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맑은 물에 피가 섞여서(2)

역시 한참 자고 또다시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밖은 컴컴했다.

“양 하나.. 양 둘...”

어릴 적 방법으로 양을 세기 시작했다. 노곤에 찌든 흐리멍텅한 눈빛이 방안을 헤맸다. 윤은 무언가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새, 생각해보니 내가 여기서 자면 은가람은 어디서 자는 거야?”

예를 들어 숨겨진 비밀 방이 있다던가, 아니면 거실 바닥에서... 횅하니 덜덜 떨면서 자는 그런 건.. 아니겠지..?

“끄응... 내가 밖에서 자야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 이 폭신한 침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윤은 이불을 끌어안고 숨을 들이켰다. 가람의 내음이 났다. 아아, 좋은 냄새였다. 무감각한 듯한 이 내음을 계속 맡고 있으면 마치 홀릴 것 같은 달콤함에 도달하게 된다.

맑고 푸른 물에 스며든 붉은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를 연상시켰다. 그들에게 피란, 달콤한 사탕과도 같은 것.

뭐, 그렇다고 가람이 뱀파이어라는 것은 아니였다.

이 세상에 뱀파이어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윤, 변태같아.”

“아니거든.. 어억?”

아무 생각 없이 들리던 목소리에 대답하던 윤이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이불에 파뭍고 있던 얼굴을 들어올렸다.

“은가람? 왜 온 건데?”

“내 방이라서 온 거야. 뭐가 이상해?”

따지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겨있었기에 윤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밖에서 잘게.”

“그럴 필요 없어.”

“무슨 말이야?”

“침대는 넓잖아, 윤아.”

가람은 낮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팔을 짚었다. 점점 들이대는 은가람 때문에 거의 침대에 눕듯이 엎어졌고, 가람은 바로 내 코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그 낮짝부터 치워줄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결이 볼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는 오롯이 나를 담고 있었다.

“싫은데.”

마치 노래하듯 감미로우면서도 덫을 놓는 거미처럼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침대를 짚고 있던 손이 내 허리를 짚었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고, 헐렁한 병원복은 몸을 가릴만한 게 되지 않았다.

“윽-”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하는 거야!

“저리 가!”

이상하잖아, 이런 거. 이번에는 잘 모르겠다. 이 눈물이 생리적인 거부감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눈물인건지.

평소처럼 뿌리치고 침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가람에게 손목을 채였다.

“시발... 뭐하자는 거야..”

“뭐하자는 것 같아?”

“내 알 바 아니야.”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런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것인지.

가람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결국 다시 닫았다. 원래의 장난스러움은 어디갔는지 진중해보였다. 아니, 진중하다못해 서글퍼보였다.

“...윤아..”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뻥끗거리기만 하다가 무겁게 입을 땐 첫 번째 단어는 내 이름이였다. 그리고 흘러나온 말은.

“가지마...”

마치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에 불과한 말이였지만 왜 나에게는 그 말이 와닿았던 걸까. 면상이 번지르르해서? 글쎄.

마치 나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꽉 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마도 그는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가람.”

“...”

“가람아.”

막상 운을 떼고 나니 다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은가람도 이런 느낌이였을까?

“...네가 아마 나에게 느낀 감정은 너와 내가 비슷해서 느낀 감정일거야. 동지애, 라고 하는게 맞을걸?”

“...”

“아마 너는 그걸 사랑이라고 느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닌걸.”

정말로? 정말이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지? 허구뿐인 감정? 그저 사랑이라고, 타당하다고 믿는 이유를 대며 사실 허구의 감정에 불과했다는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 감정은..

“모든 것은 착각이야.”

윤의 마지막 말.

파사삭

세계가 무너져내렸다. 어차피 나의 세계라고 해봤자 이 녀석 하나 뿐이였지만, 그마저도 깊은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다.

공허는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런가.. 착각, 이였던거구나.”

가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윤을 품안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윤은 거의 도망치듯 거실까지 달려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찌릿하고 아파오는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심장박동이 빨랐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저 침대에 누웠다. 풍성하고 폭신한 침대는 ‘항상’과 같은 감각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가람은 그 ‘항상’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운적이 없었다. 그래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신기했다. 손등으로 닦자 염분이 얼굴에 스며들었다.

“...불쾌하네.”

말하고 싶었다.

이 감정은 착각 따위가 아니라고.

*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짜증나...”

은가람은 저모양이고, 내 목숨은 능력자 조직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다가 나에게 돌아갈 곳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더럽게 짜증나..”

이 상황이,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전개가 쓸데없이 빨랐다. 그 전개를 겪고 있는 나조차도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러면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잖아...

소파에 드러누워서는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쳐다보았다. 아슬아슬했다. 마치 지금처럼.

*

콰앙-

폭발음이 들리며 사방이 뒤흔들렸다. 길다란 창을 가진 여자가 위태롭게 폭발을 피해가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허공에서 몸을 지탱하기 힘들 때마다 창의 길이는 길어져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훈련은... 잘 되어가고 있네요.”

“그렇지? 나르샤는 정말로 강해.”

“그렇네요. 정말 말그대로 나르샤군요. 비상한 머리와 날아오르는 듯한 체술, 거기다 능력까지. 대단한 아이에요.”

시나브로는 라이트를 굴려 담배를 입에 물고는 숨을 길게 들이내쉬었다.

“그나저나 바림님, 너무 나르샤만 신경쓰는 거 아니에요? 실험 샘플 받으러 왔는데.”

그의 말에 턱받침을 하고는 넋이 나가서 전투장면을 쳐다보던 바림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담배 나가서 피우라고 전에 일렀을텐데. 샘플은 여기.”

바림은 서랍장에서 샘플을 던져주고는 그를 내쫓아버렸다. 얼떨결에 쫓겨난 시나브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샘플을 주머니에 넣었다.

깔끔하게 밖으로 내보낸 바림은 다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르샤의 전투를 바라았다.

대충 10살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저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여자의 전투를, 그것도 다리를 꼰채 지켜본다는 건 다른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바림은 달랐다. 어렸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만큼 올라올 수 있었다.

“나르샤는... 강하구나.”

안됐어.

그녀는 길고 팡 퍼진 물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볼펜을 까딱거렸다.

전투능력 : S
순발력 : A
체술 : S
안정성 : B
팀워크 : F

그렇게 기록하고 나서, 바림은 이미 몇 개나 먹어서 사탕껍질이 가득한 책상위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다 좋았지만 팀워크 하나는 끝내주게 안되는 여자였다.

이미 그녀와 함께 훈련을 시작한 팀원들은 바닥에 널부러져서 지친 상태였다. 화면을 뚱하게 바라보며 사탕을 오독거리던 바림이 시뮬레이션을 멈추었다.

“계속 그런 식이면 S-class는 실격이야.”

뭐, 개인적으로 실격해줬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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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24 23:07 | 조회 : 1,036 목록
작가의 말
하젤

결국 소설을 올리고 만 하젤씌... 힘들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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