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첫사랑이 부서졌습니다.

나는 바로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가게 안에 있던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민아는 깜짝 놀라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영주가 그녀를 손으로 살짝 제지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우당탕 소란스럽게 들어가 숨을 골랐다. 100m 달리기라도 한 사람 마냥 심장이 쿵쾅쿵쾅 시끄럽게 머릿속을 울렸다.

''재우...? 진짜, 재우인가..? 잘 못 본건...아니겠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두손으로 붙잡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민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방금 들어온 사람이.. ''그 사람''이야..?"

"....맞을걸.."

"갑자기 화장실로 튀어서 개깜짝 놀랐네. 튀어도 조용히 튀어야지, 그렇게 우당탕당 대소동마냥..어휴. 계산하고 나왔어. 일단 너도 조용히 나와."

"알겠어..."

나는 입고 있던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살짝 넘겼던 앞머리도 마구잡이로 앞으로 내려서 눈이 거의 안보이도록 한 다음,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출구로 걸어갔다. 출입구 문을 당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뒤로 슥 돌아봤을 때, 재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열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게 바로 앞에 민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세상 좁다더니만..! 어떻게 이런식으로 만날 수 있지."

"그러게..."

"야,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그냥, 마음이 복잡하네...악...! 아까 근데 눈 마주쳤는데, 나 알아본거 아니겠지?
"

"흠... 딱히, 그렇진 않을꺼 같은데."

"그렇겠지...?!"

"아마도?"

재우를 다시 재회한 이날의 두근거리는 감각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못 본지 4년이 다되었는데도, 난 아직 중학교 2학년 시절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이 날밤 이후, 나는 몇번이나 가게의 문앞에 찾아갔다. 서성이길 반복하다 결국엔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음 먹고 딱, 다시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날은 하필, 또 재우가 오지 않은 날이었다.

"어, 지난번에 화장실로 도망간 손님?"

영주는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 지 고작 하루 몇번 말을 나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도망친 그날에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겨우 용기내서 가게 안으로 재우 찾으러 들어왔는데, 어떡해. 오늘은 재우 안오는 날인데."

"아..그래요? 어, 그..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들어오는 손님이 얘기해주더라구요. 요즘 맨날 문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있는데, 수상한 사람 아니냐고. 하하."

"앗..그랬군요.."

"재우, 주기적으로 오는 여기 단골 손님이거든요. 그래서 알고 지낸지 꽤 돼서 두분 이야기는 대충 다 들었어요."

"...제가 첫사랑 얘기했을 때 눈치 챘었네요."

"음..조금...? 설마, 했는데. 화장실에 그렇게 급하게 도망가시는거보고, 아. 했죠."

"창피하네요.."

나는 조금 민망해서 손으로 부채질 했다.

"그럴 수도 있죠."

머쓱하게 웃으며 지난 번에 주문했던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으로 봤던 재우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볼살이 있어서 찹쌀떡 같았던 얼굴을 갸름해졌고, 키도.. 예전보다 조금 컸고. 무엇보다 옛날엔 마냥 귀엽기만 했던 얼굴이 이제는 귀여우면서도 묘하게 섹시하면서도 몽환적인.. 잠시 떠올린 것 뿐인데, 심장은 내 것이 아닌지 자기 멋대로 쿵광거렸다.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영주는 금방 만든 싱그러운 라임 향기가 나는 칵테일 잔을 내게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재우랑 다시 만나볼려고요?"

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면 사례에 들렸을 것이다.

"한 번만, 다시, 얼굴 보고 싶어서...왔어요. 꼭 다시 만나볼려는 건 아니고.."

"아하. 그렇구나."

영주는 왜인지 기분 좋은듯 싱긋이 웃으며 말을 다시 이었다.

" 전화번호 있다면서요. 어제 한 번 연락해 봤어요?"

"아니요..아직."

"왜요?"

"용기가 안나서요.."

"재우 여기서 인기 엄청 많아요. 후회하지 말고 한 번만 연락해봐요. 그렇게 고민만 주구장창하다가 놓치겠네!"

나는 갑자기 흥분해서 거의 랩하듯이 말을 우다다 내뱉은 영주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영주는 아차, 싶었는지 큼큼 목을 다시 가다듬었다.

"갑자기 너무 흥분했네, 당황했죠?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근데...혹시 재우가 제 얘기 어떻게 했어요?"

"음..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였죠."

''역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진짜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더 여기에 다시 오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구나.."

잔뜩 상심한 내 얼굴을 보고서 안쓰러웠는지, 그는

"그래도, 막 그렇게 증오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시간이 좀 지난 일이긴하니까."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이런 말에 기죽지 말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해봐요!"

