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첫사랑은 내 우상이었습니다.

"우리 어제부터 사귀기로 했어."

"어...?"

다시 또 꿈을 꾸는 건가, 제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아니.. 어떻게? 나는 멍한 눈으로 윤겸을 바라봤다. 분명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그의 얼굴 표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마치 호숫가에 비친 잔상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너 아무 관심도 없었잖아. 이렇게 갑자기?

"어제 내가 고백했는데.. 받아줬었거든. 헤헤.."

제아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진짜로..? 장난이 아니고?"

"그렇게 됐어."

윤겸의 목소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아니, 진짜 어떻게?

오늘 제아에게 윤겸과 있었던 일을 말하려 했었다. 근데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만 조용히 있으면.. 우리는 괜찮을 거니까.

"축하해."

나는 그 둘을 보며 웃었다. 자꾸만 얼굴이 굳으려 하는 걸 최대한 참고 웃으며 그 둘을 축하해 주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 웃을수록 마음이 양쪽으로 잡아 뜯겨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점점 그 들과 함께 있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 둘이 웃을때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래서 나는 멀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은 2학년 2학기 동안은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친해지는 건 어렵지만 멀어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이다. 혹시나 윤겸이 예전처럼 다시 내게 달라붙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도 변해버렸다. 나를 챙겼던 것만큼 제아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저렇게 변해버리나 싶을만큼 나를 상냥하게 보던 눈빛과 말투는 오직 그녀만을 향했다.

역시, 기분 나빴던 건가. 좀 챙겨준 애가 그것도 남자애가 좋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는 내가 싫어졌나 보다.

3학년이 됐을 땐 그 둘과 완전히 떨어진 반에 배정이 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들어갔던 동아리도 3학년이 되고 나서 그만두었다. 그 둘이 복도를 지나칠 때,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들을 피해다녔다. 덕분에 그들과 마주치는 날은 거의 없었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를 좋아했던 만큼...나는 그가 싫어졌다.

가끔..아주 가끔 마주칠 때, 나는 그를 피했지만 그가 말을 걸어온 적이 있었다. 늘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대화를 했던 날이 있었다.

학교에 남아서 시험공부를 혼자 하다가, 동아리를 다닐 적 처럼 해가 늬엿늬엿 지던 저녁이었다. 3학년 막바지 였던 초겨울 즈음 혼자 버스정류장에 앉아 이어폰을 꼽은 채 음악을 들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떤 사람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눈만 살짝 돌려 보니, 윤겸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채.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가 무슨 내용이었는 지는 희미하다. 모든 일이 다 어제 겪은 것처럼 선명하지만 마지막 대화만큼은 기억이 안난다. 어쩌면 가장 아픈 기억이라서 잊어버린 걸까.







"...."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상냥한 손길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일어났어?"

눈을 뜨니, 현우가 앞에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해서 진짜 자고 일어날 때까지 내 옆에 있어줬던 것이다.

"어..."

"자니까, 좀 났지?"

"어..그렇긴 하네. 지금 몇시야..?"

"지금 오전 11시 반? 너 하도 안 일어나서 코에 손가락 대서 숨쉬는지 안 쉬는 지 확인했어."

"그랬구나..."

"아까.. "

"어?"

"너 일어나기 전에, 그 새끼..아니 윤겸 왔었어."

"어..?"

"일단 돌려보냈어."

"어..."

"한 대 칠 걸 그랬네. 너 표정 보니까, 한 대 칠 껄 그랬다."

"...아니야.."

"너 이상황에 걔 감싸?!"

"내가 먼저 칠꺼야..."

"..그..그래.."

"뭐라고 했어? 걔.."

"한 번만이라도 얘기하자고 그러던데.."

"그래..?"

"..."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

"..."

"너, 이제 곧 방학이잖아. 본가 내려가 있을 거야?"

"음.. 아마도...?"

"그럼 조금만 사와야 겠다."

"장보러 가게?"

"그래, 조금 더 쉬고 있어."

"알았어.."

