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첫사랑이..

"너, 나 진짜... 좋아해?"

윤겸은 조금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로?"

"응."

윤겸의 시선은 똑바로 내 시선과 마주했다.

"그럼..."

결심은 섰지만 막상 그 '단어'를 입으로 내뱉자니 목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나는 입을 꾹 다문채 망설였다. 윤겸은 내 손을 꼭 잡으며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는 잡힌 손을 보고 용기를 다시 얻었다. 한번 숨을확 들이켰다.

"그럼....!"

"ㅇ,응...?!"

갑자기 내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는 깜짝 놀랐다.

"나랑..사귀..사귀던지..."

호기롭게 큰 목소리로 시작했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중요한 순간에 발휘하는 나의 절망적인 말주변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

"...."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아무 말 없자 불안해져서 그를 눈만 슬쩍, 위로 올려다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동그랗고 부드러운 눈매가 잔뜩 찡그러진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을 구기는데, 저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못나서 나는 웃음을 빵! 터트렸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길가라서 다행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봤다면 정말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한명은 울고 있고 한명은 그 앞에서 포복절도 하고 있으니.

윤겸은 울먹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 그래도 돼..?"

"그래."

나는 비집고 튀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나.. 좋아..?"

나는 대놓고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러워져서 개미가 소리내는 것 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는 갑자기 나를 확, 자기 품으로 끌어 당겨 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진짜...?"

그의 어깨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고백받으면 좋아서 날 뛸 줄 알았더니..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는 듯 했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지 계속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응."

"진짜, 진짜로...?"

"응."

"거짓말 아니고..?"

"그렇다니까."

"진짜..? 꿈인 거 아니고..?"

이대로 냅뒀다간 밤새도록 이 질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번 용기를 내면 다음에 하는 것은 쉬워지는 것이다. 주변에 누가 있던지 신경 쓸 겨를 없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내 입술이 닿자마자 윤겸은 불에 데인 사람 마냥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대롱대롱 달고 있던 눈물도 놀란건지 쏙 들어갔다.

"진짜라니까."

"그,급..앗"

그는 너무 놀라서 혀까지 깨물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채 찌릿한 고통에 신음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좀 믿어라."

"으,응..."

"그래서?"

"응?"

"정확히 대답해야지. 사귈 거야. 말 거야."

나는 우물쭈물 망설이는 그가 너무 답답해서 직구를 날렸다.

"..사귀고 싶어."

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감성이 지배하던 자리를 겨우 이성이 다시 정신차리고 나왔을 때, 나는 쪽팔림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 뜬금없는 상황에 고백을 한 것까지 모자라 키,,키키스까지 하다니! 뺨이었지만.. 이건 다 윤겸의 탓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고 안아주는데 그러면 뽀뽀하고 싶어지잖아.

우리는 말 없이 영화관으로 갔다. 나도 어색해 했고 윤겸도 어색한 듯 말이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손은 잡고 갔다. 영화 예매를 안하고 갔더니 영화상영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관 건물 내에 있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고백을 하면 그는 전보다 더 징그럽게 붙어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고백받더니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질 않나. 게다
가 전보다 더 소심해져서 쭈굴거리는 게 웃겼다.

"뭐.. 마실래..?"

"음.. 나는 그냥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우리는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 사람이 많이 없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

"..."

우리는 말 없이 조용히 커피만 홀짝였다.

'근데.. 사귀자고 얘기는 했지만, 사귀는 건 대체 뭐야. 그 전이랑 뭐가 다른거지?'

나는 윤겸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말 없이 빨대만 문 채 나를 살피고 있었는 지 눈이 딱 마주쳤다.

"야."

"큽..켁..쿨럭..응..?"

사례가 들려 콜록 거리는 그에게 티슈 한 장을 뽑아 내밀었다.

"내가 뭐 잡아먹냐? 왜 그렇게 쫄아 있어?"

"아, 아니.. 그냥, 너무 긴장되서."

"...? 새삼스럽게."

"지금은.. 남자친구잖아."

그렇게 말하고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세상 조신해 보이는 윤겸이 나는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저런 성격 아니면서 왜 저렇게 수줍음쟁이가 된거야.'

"남자친구 라는 말."

"응..?"

"엄청 낯간지러운 거 같은데."

"...?"

