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첫사랑한테 차였습니다.

"어.."

웃으면서 교실에 들어온 그는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끌어 내 옆에 가까이 붙었다.

"어제 뭐하느라 그렇게 기절할 정도로 늦게 잔거야?"

"악몽꿨어.."

나는 오늘따라 입꼬리 올려 웃는 그의 입술이 야하게만 느껴져서 다시 얼굴을 책상에 파뭍으며 웅얼거렸다. 제발 가까이 붙지 않았으면 좋겠는데,내 허벅지와 살짝 닿아있는 그의 무릎쪽에 온 신경이 쏠려 식은 땀이 날 지경이었다.

제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헐, 진짜..? 진짜 싫다. 어떤 꿈이었는데?"

"...먹혔어."

신체의 한 부분이 먹히긴 했으니,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는 둘에게 한 교시만 더 누워있고 일어나겠다고 말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윤겸은 힘들었겠네, 라며 내 머리를 탈탈 털듯이 만지고 떨어졌다. 윤겸의 얼굴을 볼 수 가 없는 점도 있었지만, 잠을 거의 못자서 머리가 핑핑 돌았기 때문에 더욱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마음 같아선 5교시까지 누워있고 싶었지만 5교시는 체육이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4교시 마치는 종이 울리자, 윤겸은 나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너무 힘들면 체육때 보건실이라도 가는 게 어때?"

"아.. 아니야, 괜찮아."

머리는 아팠지만 잠은 오지 않아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생각을 계속 해봤자 답은 없었다.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넘겨야지, 뭐 어떡하겠는가. 누워 있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살짝 들릴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는 평소대로 그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체육시간에는 짝피구를 했다.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 짝을 짓고 두 팀으로 나눴다. 홀수 번호, 짝수 번호로 나눴는데, 윤겸과 제아는 같은 팀이었고 나 혼자 떨어졌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그와 신체접촉은 최대한 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와 눈만 마주쳐도 어젯밤의 그의 얼굴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에..누가 보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와 짝이 된 친구는 반에서 아주 조용한 여자애였다. 대화를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어서 사실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이였다. 나보다 한 참 작은 체구의 여자애는 안경을 끼고 수수한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성격도 나랑 비슷하게 소심한지 내 뒤에서 체육복 상의를 거의 쥔 듯 만듯 해서 이러다가는 금방 두 명이 갈라 질 것 같았다.

"저기.."

"어..어..?"

"조금 꽉 잡는게, 좋을 걸.."

"어..응.."

옆에 있는 사람도 어색해서 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마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최고로 혈기왕성할 중학교 남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피구왕 통키가 된 것 마냥 공을 살벌하게 던져댔다.

특히 상대편에는 우리 반에서 가장 덩치가 좋은 남자애가 있었는데, 공을 들고 우리편을 보는 모습이 초식동물을 바라보는 육식동물의 눈을 하고 있어서 눈이 마주치면 식은땀이 삐질 날 정도로 살벌했다.

그 아이의 시선을 피해 작은 여자애를 뒤에 매단채 빠르게 피하는 것 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최대한 눈을 안 마주칠려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는데, 운이 없게 딱 그와 마주친 것이었다.

눈이 딱 마주치자 시익 웃으며 그가 내게 공을 던졌다. 분명 공이 내쪽으로 오는 게 보이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사탕처럼 녹아서 땅에 달라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미친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얼굴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자,, 못 밖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휘청거렸다.

"재우..!"

시선이 정신없이 흔들릴 때 많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내 이름을 부르던 윤겸과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에서 떨어진 공은 바닥을 튕기며 다시 상대편으로 돌아갔다. 안그래도 핑핑 돌던 머리가 더 어지러워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공은 다시 우리 쪽으로 날아왔고, 결국 여자애는 어깨를 맞고 우리는 아웃되었다.

선 밖으로 나갈 때 얼얼하던 코에서 뜨거운 액체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손으로 닦아보니 역시 코피였다.

"재우야!!"

윤겸은 시합이 끝나지 않은 도중에 내게로 달려왔고, 반 애들의 시선도 내 쪽으로 꽂혔다.