현우는 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지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방 안에 남겨진 나는 다시 눈물이 났다. 옛날 일이고 과거를 뭍어두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미웠다. 신경쓰이면 그냥 물어 봤으면 지금만큼 안 좋은 상황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덮고 있던 이불에 얼굴을 쳐박은채 숨죽이며 울었다. 사실, 울면서도 이게 울 정도의 일인가. 그냥 없던 인연이라 생각하고 끊어내면 될텐데 끊어내는 거 잘해왔는데, 윤겸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으면서도 듣기가 싫었다. 왜 모른 척 기억안나는 척 했냐고. 너는 나와 있었던 기억이 그렇게 쉽게 모른척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일이었냐고.

한 참을 울고 있을 때 현우가 돌어왔다. 현우는 울고 있는 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며 안았다. 내가 진정할 때까지 현우는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이 너무 따스해서 그가 토닥이는 손이 너무나 다정해서 나는 쓰레기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윤겸을 만나기 전에 현우를 만났다면 이렇게 아픈 일은 겪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나는 눈물을 손으로 벅벅 닦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에게 너무 기대면 안된다.

"어우..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이러고 있으니, 이거 어디 때놓고
가겠냐.."

물가에 내놓은 애 데리러 온 엄마같은 말투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다가 또 웃으니 현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이제, 얘기해줘."

"어?"

"어제, 자고 일어나면 얘기해 주기로 했잖아."

"...너 괜찮지...?"

"아마도.."

현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30분 가량의 긴 이야기를 가만히 앉아서 들었다. 그의 말이 거의 다 끝났을 즘 나는 분노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알수 없는 감정이 댐 터진 것처럼 터졌나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던 영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가끔 속내를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크게 후려치는 일을 벌릴 줄은 몰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현우는 깜짝 놀라 내 손을 붙잡았다. 어디가냐고.

"윤겸 족치러 간다."

현우는 내 손을 그래도 놓지 않고 있자, 나는 의아해서 현우를 멀뚱히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현우는 내 손을 놓아주며 가서 족치고 오라며 다시 웃어주었다. 나는 그 웃음에 힘 입어 양 손 힘을 꽉 쥐고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한동안 전원을 꺼놓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원을 켰다.부재중 전화가 거의 100통이 다되도록 와 있었다. 반은 현우였고 반은 윤겸이었다. 나는 부들 거리는 손을 한번 꽉 쥐고 몇번 툭툭 털어내고 나서 윤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기다린 사람처럼 신호음이 한 두번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다시 안볼꺼면 답하지 말던가."

내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지자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너네 집 주변에 있는 편의점..앞이야."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어이 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는 내 얼굴과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속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려다가 매섭게 노려보는 내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세워둘꺼야?"

그가 아무 말도 안하고 멀뚱히 서 있자 내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이 나와 그를 찔렀다.

"어?"

"할 말 많을 거 아냐."

"어. 그..그래. 카페라도 갈까."

"그러던지."






하루동안 못 봤던 그의 얼굴은 정말 엉망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 보다 나 때문에 입은 그의 상처들이 반대로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다시 만나 그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 상처말고 행복한 기억만 남겨주기로 결심하고 늘 다짐했는데.. 왜 난 너에게 늘 아픈 상처로만 남는 것일까. 넘어진 것인지 무릎은 밴드가 붙여져 있었고, 눈은 빨갛게 부어 오른 게 너무 미안해서 당장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마지막 대화를 했던 그날을 나는 한 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했던 1년 그와 자주 마주치는 것 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1년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던 3년. 나는 그를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다.


재우를 처음 봤던 건 중학교 2학년 초, 늘 혼자 있는 그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않고 세상과 담을 쌓은 듯한 그는 마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청렴한 선비 같았다.
늘 창가자리에 앉은 채 쉬는 시간엔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면 그의 검은 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는데, 무슨 화보 같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그는 눈에 안띄고 싶어하는 거 같았지만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중학생때 막 폭풍 성장해서 쑥쑥 키가 크는데, 그 사이에서 재우는 과하게 표현하자면 거인족 사이에 소인족이었다. 신기하게 키는 작은데, 또 팔이랑 다리는 얇고 길죽길죽한대다 얼굴은 조막만했다. 그래서 모델 지망생이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지, 얼굴은 하얗고 창백한데. 생기는 있고 입술은 신기하게 또 붉었다. 연한 핑크색인데 말랑말랑하고 도톰해서 젤리 같았다. 얇은 검은색 테 안경을 썼었는데, 그게 또 기막히게 어울렸다. 눈은 크고 동그라면서 고양이 같은 눈매라서 청춘드라마의 공부잘하는데 약간 까칠한 남자주인공같았다. 그냥 간단하게 그 때 그 시절의 재우를 표현하자면 우리반의 벼랑위의 꽃같은 존재였다.

