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완벽은 있었다.

뜨끈한 열기가 얼굴 위를 덮으며 청양고추의 매운 향이 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간질거려왔다.

“ .... 스읍- 크으.. 좋다. ”

“ ...뒤질래? ”

“ 응? ”

저 새...아니 서하는 흰 쌀밥을 매운 국물에 말며 저를 순진무구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평소보다 1시간 빨리 나오라고 해서 나왔더니 지금 이 꼴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딴 원하지도 않는 매운탕보다 달콤한 꿈을 맛보았을 것이다.

“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데 해장해야지. ”

“ 그럼 술잔을 치우시던가. ”

“ 술은 술로 해장하는 거야. 왜 이래? 초짜처럼? ”

“ 어제도 개민폐 부려놓고 아침잠까지 뺏는 건 좀 아니지 않냐? ”

물론 돈도 받았고 밥도 지가 산다지만 그래도 불만스러운 부분이 적잖게 있었다.
머쓱하게 웃어넘기는 저 얼굴의 이마를 확 때려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매운탕을 한 숟갈 떠서 먹었다.

“ 아니 너 오늘 시험인 건 알아? ”

“ 응? 괜찮아. 괜찮아. ”

“ ...그래 그러다 C+받고 또 술 쳐먹겠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

“ 헤헤 우리 횬이~ 날 너무 잘 알아. 아, 그러고 보니까 나 어제 곯아떨어졌나? ”

“ 말도 마. 어제 술을 계속 들이붓더니 그대로 네 얼굴도 책상에 들이부었다. ”

서하는 깔깔 웃으며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제 그렇게 울며불며 하소연할 때는 언제고 참 회복도 빨랐다.

“ 어제 내가 뭐 토하지는 않았지? ”

“ 토? 안 했... ”

어젯밤 일을 생각하다 문득 어제 넘어지려던 것을 잡아 준 남자가 떠올랐다.
맵시 좋은 남자는 정말 평생에 볼까 말까 한 그런 남자였다.
아마 그 날 서하가 멀쩡했다면 바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진짜 토했어? ”

“ 아니, 토는 안 했는데.... 어제 네가 실없는 말을 하기는 했지. ”

“ 내가? ”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 괜찮은 남자는 애인이 있고, 완벽한 남자는 게.. ”

“ 그거 사실이라니까!! ”

갑자기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상체를 일으킨 서하 때문에 매운 국물이 기도로 넘어가 사례가 걸렸다. 아오 저것이 진짜..

“ 컥,,쿨럭 아니, 왜 소리를 질러? ”

“ 그거 사실이다. 너 그거 그냥 넘기면 큰 코 다쳐. ”

“ 아니..”

“ 명심해!! ”

“ ... ”

얘도 참 중증이다.
결국 대충 끄덕이며 마저 매운탕이나 먹었다.
저가 백번을 아니라고 한들 백 한 번을 맞다고 할 애다.
몇 번을 말해도 내 입만 터져라 아프지..

***

“ 현, 넌 끝?? ”

“ 엉, 나 오늘로 딱 종강. ”

“ 아씨.. 난 4일은 더 가야하는데.. ”

“ 룰루, 난 시험이 싹 몰려 있었지롱. 난 오늘 알바 면접 보러 간다. ”

“ 알바? 뭔 알바. ”

“ 걍 무난하게 카페 알바. 도보로 괜찮은 카페가 마침 알바생 뽑더라고 ”

“ 쯧 떨어져라 ”

“ 뭐 씨땡? ”

“ 아니야. 나 간다. ”

길 가다가 가방 찢어져라. 물건 싹 쏟아져라.
후다닥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서하에게 중지를 선물하며 나도 가방을 챙겼다.
강의실을 나가니 해도 쨍쨍한 것이 참 맑은 하루였다.

“ 날씨 좋-타. 오늘은 뭐 행운이 팍팍 쏟아질 것 같은데? ”
.
.
는 개뿔
아까 서하한테 날렸던 저주가 잘못 튕겨서 저한테 들어온 게 확실했다.
튼튼했던 가방의 밑이 갑자기 찢어지더니 그 사이로 어마 무시한 소름 돋는 소리가 잇따르며 가방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니 지랄 맞게도 필기구며 테블렛이며 뭐하나 난리나지 않은 게 없었다.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에 애써 위로하며 어기적 어기적 지하철로 향했더니 기차가 이미 도착했고 이 가 족!같은 가방 사건 때문에 무게의 저항 및 조심성까지 플러스 되어 놓치고 말았다. 겨우 탔는데 자리는 또 왜 그렇게 없는지 그 상태로 40분을 서서 가고 집에 도착해 시계를 확인하니 알바 면접하기로 한 시간보다 무려 20분이나 늦어졌다.

