 수 없었다.

대신, 본가로 내려온 윤겸이 거의 매일 나를 보러 왔다. 같이 만나서 점심을 먹고 저녁을 같이 먹고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쉬는 날 데이트할 때 마다 학원애들 중 한 명을 꼭 마주쳐서 살짝 부끄러운 상황일 때도 있었지만.

그와 거의 화해하고 나서 다시 만났을 땐 서로 조금 어색했었다. 하지만 어색함은 금방 풀렸고, 우리는 가끔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 그에 대한 찝찝했던 의문은 다 사라져서 더 그랬던 거 같다.
그와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나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조금 웃겼다. 진지한 자기 진로를 첫사랑이 좋아했던 쪽으로 가다니, 이걸 사랑꾼이라고 해야할지.. 집착이라고 해야할지.

"우리 재우! 수고했어~!"

"야, 안돼. 아직 학원 앞이야!"

일 끝나면 윤겸이 맨날 학원 앞에 서 있다. 맨날 주의를 줘도 참 자기 마음 숨기는 것에 재능이 없는지, 내 발끝이라도 보이면 좋다고 달려들었다. 예전엔 어떻게 아닌척 연기를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 였다.

"아, 미안.. 너무 반가워서."

그래도 이 멋대로 달려드는게 싫지는 않았다.

"괜찮아."

"오늘 힘든 건 없었어?"

"아.. 오늘 애들 시험쳤어. 그래서 나는 크게 힘든 건 없었는데, 애기들이 멘탈 많이 부서졌지."

"많이 털렸어?"

"어, 주임 선생님이 완전 탈탈 털어놔서 나는 그냥 조용히 있었어."

"입시했을 때 생각나네.. 나도 그렇게 탈탈 털렸는데."

"나도."

학원에서 점점 멀어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계속 서로의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윤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내일 쉬는 날이지?"

"응."

"우리 그럼 내일 영화보러 가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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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1-11 00:17 | 조회 : 1,07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드디어 끝입니니다~~~~~~~~~~~~~~~~~~~~~!~!~!!~~!~!!~!!~! 끝나고 나니 뭔가 속 시원하면서도 묘한 기분이네요. 막판에 삐걱거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끝나고 나니 후련하네요. 처음으로 써본 소설은 뭐랄까 굉장히 어려웠어요. 별 생각없이 썼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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