보통 이 나이때 남자애들 같으면 재우같은 남자애를 비리비리하다며 욕하곤 하는데, 신기하게 재우는 반 남자애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가끔 그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애들도 족족 있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재우는 인기있는 축이었다.

"재우는 진짜 뭔가 곱다."

"그치. 잠깐 눈 마주칠 때마다 흠칫흠칫했다니까."

"맞아..! 말 걸고 싶은데, 항상 공부하고 있으니까. 말을 잘 못걸겠어.."

재우는 자기가 이렇게 뒤에서 아이들의 우상, 아이돌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걸 알까? 아마 저 속세를 벗어난 선비는 모를 것이다..


재우랑 친해지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는데, 자리를 바꾸는 시간에 우연히 나는 재우의 옆자리가 되었다. 멀리서만 보고 있었는데,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니 조금 긴장이 됐었다. 1학년 때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된 제아는 재우의 앞자리 였다.

제아는 1학년때 처음 본 여자애였는데, 이상하게 이후로 나한테 엄청나게 호의를 보이며 다가왔다. 친해지긴 했는데, 가끔 너무 잘해줘서 약간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2학년이 되고 같은 반이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 전에 '얘가 날 좋아하나..?'라고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도끼병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아니겠지하고 계속 넘겼다.

"야, 윤겸. 너 제아 별로야? 너무 철벽친다."

"어?"

"이것 봐봐, 또 모른 척 하네. 제아가 너 좋다고 계속 붙어있잖아."

"쟤가 날 좋아해?"

"몰랐어..?? 아니, 진짜로?"

"음..진짜, 그렇다고는 생각 안했어."

"너도 진짜 둔하다.. 제아랑 얼른 사겨!!"

"엄.."

"왜?"

"난 제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헐, 야! 좋다는 사람 있을 때 사겨야지!"

"그런가..."

"그래! 이 기만자!!"

같은 반 친구는 사귀라고 그랬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제아랑 노는 건 재밌지만.. 연애..한 번도 생각 안해봤는데.


재우에게 말을 걸게 된 건 진짜 어쩌다보니였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놓고 깜짝 놀랐다.

"재우야, 너는 동아리 들어갔어?"

재우도 깜짝 놀란 듯 그 큰 눈이 더 커져서 나를 바라보는데, 슈렉의 그 장화신은 고양이가 생각이 났다. 말 걸기 전에는 대하기 어려운 까칠한 성격일 것이라며 혼자 상상하곤 했는데, 완전 반대로 훨씬 순둥한 성격이었다.

"재우, 너 전교 몇등이야?"

"어...? 그건 갑자기 왜?"

"너 맨날 공부만 하니까 막 30등 안이라던가...?!"

"아니야..."

그와 얘기를 나눌 수록 이것이 진정한 반전의 반전의 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둥하고 착한 녀석은 그냥 낯을 많이 가리는 순수한 남자애였다.

별 거 아닌 평범한 대화도 이상하게 재우와 함께하면 더 재미가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어색해서 깜짝깜짝 놀라는게 경계하는 길고양이이와 처음 친해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리고 모두가 어려워하는 재우가 나한테만은 아니지만 제아와 나에겐 순둥하고 순진한 귀여운 친구니까 스스로가 조금 특별해진 기분도 들었다.

진짜 귀여운 길냥이에게 간택받은 사람의 기분이 이럴 것이다.

내 친구가 이렇게 귀엽고 착하고 잘생긴 애라고~ 라면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같은 동아리에도 들어오게 해서 재우와 같이 놀고 싶었다.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림은 또 야무지게 잘 그렸다. 역시 반전의 미소년.

재우와 진짜 좀 친구다, 라고 말할 정도의 사이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우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맞지도 않은 퍼즐을 맞추려는 어린 아이처럼 어색하게 제아와 나를 자꾸 붙이려 하는 것이었다. 마치 제아와 나를 이러주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의 행동이 조금 불편했다.

