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맑은 물에 피가 섞여서(1)

윤이 눈을 뜬 것은 가람의 집에서였다. 어차피 윤이 자신의 집으로 가고 싶어할 리가 없었기에 가람이 집까지 업고 온 것이였다.

“드디어 일어났네. 꼬박 하루동안 잤어, 너.”

TV 리모콘을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면서 소파에 뒹굴던 가람이 말했다. 윤은 잠시 상황파악이 안된 건지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뎅, 하는 소리가 머리에 울리는 순간 그는 입을 살짝 벌리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성윤, 이 멍청이가... 저 녀석에게 업힌 채로 곯아 떨어져 버리다니.’

자신을 자책하며 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

“내 집.”

“가족은?”

“다른 데에서 살아. 나는 자취고.”

으음. 윤이 작게 내뱉었다. 여전히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던 어제의 고통보다 백 배는 나았다.

그는 자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취방 치고는 제법 크네? 방도 2개에 거실, 화장실. 필요한 건 다 있는데. 이정도면 그냥 가정집이잖아.”

“우리 집이 고만고만한 부자가 아니라서 말이지.”

“아, 예.”

윤은 입을 삐쭉이며 소파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부럽다, 라고 그는 느꼈다.

윤에게 ‘우리 집’이라고 말 할 만한 집 따위는 없었다. 재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윤이 17세라고 해도, 속은 그저 사랑을 받지 못한 애어른에 불과했다.

그런 윤을 잘 파악하고 있는 가람은 싱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윤은 잠깐동안 그 따뜻한 손길을 느끼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서는 손을 내쳤다.

아무리 사랑을 못 받았어도 그렇지. 네놈한테 강아지 취급은 당하고 싶지 않거든.

가람은 열심히 자신을 쏘아보는 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인가, 아직이네.

옛날에 만났을 때 만큼이나 하얀 순백의 청미한 꽃. 수많은 꽃들이 드리운 들판에 홀로 작게 피어있는 꽃. 꺾이고 밟혀서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꽃

그래서 더 홀리게 되는 꽃.

언제쯤 너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왜, 뭐... 내가 뭘 잘못했냐?”

괜히 우울해진 미소에, 윤은 조금 당황해서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가람은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채 짧은 정적이 흘렀다.

결국 윤은 자신이 내친 가람의 손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제 머리위에 올렸다.

“..?”

가람은 겨우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그러나 감추었다고 해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보고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내리깔았다.

“손.. 쳐내서 우울한 거 아니였어..?”

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아”

가람은 그제야 깨달은 듯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윤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고는 귀 뒤로 넘겼다.

"그럼 사양 않고 쓰다듬도록 하지"

머리카락을 사르르 뒤로 넘기던 그가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기었을때, 멈춰버리고 멀았다.

귀까지 이어진 볼의 새하얀 살결이 보이자 그는 표정을 굳혔다.

“너...”

하얀 뺨에서 목 선을 타고 내려가는 곳에 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분명히 가족에게서 떨어져서 입원해 살았을텐데 어째서?

가람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윤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억지로 웃었다.

“뭔데, 이건.”

"..."

윤의 성격 상 자해라도 할 녀석은 아니였고, 그렇다고 병원 측에서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간호사나 의사를 믿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대체 누구지?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른 것만 같은 흔적이였다.

가람의 표정히 한층 더 싸해졌다.

“...자러 갈래. 어지러워.”

윤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서 가람의 손을 뿌리쳐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며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무언가 결연해 보였다.

“뭘 숨기는 거야.”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윤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 그는 알고 싶었다. 감히 자신의 윤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찾아내면 똑같이 목을 졸라서 죽여버릴 터였다.

“놔”

“안돼. 말하고 가.”

“놔라니까!”

윤이 버럭 소리쳤다. 가람은 놀라서 손을 빼고는 꽉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다시 붙잡지는 않았다.

미움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련하게도 가람의 손은 윤이 가고 나서, 허공을 잠시 휘젓다가 소파 위로 떨어졌다. 어째서 알려주지 않는거야. 착잡한 목소리와 함께.

*

‘은가람한테.. 소리쳤어’

윤은 방에 들어와서 침대 이불 속으로 꼬물거리며 기어들어갔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쳤다. 쓸데없는 변명이야.

“개새끼...”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말았다.

저 녀석도 나를 때리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이 낯선 방문이 열리면서 골프채를 든 아버지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윤은 멍이 든 목에 살짝 손을 올렸다. 눈앞이 핑, 돌면서 뿌옇게 흐려졌다.

“싫어...”

낯선 방, 낯선 공기.

‘내 방이 내 방이였던 적은 없었어.’

태어났을 적의 감각은 딱 그랬다. 내가 왜 태어났지. 정말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았다. 다른 아기들처럼 앙앙 울어대고 싶지도 않았다.

울지 않는 아이, 그게 성윤, 나였다.

내가 속한 집은 잘 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아닌 평범한 가정이였다. 하지만 내가 5살이 될 무렵,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집에 사촌 형이 놀러왔을 적, 형은 나에게 계속 장난을 쳤다. 발음이 어눌하다며 놀리고, 걸어가다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너무나 화가 났다. 다른 애들처럼 눈물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죽어’

고작 5살짜리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온 말이였다. 그 순간, 나는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사촌 형이 죽은 후였다.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사촌 누나는 다른 말 없이 나를 지목하며 엉엉 울었고, 나는 멀뚱히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나조차도 주체 못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능력은 그 처음의 믿음을 단번에 박살내버렸다.

“괴물.. 내가 괴물을 낳았어..”

“죽어! 죽어버려!”

그날부터 부모님은 변해버렸다. 무슨 말만 해도 손찌검을 하고, 발로 찼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포기해버렸다.

살기가 싫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이끌리는 데로 살았다. 그때의 나는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이 사회의 부조리, 범죄, 뇌물수수, 빈곤, 본채 만채하는 정부와 경찰.

세상의 모든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언제나 힘들었고 언제나 괴로웠다.

내가 보는 세상은 그야말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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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23 11:30 | 조회 : 999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윤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크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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