"헐, 재우 코피나?"

"야! 너 공을 얼마나 세게 던진거야!"

반 애들은 한 명씩 내게 공을 던졌던 그 아이에게 비난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 괜찮아."

나는 괜히 시선이 쏠리는 게 부담스러워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윤겸은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얼굴을 두손으로 잡고 살피고 있었다. 제아도 내게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헐, 재우! 너 얼굴 붓는거 같은데?! 멍드는 거 아냐?"

"아..아야.."

공이 얼굴을 쓸었는지, 조금 따가운 것 같기도 했다.

체육선생님의 말대로 보건실에 가기 위해 운동장을 나왔다.

"같이 가자."

"뭘, 이런 걸로 같이가. 못 걷는 것도 아닌데."

"너 걷는 거 보니까, 비틀비틀 거려..!"

윤겸은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부축하듯이 내 팔 한 쪽을 자기 어깨 위에 올렸다. 공 하나 맞은 거 가지고 너무 요란인 것 같아서 나는 부끄러웠다. 제아는 어디선가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와서 우리쪽으로 뛰어오더니 숨을 헐떡였다.

"흐어.. 재우, 휴지..! 좀 닦아!"

"아. 고마워.."

제아가 건낸 휴지를 윤겸이 받아 들고 휴지 몇칸을 뜯어내 내 얼굴에 뭍는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내가 재우 보건실 데려다 놓고 올게."

"아, 응.."

제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향한 제아의 시선이 어쩐지 조금 어두워서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보건실에 갔을 땐, 선생님이 식사하러 가셨는지, 안계셨다.

"지금 선생님들 점심시간이라서 안계신가보다."

"어..그러게."

"일단, 앉아봐. "

"응."

윤겸은 내게 휴지 몇칸을 더 뜯어주며 말했다. 나는 보건실에 있는 창가쪽의 침대에 앉았다.

"얼굴 퉁퉁 붓는 거 아니야?"

나는 코를 휴지로 막고 코의 윗부분을 잡고 피가 멎을 때 까지 기다렸다. 윤겸은 내 옆에 앉아서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속상한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유..예쁜 얼굴 멍들면 어떡해."

"..."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맞을 때 소리가 완전 크던데."

"공 좀 맞은거로 무슨.."

"혹시 모르잖아..! 막!!"

"유난떨지마. 바보야."

딱 맞았을 때, 병원가야해나 생각하긴 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서 휘청거렸을 때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공 맞아서 엠뷸런스에 실려가는 걸 전교생이 보는 부끄러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겸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은 오늘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결심하자마자 단 둘이 있게 되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는 청개구리일 것이다.

"괜찮으니까, 이제 가봐."

"괜찮기는! 내가 막 나갔는 데, 너 갑자기 픽 쓰러지면 어떡해."

"그렇게.. 약하지는 않아. 진짜 멀쩡해."

"너 걱정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옆에 있을래."

"마음대로 해라.."

"아까 무슨 애들 피구로 사람 죽일 기세로 던져대는데, 피하느라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넌 재밌었어? 제아 이 녀석은 뒤에서 계속 귀청 떨어져라 소리를 질러대는데, 더 정신이 없더라."

"...난 그저 그랬어.."

"짝피구 진짜 별로였어. 너랑 이렇게 둘이서 조용히 노는게 더 좋아."

"너.. 진짜 간지럽게 그런 말 좀 하지마. "

"왜?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그래그래."

나는 얼굴을 가린 채 침대 뒤로 몸을 뉘였다. 침대가 한 번 위 아래로 일렁였다. 그는 내 옆에 풀썩 누운채 내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손가락 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자식.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실실 웃었다.

"야."

"응?"

"너 나랑 노는 게 왜 재밌어? 난 딱히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

윤겸은 한 번 한숨을 크게 쉬더니 긴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잡아 내리며 자기 얼굴을 보게 했다.

"너 가끔 그런 질문하더라. 왜 하는 거야? 그냥 너가 좋으니까 같이 노는게 재밌는 거지."

"..성격이 안좋은 건 사실이잖아. 제아랑 너 말고는 딱히 친구도 없고.."