제아가 날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뭘 하기에는 난 제아를 친구로서 좋아한다. 제아도 나랑은 친구랑 지내고 싶어서 고백을 안하고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해서 모른척 했었다.

근데, 자꾸 모른 척 하려던 걸 이렇게 들쑤시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들쑤셔서 기분이 좋은가 아니면 재우가 나랑 제아를 이어줄려고 하는 게 기분이 나쁜건가.

제아가 재우에게 이어달라고 부탁같은 거라도 한 걸까, 초반에 재우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던 제아는 재우와 꽤 많이 친해진 것 처럼 보였다. 내가 없을 때 둘이서 뭔가를 속닥거리는 걸 봤을 때 나는 기분이 묘하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재우가 갑자기 여자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윤겸."

"응? 왜?"

"너는 왜 여자친구 안사귀어?"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라서 나는 깜짝 놀랐다. 재우도 아차 싶었는지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다 어색하게 웃었다. 순진한 재우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가 없었다. 이런 점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살짝 꼬집어 주고 싶었다.

더 이상 냅뒀다간 더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서 나는 재우를 우리집으로 불러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는 우리 반의 아이돌 재우는 진짜 아이돌이 되었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우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작은 체구로 티비속 캐릭터가 춤추는 대로 또 야무지게 바로바로 따라하는데, 그걸 보는 나는 최애 아이돌이 춤추는 걸 보는 바로 눈앞에서 보는 성공한 덕후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런 마음은 표현하진 않았다. 이런 말하면 재우가 귀엽게 째려볼 거 같긴 한데, 내가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에..

손님을 바닥에 재울수는 없으니까 재우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침대도 작진 않았으니까. 근데, 그러진 말 걸 그랬다. 그냥 내가 바닥에 내려가 잘 걸 그랬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니 얼굴이 자꾸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재우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하면 좋을 지 고민했다. 대놓고 재우에게 '나 제아랑은 그냥 친구니까 이어줄려는 건 안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재우 성격에는 분명 나에게 엄청 미안해 할 것이었다. 재우는 착하고 순진한 애니까.

그래서 나는 최대한 돌려서 말하기로 결심했다.


"너, 요즘 제아랑 나랑만 내버려두고! 맨날 어디가고! 그런데, 제아랑은 문자하니까! 내가 얼마나 서운하겠어!"

저 말 뜻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재우의 행동이 불편하다기 보다는 재우가 자꾸 나에게 멀어지는 게 서운했던 것이었다. 퍽퍽한 빵을 한입 가득 물어 먹어서 목이 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것이 사이다 한병을 들이킨 것 처럼 뻥 뚤리는 것 같았다.

같은 침대 위에서 재우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가 귀엽게 또 웃는데 그 순간 나는 심장이 한번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엇다.
떨리면서도 반짝거리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은 뗄 수가 없어서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나는 민망하니까 장난으로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린 것처럼 그의 몸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모른 척 연기를 계속했다.

"근데, 너 갑자기 왜 여자친구 얘기해?"

"음?"

"너 여자애들 얘기 별로 관심 없어 했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너가 먼저 그런 얘기 꺼낸 적 없었잖아?"

"음..그냥, 너 어...."

재우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떨어졌던 내 심장을 그가 멋대로 잡아채갔다.

"그냥, 너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왜 아무도 안사귀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좋아하는 애들도 많을 것 같은데.."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생기고 인기 최강인건 넌데.

저 말이 그냥 둘러대려는 말인 걸 알면서도 내 심장은 멋대로 속에서 춤추고 파티를 열었다. 이러다 심장이 뚫고 나올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딱히.. 그렇진 않은데. 어우, 야. 그런 소리 갑자기 들으니까 너무 부끄럽
다."

나는 거의 땅속에 기어들어가는 개미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얘진 머리 속에서 이상한 말만 튀어나갔다.

"응, 아! 그래도 만약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성격이 너 같으면 좋겠다."

말해놓고 정신차렸을 때 나는 내 입술을 때려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필터를 안 걸치고 나왔나봐!

그 날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재우도 잠이 안오는 지 한참을 뒤척였다. 그가 겨우 잠이 들었는지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올 때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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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0-05 20:27 | 조회 : 974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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