이상할 정도로 나보다 더 의욕적인 그의 태도가 의아했다. 민아는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내 친구니까, 도와주답시고 그러는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송영주는 지금이 두 번째로 대화하는 게 아닌가?

"근데.."

"네."

"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려고 하시는 거에요?"

"음..."

송영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말이 없었다.

"그냥.. 남일 같지 않아서 그러죠."

"그래요..?"

"예전에, 대학생때..."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아쉬운 연애를 한 번도 안했을 것 같은 사람이 나랑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평소라면 남의 깊은 이야기를 굳이 물어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텐데, 오늘은 물어보고 싶었다.

영주는 지금 이야기 하긴 이야기가 너무 길다며, 오늘 가게 끝날 때까지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할 일은 있긴 했지만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새벽 2시까지하는 가게가 문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가게 안에서 두 번 만난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나눴다.

깊은 이야기는 오히려 생판 모르는 남에게 털어놓을 때가 편할 때가 있다. 이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일단 만나서 얘기를 해봐요."

"그러는 게 역시 좋겠죠?"

"정 못하겠으면.. 그냥 모르는 척 말 걸어볼 수도 있지 않나?"

"모르는 척이요?"

"재우 여기 오면 대쉬하는 남자들 많거든요. 그런식으로 처음에 말을 걸고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윤겸씨 말대로라면 그냥 말 걸면 그냥 컷, 이라면서요."

"네.."

"모르는 척 말 걸면 당황해서 ''뭐지?''하고 궁금증이 생길 거 아니에요?"

"네.."

"그러니까, 처음엔 그렇게 일단 말을 걸고 나중에 이제 이야기 하면 되지 않을까요?"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들으면 들을 수록 그럴 듯 한거 같아서 마음이 흔들렸다.

영주와 나눴던 이야기를 민아에게 나중에 얘기해봤을 때, 반응이 좋지 않았다.

"좋은 방법 같지는 않은데."

"그래...?"

"또 속이는 거니까..아니다. 일단 처음엔 그렇게 하고 다음에 만났을 때 제대로 말하면 괜찮지 않을까?"



"어~ 민아, 오랜만이네? 옆에 있는 친구는 누구야?"

"사장님~ 제가 미래 단골 한 명 데려왔죠~!"

그렇게 민아와 영주와 나는 말을 맞추어서 재우를 다시 만났다. 그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평소에 잘 꾸미지도 않으면서 자취방에 가져왔던 옷들을 다 꺼내며 이것저것 입어보며 거울 앞에 1시간을 서성였다. 그리고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왁스를 사서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망해서 결국 머리를 감았다. 거의 2시간이 넘게 오래 준비를 했다.

제대로 만나서 대화할 걸 생각하니, 긴장해서 손이 심하게 차가워질 지경이었다. 가게 앞까지 가는 것까진 순조로웠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또 무서워져서 민아와 옥신각신하다가 겨우 들어갔다.

두 번째로 다시 만난 재우는 여전히 너무 예뻤다. 예전처럼 청소하고 가련한 백련꽃 같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였다. 그러나, 가게 안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과 어우러져 은은한 조명에 일렁이는 칵테일 잔을 쥐고 시선을 내리고 있는 그의 옆모습은 너무나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장을 떨리게 했다.

"몇살이에요?"

"21..."

모른 척 시치미 떼는 방법은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내 말에 소극적이지만 대답을 해줬다.

"번호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나 너랑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고 싶어."

"그럼 계속 보면 줄 수 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뻔뻔한 연기를 하고 있다, 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다시 만나면 나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 나 몰라?"

순간 마음이 철렁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됐어요, 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이 말을 뒤로하고 떠나가는 그에게 다시 달려가 붙잡았다. 그리고 가게에 나오기 전 다급하게 내 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그에게 쥐어주고 도망쳤다.

연락이 바로 올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근데 한 번 만나니까, 마음이 더 초조해져서 영주와 단 둘이 술을 마셨을 때, 받았던 번호로 연락해, 재우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서 물어봤다.

바로 이야기 하려고 했었다. 근데, 재우가 너무 밀어내서 지금 이야기 하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변명이라면 변명이지..

억지로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서 겨우 그와 함께했다. 처음엔 길고양이처럼 날 경계했던 재우의 모습은 점점 풀어졌고, 우리는 평범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야."

"응?"

"너 휴대폰 줘봐."

"어!"

"헛 걸음 하는 일 생길 수도 있으니까, 뭐.. 오는 날은 연락하고 오라고. 어딨는
지 찾으러 돌아다니지 말고."

"와, 대박..."