“ 씨!!! 오늘 행운이 팍팍은 개뿔아!!! ”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우사인 볼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도보로 10분 거리인 카페를 6분만에 도착하니 이미 면접 시간보다 거의 30분이나 지체되어 있었다.
계시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페 문을 조심히 열었다.
CLOSE라는 펫말이 달린 유리문은 전달받은 내용처럼 잘 열려 있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절로 몸이 바짝 굳었다.

“ 계...계세요? ”

분위기 좋은 카페에 그렇지 못한 긴장감이 몰려와 목소리가 작아졌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조금 더 큰 소리로 재차 말했다.

“ 저기.. 알바면접 보려고 온 사람인데요.”

“ 아, 잠시만요. ”

그제야 소리를 들었는지 저 안쪽에서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정쩡하게 서서 기다리는데 곧 누군가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리자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보였다.

“ 어? ”

“ 죄송해요. 재료 좀 정리하느라고 못 들었네요. 몇시에 면접 보시기로 하셨죠? ”

바로 어제, 가히 완벽한 남자라고 칭할 수 있었던 그 남자가 제 눈앞에 서 있었다.
말끔한 흰 셔츠와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남자는 커피향을 풍기며 걸어오는데 무슨 혼자 광고를 혹은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멍하니 보며 당황스럽게 서 있자 남자는 눈을 깜빡이다 다시 멋들어지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참 여자건 남자건 설레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 고놈 참 잘생겼다.

“ 네?! 아..아아 저 3시10분에 면접 보기로 했던... ”

“ 10분? ”

남자는 카페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3시 38분.
이미 한참이나 면접 시간에 늦은 뒤였다.
나는 차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다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겨서.. 문자라도 급하게 보냈었는데.. ”

“ 아.. ”

“ 혹시 어떻게...면접을 볼 수 없을까요? ”

고개를 숙여 사과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발.. 저 이거 못 붙으면 생활비가 좀 빠듯합니다.
저 이번에 지출이 클 일이 많은데 제발 이 불쌍한 놈을 거두어주세요.
애절한 자신의 마음이 통했는지 남자는 고민을 하다 작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저쪽 테이블에 앉아 계세요. ”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남자가 가리킨 테이블에 앉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카페인지 처음 보는 카페였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예뻤다.
우드로 인테리어 된 카페는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운치 있었다.
작은 디테일들이 돋보이는 카페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올 것 같았다.

“ 아이스 커피로 괜찮으세요? ”

“ 아, 네. ”

커피를 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남자가 한 손에 커피를 들며 다가왔다.
고운 빛깔을 뽐내는 커피가 얼음까지 찰랑이자 안 그래도 탔던 목이 더더욱 타들어 갔다.

“ 여기요. ”

“ 감사합니다. ”

세상에 손도 이쁜 사람이다.
원래 나도 이러지는 않는데 자꾸만 남자한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누가 티비에서나 볼 것 같은 사람에게 시선이 안 가겠나.
이건 엄연히 정당한 일이지...

“ 카페 일은 해보신 적 있나요? ”

“ 아뇨.. 카페는 처음입니다. 다른 디저트가게는 해봤는데. ”

“ 다른 디저트 어떤거요? ”

“ 아이스크림이라던가.. ”

형식적인 질문들이 오갔고 나는 타는 목을 커피로 적시며 하나하나 나름 성의를 담아 대답했다. 시급도 거리도 최고로 안성맞춤이었다.
제발 제발 나를 뽑아줬으면 해서 팀플 발표 때도 안 하는 미소를 얼굴에 장착했다.

“ 내일부터 오실 수 있나요? ”

“ 네, 완전 가능합니다. ”

“ 하하 의욕이 넘치시네요. ”

“ 뭐든 시켜만 주세요. ”

남자는 살풋 웃으며 흰 테블렛 화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한 번 더 유심히 제 자소서를 확인하는가 싶어 가만히 기다렸다.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역시나 어제의 그 남자가 틀림이 없었다.
남자는 기억 못 하는 듯 싶었지만 이쪽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애초에 저런 사람을 잊는 거 자체가 훨씬 어려운 일이 아닐까.