"좋은 거 같아."

"...!"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 올려 웃었다. 그가 찌질하게 반응 할 때마다 나는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이상한 취향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근데."

"응...?"

세상 조신한 남자, 윤겸이 다소곳하게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사귀면 뭐하는 거야? 한 번도 안 사겨봐서 나 이런거 하나도 몰라."

"어? 한번도..?"

"응, 네가 첫 남자친구야. 영광인 줄 알아라?"

"헐, 대박."

윤겸은 무슨 큰 상을 수상한 사람처럼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손을 모아 맞 잡았다.

"그러니까, 너가 잘 이끌어 줘야 해."

"근데, 나도.."

"너는 있을 거 아니야."

'제아, 말고도 또 누구 사귀긴 했겠지..? 성격도 좋은 편이고.. 외모도..'

내가 좀 더 뚜렷하고 짙은 이목구비를 가졌다면 윤겸은 부드럽고 유연한 이목구비였다. 그는 외형과 걸 맞게 머리는 부드러운 자연 갈색의 곱슬의 머리를 가졌다. 그와 반대로 내 머리는 스트레이트. 탈색으로 밝게 뺀 머리색은 그와 인상을 더욱 더 반대로 만들었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는데 체격은 다부진 느낌이라서 딱 대형견 같은 이미지였다. 중학생때는 아직 성장기라서 여리여리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묘하게 섹시한 오오라도 있어서 대학교 들어와서 인기가 박 터지게 많았을 거라고 예상했다. 나와 그를 딱 비교해 본다면 딱 고양이와 강아지라는 느낌.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중학교 때 제아랑 사겼잖아.'

중학교 기억 속에 윤겸은 제아와 사겼다. 제아도 그렇게 말했고..그에게 물어봤을 때도..

"재우!"

내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 보니 현우는 손을 위로 든채 좌우로 신나게 흔들며 영주와 같이 카페에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역시 우리는 운명의 데스..티니."

현우는 내 앞에 앉나 있는 윤겸을 보고는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고개만 위 아래로 움직여 인사했다. 영주는 현우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이며 타박했다.

"예의 없게 뭐하는 거야. 안녕하세요, 재우도 안녕. 둘이 영화 오늘 데이트하러 왔나 보네."

영주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띄며 말했다.

"형, 안녕하세요. 웬일로 현우랑 같이 왔네요?"

"얘가 하도 찡찡 거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네."

"내가 언제 찡찡 거렸어!"

윤겸은 두 명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특히 현우에게는.. 이 전에 둘이 거의 싸우기 직전까지 갔으니 어색 할 만도 했다. 현우는 여전히 영
윤겸이 탐탁치 않아 보였다. 언짢은 얼굴로 팔짱을 끼며 그를 바라보는 데 누가 봐도 명백히 시비거는 투였다.

"형, 우리 영화까지 시간 좀 남았는데, 여기서 좀 놀다가 가자."

"둘이 데이트 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딴 곳으로 가자."

"왜! 나도 오랜만에 재우랑 같이 놀고 싶다고!"

"안, 돼."

영주는 현우의 뒷덜미를 잡고 끌었지만 그가 망부석이라도 된 것 마냥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외로 윤겸이 먼저 말을 건냈다.

"아, 저는 괜찮아요."

"봐봐, 괜찮다잖아~"

영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해, 재우야..이 철 없는 애 때문에."

"아니야, 우린 괜찮아."

두 명은 주문을 하러 카운터에 갔다. 카운터에 가기 까지 두명은 투닥거렸다. 영주는 쓸데없이 왜 그러냐고 핀잔을 주었고 현우는 내가 뭐! 라고 말하며 받아넘겼다.

"너 진짜 괜찮아? 지난 번에 현우랑 거의 싸울 뻔 했잖아. 어색할
거 같은데."

"나 이제 너 남자친구, 잖아. 너 친구랑은 사이 좋게 지내야지.."

윤겸은 앞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마치 아직 어리면서 어른스러운 척 하는 대형견 같았다.

"풉.."

"뭐, 뭐야. 왜..?"

"그냥, 하는 게 귀엽네."

"너..오늘 따라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글쎄, 오늘은 그러고 싶네."

"완전 자기 마음대로...."

"그래서 싫어?"