"넌 진짜 너 자신을 모르는 구나? 어휴..내가 진짜 이렇게까지는 말 안할려고 그랬는데."

"..뭔 소리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타오를 것 같았다.

"너 진짜 착하고 순해. 그래서 귀여워."

"뭐,뭐?"

"착하고 순하고 귀여운 너가 좋아. 너랑 별거 아닌 얘기 해도 난 매일 즐거워. 그래서 나는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이제 알겠어? 넌 진짜 매력이 넘치는 그런 사람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한테 너는 예쁜 사람이야."

그의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말이 내 마음을 마구 어지럽혔다. 아무리 문을 여러가지 자물쇠로 잠궈놔도 윤겸은 그 문을 간단하게 열고 들어온다.
아니면 내가 그에게는 문을 열어주는 건가, 모르겠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좋을 줄 알았다. 두근거리고 설렐 줄 알았지. 설렘과 행복은 그와 함께한 이 순간이 뿐이었다. 설렘과 행복이 지나고나서 난 절망했다. 윤겸은 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남자였다.

소중한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 하고 있었으나, 이제 그것도 한계였다. 제 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할 수 있다면 손으로 붙잡고 뛰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게다가 감정과 이성이 씨름을 하고 있을 때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너.. 지금 나한테 고백하냐?"

"어...?"

진지하던 얼굴이 멍청하게 멍해졌다. 갑작스럽게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멍했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얼굴을 확 붉혔다.

"아..?!"

"얼굴 오늘 나오는 토마토 샐러드 같다."

"너..너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어..어..?"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 등 돌려 누웠다. 침대시트를 꽉 쥔 두 손이 부들 떨렸다. 한 순간에 모든 복잡한 생각이 뇌를 스쳐지나갔다.

"좋다던가 그런거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말해. 난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울렁거린다고."

"..."

"너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니.. 너...?"

멍청이 윤겸은 역시 바로 못알아 들은 것 같았다.

"너가 좋다라고 말할 때마다 떨린다고."

그는 몇분 간 침묵을 유지했다. 뒤로 돌아 있어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우주 최강으로 둔하고 바보 같은 남자니 멍청한 표정을 지은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같은 남자한테 떨린다던가 그런 소리를 들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을까.

아니, 그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끊어버렸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마.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크게 신경쓸 거 없어."

".....나는..!"

"어머, 무슨 일로 왔니?"

보건실 문은 열리지 않았는데, 보건실 밖에서 보건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신이 멍했다. 설마 방금전 대화를 누가 들었다면... 누군가 그 자리에서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보건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보건선생 한 명이었다.

멍이 들고 쓸려서 까진 뺨에 약을 바르고 보건실에 나가기 까지 윤겸은 말 없이 내 옆에 있었다.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는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 옆에 서서 같이 걸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이 걸었다.

이제 제아한테는 뭐라고 하지.. 기세좋게 윤겸에게 내 마음을 말하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윤겸과 뭔가 다른 관계가 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문제는 제아가 나에게 또 윤겸에 관한 부탁을 할때이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면 좀 더 수월하게 이 난제를 풀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잔머리 굴릴 줄 모르는 15살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니 빨리 온 학생들이 몇명 있었다. 교실까지 오는 동안 윤겸이 말을 건다면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지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교실에 모든 애들이 다 돌어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고 내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심장에 주삿바늘을 찔러넣은 것 처럼 찌릿하고 아팠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교실에 돌아온 제아는 윤겸이 평소랑 다르게 말이 없고 나도 얼굴이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는지 눈치를 조금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반응을 보니 문 앞에 있던 사람이 제아는 아니였던 거 같았다. 아마도..

폭풍전야같은 하루였다. 사이 좋았던 세 명의 친구는 오늘 하굣길은 각 자 혼자였다.


다음 날이 되서 윤겸은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같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었다. 어제 반응으로 보았을땐 분명 나를 피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또 아무렇지 않게 살갑게 붙어왔다. 나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를 대했다. 그가 나에게 다시 상냥하게 웃
어줄 때마마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재우."