‘ ...민도지 ’

남자를 관찰하던 중 흰색 셔츠 위 검은색 네모에 눈이 갔다.
남자의 왼쪽 가슴팍에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는데 그곳에 Min Doji라고 적혀있었다.
도지, 도지 어딘가 귀여운 느낌이 드는 이름인데 남자와 안 어울리는가 싶다가도 착 맞는 이름 같기도 했다.
다소 미쳤나 싶긴 하지만 화면을 들여다보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남자는 어딘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 음, 네. 정 현씨? ”

“ 아! 네네 ”

“ 나름 비슷한 알바도 해보셨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 채용하겠습니다. 일하시면서 곤란한 일이나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요. ”

방긋 웃으면서 ‘채용’이라는 말을 내뱉는 남자는 당장이라도 저 등에 흰색 날개가 삐져나올 것 같았다.
지각을 했는데도 채용해주겠다니.. 오늘 있었던 불행에 대한 보답인가.
차마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느슨하게 웃자 남자, 사장님은 그런 저를 마치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응? 귀여워?

짝-

“ 정 현씨?! ”

“ 아...하하 괜찮습니다. 너무 기뻐서 아하하 ”

나도 모르게 제 손으로 볼을 때리고 나니 아릿한 감각과 함께 수치심도 몰려왔다.
갑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본인 따귀를 때리니 얼마나 놀랐을지 괜히 사장님에게 미안해졌다.
아니 그것보다 귀엽다니 정 현 네가 이제 종강했다고 맛이 갔구나.
시험 준비도 잘 안 했으면서 스트레스라도 받은 거니.

“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볼이 빨간데.. ”

“ 아, 네 정말 괜찮습니다. 원래 잘 빨개지는 터라..약하게 때렸는데도 이런 거예요. ”

“ 그래도.. 아. ”

사장님은 갑자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아, 라며 짧게 말하더니 자신이 마시고 있던 유리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내 볼에 찰싹 가져다 댔다.

“ ..차가! ”

“ 놀랐어요?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 ”

“ ..감..사합니다. 덕분에 볼이 덜 아프네요. ”

확실히 아릿했던 볼이 서서히 식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좋기는 했지만.. 사장님 커피로 이러고 있는 것도 그런데 계속 사장님의 손을 빌려 냉찜질을 하는 건 몹시 이상했다.
그래서 빠르게 사장님의 손과 살짝만 겹쳐 직접 컵을 잡았다.

“ 제가 할게요. ”

“ ... ”

커피를 들고 있어서 그런가 차가운 손이 아주 약간 움찔거리더니 이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조금 어정쩡 하지만 사장님에게 커피잔을 돌려드리고 내 커피잔을 들어 볼에 가져다 댔다. 눈을 도로록 굴려 어색하게 웃고 있자 사장님도 마주 웃어주었다.

“ 저는 민도지입니다. 사장님, 도지씨, 도지형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알바생이 현씨 밖에 없어요. 많이 힘들기도 할 텐데 ..너무 힘들면 말해주세요. ”

“ 감사합니다. 근데.. 알바면접을 저만 본 건가요? ”

“ 아뇨. 알바 면접은 꽤 있었습니다만... ”

“ ..? ”

그럼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덜컥 채용된 거지?
솔직히 지각을 했다는 것이 사소해 보여도 크나큰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첫인상이 엉망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은 그닥 카페에서 일해본 경험도 없었고 첫인상도 구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주 이상하고 최악이고 그러지 않는 한 자신이 이렇게 덜컥 뽑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의아함에 사장님, 도지형을 보자 도지형은 돌아온 제 잔을 손으로 요리조리 돌리다가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나와 눈을 맞춰 오는데 잘생겨서 그런 건가? 심장 주위가 간질거려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휘어지는 눈을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 현씨가 딱 마음에 들어서요. ”

“ 제가요? ”

“ 네, 정말로요. ”

낯간지러워지는 말에 뒷목을 긁적이는데 그럼에도 도지형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아침에 먹은 매운탕의 여파가 아직까지 이어지는 건지 계속 속이 간질거려오는 것 같았다.

“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 그래요. 내일 봐요. 현씨. ”

“ 네, 어.. 도지형. 채용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

“ 하하.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

그렇게 인사까지 하고 카페를 나와 기지개를 켰다.
과정은 안 좋아도 결과가 좋았으니 좋은 거다.
이유야 잘 몰라도 이것도 다 능력이니만큼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뽑힌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이때 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수업은 종강했지만, 다른 어떤 것은 개강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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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6-08 20:19 | 조회 : 1,112 목록
작가의 말

오랜만입니다. 요새 타사이트에서만 주로 연재하고 폭스툰에는 영 오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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