"..아니.."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려주고 얼음이 담겨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왜 지금까지 윤겸이 내게 그렇게 불도저처럼 달려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건드리는 대로 반응이 딱딱 오는 게 참 재밌단 말이지.

현우와 영주는 음료를 각 자 한 잔씩 시켜서 가져왔다. 현우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던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딱 붙으며 윤겸을 흘겨 보았다. 영주는 현우를 보며 눈으로 나무랐지만 현우는 신경쓰지 않았다. 영주는 현우의 반응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재우, 완전 보고 싶었다~ 한 번도 먼저 전화 안하더라?"

"바빠서 그랬지, 뭐."

"완전 서운하다!"

"그러는 너도 문자 잘 안하더만."

오랜만에 만난 현우와 즐겁게 만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윤겸은 머쓱하게 앉아있다가 영주와 짧은 대화를 몇번 주고 받았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현우는 이제 가야겠다며 나에게 인사했고 여전히 윤겸에게는 삐딱하게 서서 고개만 까딱 움직였다.

"재우, 나중에 연락하기!"

"그래, 알았어."

"응응~"

현우가 다 마신 음료잔을 반납하고 오는 길에 나는 잠깐 일어나서 그에게 갔다. 윤겸은 다 마신 음료잔에 빨대를 꽂은 채 멍 때리다 갑자기 일어나는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어, 재우. 왜?"

"야, 나 이제 얘랑 사귄다."

현우에게 귀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뭐? 너, 진심이야? 괜찮아?"

현우의 얼굴색이 이상하리 만큼 차갑게 식었다. 영주는 급하게 현우에게 오더니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그를 입구쪽으로 끌고 갔다.

"나중에 둘 이 한번 가게에 놀러와, 서비스 해줄게."

그리고 다급하게 두 명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현우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겠거니 하고 잊어버렸다. 현우는 윤겸을 싫어하니까..

'나중에 만나서 자세하게 얘기해줘야 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우리는 건물에서 나왔다. 시간은 꽤 많이 지나 건물 안 시계바늘이 1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거리를 걸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는 순간에 윤겸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그 너 친구한테."

"현우? 왜?"

"무슨 말 한건지 물어봐도 돼?"

그는 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현우에게 가 비밀스럽게 속닥인 게
신경이 쓰였나 보다.

"아~ 그거?"

윤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봤다.

"나 이제 너랑 사귄다고 말한 건데?"

"아, 그거..?"

윤겸은 주체 못하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한 손으로 막았다.

"광대가 하늘로 올라가서 저기 달이랑 짝짝꿍 하겠다."

"크흠..."

그는 머쓱한 듯 괜히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가끔 그와 있으면 평상시와 다르게 시간이 엄청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시간의 마법사라도 된 것 마냥 1시간이 마치 1초처럼 흘러갔다. 영화관 건물과 내 자취방까지의 거리가 꽤 멀었지만 금방 도착했다.

"얼른 들어가봐, 시간이 생각보다 엄청 늦었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를 쳐다만 보고 있자 그는 약간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입을 열었다.

"왜, 왜...?"

"집 들어가기 싫다."

윤겸은 내가 예상한 반응을 보였다. 조금 당황스러울 때 나오는 그의 습관. 그는 입술을 몇번 달싹이다 혀를 내밀어 살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럼.. 좀 산책할래?"

'얘 갑자기 왜 이렇게 내숭을 떨어? 내가 답답해서 안되겠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야."

"응?"

"나 너네집에서 가고 갈래."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윤겸은 가는 내내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인격이 두 개가 아닌가 싶었다.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옷을 벗겨달라고 하던 남정네는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나는 즉흥적으로 그의 손등을 쥐고 있던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봤다. 그는 전기충격을 받은 사람마냥 파르르 떨며 내게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 나는 비어진 손을 아쉽게 보다가 눈을 크게 뜬채 어버버 거리는 윤겸을 쳐다봤다.

"너..! 너, 너어..!"

"내가 뭘? 빨리 가기나 해. 아, 들어가기 전에 맥주 좀 사가자."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걸어갔다.


윤겸이 쓰러졌던 날과는 다르게 오늘은 집이 깨끗했다. 사실 맥주 사오는 동안에 만약 방이 또 전이랑 같으면 분위기고 뭐고 다 깨질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 편한 옷 좀 줘. 갈아입게."