동아리 실에서 제아가 아직 안왔을 때 그는 그림을 그리는 내 옆에서 휴대폰 게임을 했다.

"왜."

"나 어제 일 생각해 봤는데."

탁,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붓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물감이 뭍은 쪽부터 떨어진 것인지, 타일 바닥에는 빨간 물감이 지저분하게 뭍었다.

더 이상 그 얘기는 안 꺼낼 줄 알았다. 근데 갑자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꺼내니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입만 어항 속 금붕어처럼 벙긋거리자 윤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그냥 착각한 거 아니야?"

"....뭐?"

"아니, 그렇잖아. 그냥 두근거린게 좋아하는 거는 아니지 않나. 싶어서..?"

멍청이 바보란 말을 계속해서 진짜 멍청해진 건가, 이 바보 머저리 같은 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 머리에서 갑자기 열이 확 올렸다.
내가 진짜 고민하고 고민해서... 계속 아니라고 부정하던 마음을 겨우 털어놨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착각''이란다.
차라리 계속 아무 말도 안했으면 나았을 거 같은데.

"너...."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어서.

"너 진짜 짜증나."

"어?"

당황하는 표정도 지금은 다 재수없었다. 저 멍청한 놈에게 한대 들이박고 싶었다. 고백 거절도 아니고 상대가 고백이라고 조차 생각을 안해주니
차이는 것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붓을 살짝 떨리는 손으로 주웠다.

"...재우..?"

"너 나한테 말 걸지마. 진짜 너 진짜.."

"..."

"그래, 착각이야. 이 머저리야!"

부글부글 끓던 속이 결국 터졌다. 동아리 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나는 더 이상 윤겸과 같이 있다간 바보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동아리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멍청한 놈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한참을 뛰었을 때, 나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꺅..!"

"으악..!"

눈을 꽉 감은채 드라마처럼 뛰었더니, 현실에서는 지나가는 여자애와 부딪쳤다. 눈을 뜨니 체육때의 그 조용한 여자애가 눈 앞에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애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미안..!!"

내 멍청한 짓 때문에 넘어진 여자애한테 너무 미안했다. 넘어진 여자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여자애를 일으켜 주려고 손을 뻗었다. 여자애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내가 앞을 안보고 막 뛰어서..미안.. 쎄게 넘어진 거 같은데, 괜찮아?"

여전히 낯을 가리는 듯 한 여자애는 고개를 푹 숙인채 고개만 저었다. 혹시 아파서 우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해서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진짜, 괜찮은 거야?"

"괘..괜찮아...!"

눈이 잠깐 마주쳤을 때, 여자애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밀치고 뛰어갔다. 멍하니, 아직 이름도 모르는 여자애가 사라진 복도를 쳐다보다가 떨어뜨렸던 가방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울적한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윤겸에게 문자 몇 통과 부재중도 와 있었다. 다시 목소리를 들을 용기는 없었고, 어떤 내용의 문자가 와 있을 지 전혀 예상이 안되서 열어볼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서 눈을 감았다. 이 상태로 사라져버리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양은 뜬다.

학교에 가니 제아는 밝은 얼굴로 나를 교실 문 앞에서 부터 맞이해주었다.

"재우! 어제 왜 먼저 갔어!"

"어...? 어.. 그냥.. 할 게 있어서..."

윤겸에게 고백하고 나서 제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 도와주는 것도 이제 못하겠다고 말을 해야되는데, 제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나한테 엄청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차라리 도와주겠다고 하지말걸 그랬다. 처음부터 안했으면 이렇게 더 미안한 감정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녀의 밝은 얼굴과 반대로 나의 마음은 더욱 더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재우! 나 너한테 말해주고 싶은 거 있었는데, 너 어제 전화도 안받더라?"

"아.. 전화 했었어?"

자리에 가서 앉으며 나는 가방에 넣어뒀던 필통을 꺼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아는 윤겸의 옆에 딱 서서 나를 봤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뜬금없는 두 친구의 팔짱에 나는 당황해서 그 둘을 번갈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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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9-28 19:59 | 조회 : 1,284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완결이 곧 머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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