"오늘 진짜 내 1년의 운을 다 쓴 날이면 어떡하지."

재우의 새 번호를 받은 그날 나는 휴대폰을 금덩이를 안고 가는 사람처럼 아주 소중히 품에 안고 집에 갔다. 그와 만날 때마다 너무 좋았다. 그가 나에게 마음이 연 게 너무나 고마웠고, 마음을 열어준 그가 또 너무 고마웠다. 하루의 25시간동안 옆에 붙어있고 싶을 정도로 너무 즐거웠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와 만날 때의 긴장은 조금씩 풀렸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얼마가지 않아 깨져버렸다. 난 정말 멍청했다.

그와 만난 이후 초반에는 정말 오랜만에 밤에 잘 잤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마음 속에 있던 불안이 다시 나를 덮쳐왔다. 단 비 같던 일상에 찾아온, 악몽이라는 불청객은 착각에서 나를 억지로 끌어냈다.

지금 나에게 잘해주는 재우는, 진짜 ''나''에게 잘해주는 게 아니다. 만약, 내가 기억하면서도 모른 척 다가갔던 걸 말한다면.... 생각만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겨우, 겨우 다시 만나서 즐거워졌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평화라도 너무 행복했지만 너무 행복해서 너무 무서워졌다.

불안의 씨앗은 점점 커져서 나를 더 수렁에 빠지게 했다. 만날 때 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타이밍을 잡았지만 막상 말 하려니 누가 입을 꽉, 잡고 있는 거 마냥 떨어지지 않았다.

천사보다 더 착한 재우는 내가 멍청하게 굴고, 못된 말까지 했는데. 나를 다시 좋아해주었다.

"너, 진짜 나 좋아해?"

"응."

"그럼..."

"그럼?"

"...?"

"그럼...!"

"으,응...?!"

"나랑..사귀..사귀던지..."

너무 소망하는 말이라서 꿈이라도 꾸는 건가, 생각했다.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따뜻해서 겨우 현실이라고 자각할 수 있었다.

''진짜로...?''

너무나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서 눈물이 계속 나왔다.

"그, 그래도 돼...?"

"그래."

"그럼..너도, 나...좋아..?"

"그래..."

나는 재우를 꽉 끌어안았다. 곧, 나를 밀쳐낼지도 모르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았다.

''진짜, 이제는 미루지마.''

나는 나에게 마지막 하루의 유예시간을 주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와 한 번이라도 연인다운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우리는 같이 영화를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를 집에다 데려다 주려고 했을 때,

"나 니네집에서 자고 갈래."

재우는 우리집에 왔다.

"오늘은 집이 멀쩡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재우가 처음으로 집에 찾아왔을 땐 바쁘기도 하고 정신도 없어서 청소를 안하고 살았다. 그 지저분한 방을 재우가 보고 치웠을거라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워져서 나는 혹시나, 싶어서 그날 이후로 매일 청소를 깨끗히 했었다.

"..원래 내가 그렇게 더럽게 해놓고 살지는 않아."

"흐음.."

"진짜로!"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꺼내볼려고 했는데 재우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취해 버렸다.
재우는 갑자기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서 나를 마주보았다.

''설마... 어른의 단계라도 밟으려고 그러는 건가?! 어떡하지....!?''

몇초 안되는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때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그러진 않았다. 재우는 그냥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리고 기댄채 떨어질려고 하질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있을 거야..? 나 이제 죽겠다.."

허벅지가 저린 것도 있었지만...

''.....''

"계속..."

"응?"

"계속.. 이렇게 안고 싶었단 말이야.."

저 말을 딱 들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마음 속이 또 울렁거려서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내꺼니까, 안놔줄꺼야..."

"..."

"진짜 싫었는데.."

"..미안해..."

나에게 안긴 이 사랑스러운 남자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너무.. 좋아서, 무서워..."

"...!"

저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두손으로 쥐어 짜이는 감각을 느꼈다..

"재우야..."

그는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툭, 어깨에 다시 기대어 잠이 들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사랑해."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툭, 그의 뺨 위로 떨어졌다.

억지로 붙여뒀던 거짓 관계는 마침내 이어졌다. 그러나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는 부서지게 되어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완전히 부서졌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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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1-04 01:43 | 조회 : 970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요번주에 완결을 내겠습니다! 하고 아주 맹랑하고 당당하게 공지를 올렸는데, 늦고 완결도 못해서 너무 부끄럽네요... 변명이란 말을 늘여놓자면 이 이야기는 결말을 정해두고 있었어요. 근데 쓰다보니 결정해 놓은 결말이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이 많이 들더군요.. 조금더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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