"응."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입고 있던 셔츠를 훌렁 벗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매고 있던 가방을 침대 밑에 던져 놓고는 내 쪽으로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술과 안주상을 차렸다. 뒤로 돌아 있는 그의 귀는 빨갛게 익다 못해 화르륵 타들어가고 있었다. 작은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서 맥주를 각 자 한 캔씩 땄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는 탄산이 팡팡 시원하게 속에서 터졌다.

"크으으.."

"맥주는 괜찮아?"

그는 내게 안줏거리로 내온 과일을 포크로 찍어서 하나 내밀었다.

"음.. 원래 별로 안 좋아하는 데, 오늘은 좋은 날이라서 그런가. 괜찮네."

"다행이다."

"오늘은 집이 멀쩡하다?"

나는 나름 깨끗한 원룸을 둘러보았다.

"..원래 내가 그렇게 더럽게 해놓고 살지는 않아."

"흐음.."

아삭거리는 식감의 사과를 씹으며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봤다.

"진짜로!"

빈 맥주캔이 작은 상 위에서 하나 둘 씩 쌓여갔다.

"재우야, 취했으니까. 이제 그만 내려오고 자자.."

"싫어.."

마실 때는 분명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언제 올라갔는지.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그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윤겸은 덕분에 아주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조금 떨어뜨리려고 하면은 내가 나무늘보마냥 팔에 힘을 꽉 줘서 달라붙는 바람에 그는 어떡하면 좋을 지 몰랐다. 작은 체구이더라도 성인 남자가 올라와 있으니 다리도 꽤나 저렸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있을 거야..? 나 이제 죽겠다.."

"계속.."

"응?"

"계속.. 이렇게 안고 싶었단 말이야.."

"..."

"그러니까..이제 내꺼니까, 안놔줄꺼야..."

"..."

"진짜 싫었는데.."

"...미안해.."

"왜, 왜 이렇게 잘생겼니...? 이러니, 내가 다시 또 멍청이처럼 빠지지."

나는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멍하니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괴로운 건지 아니면 슬픈건지 미간을 찡그리며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너무.. 좋아서, 무서워.."

"...!"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재우야."

그가 그 뒤에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어서 듣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한번도 숙취라는 걸 느겨본 적이 없었다. 몇 모금 술이 들어가면 금방 잠이 들어서 얼마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숙취라는 걸 못느끼고 다음날이 되면 아주 상쾌하게 눈을 떴던 것이었다...그러나, 오늘은 아니였다.

"악..."

잠에 깨자마자 누가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조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자동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몸을 움직이기 갑갑하다 생각이 들어 눈을 뜨니 윤겸이 나를 자기 품 안에 가둔 채 잠들어 있었다. 상당히 깊게 잠든건지 내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누워 있다 갑자기 일어나니 속이 안좋았다. 비실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마침 차가운 생수 두 병이 들어있었다. 차가운 물을 좀 마시니 정신이 그나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건지.. 바닥에는 빈 맥주캔이 어지럽게 방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발을 때며 바닥에 엉망으로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주웠다.

'술은 많이 마시면 안되는 거구나..'

기억나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어제 그의 품에 판다처럼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던 내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쓸데 없는 말까지 내뱉은 것 까지..

"그냥 뭍어두기로 맘 먹었는데.."

쓰레기들을 다 치우고 방을 둘러보니 그의 침대 밑에 그가 어제 매고 있던 가방이 던져저 있었다. 가방을 닫지 않은 채로 던져놔서 그런지 안에 있던 물건들이 몇가지 삐져나와 있었다. 치우는 김에 가방을 정리해서 책상위에 두던가 해야겠다 싶어서 바닥에 널부러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그 중에는 그의 지갑도 있었다.

"이거.. 아직도 쓰네..."

그 지갑은 그가 중학생때부터 갖고 있던 지갑이었다. 꽤 많이 오래된 지갑의 가죽은 색이 조금 변색이 되어 있었다.

'생일 선물은 지갑으로 해야겠다.'

그의 지갑을 위로 들어올렸을 때 작은 종이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갑에 왜 쓰레기를 끼워둔거람."

그 종이를 들어서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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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9-07 23:20 | 조회 : 1,000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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