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은은한 강(3)

“뭐? 아니, 잠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유리조각 덕분에 링거 줄이 잘렸다. 그냥 차라리 링거 바늘을 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대로 잡아 뜯어버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거 제법 아프구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빼더니.

욱씬거리는 손등을 잡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깨진 창문 곳곳에 푸른 벽이 쌓였다. 반투명한 벽은 마치 가두려는 듯 식물 넝쿨의 형태로 방 곳곳을 애워쌌다.

“그럼 윤아,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그걸 나한테 물어서 어쩌자는 거야? 저것들 상대하고 여기 온건 너잖아!”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더니 가람은 슬쩍 깨진 창문 쪽으로 몸을 틀면서 말했다.

“너는 모든 것을 알잖아. 이 상황을 회피할 방법도 알고 있으면서.”

“...그딴 거 몰라.”

“시치미 때지마. 모를 리가 없잖아? 이런 상황까지 다 머릿속으로 계산해 뒀으면서 짐짓 놀라는 척하기는.”

하, 참. 정말이지, 못 당해내겠다.

그 ‘저주’ 덕분에 나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 아니 예견해 두었다. 회피할 방법 정도야 몇 십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그 ‘저주’를 사용하면..

“너는 날 죽이고 싶은거야?”

“설마.”

“남들은 모르는 내 지식을 지금 여기서 까발려라고? 내 몸이 버티지 못할거야. 적어도 회복 버프 정도는 받아가면서 밝혀야 한다고.”

가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말을 내가 하지 않았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하지 않잖아!

시간이 없었다. 방어벽은 거의 다 구축이 완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가람의 말을 토대로 하자면 아마 적은 곧 들이닥칠 것이다.

‘은가람의 능력이 뭐더라..’

생각해보면, 꺼려져서 그를 피했던 기억 뿐, ‘괴물’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이라면 이 ‘저주’와는 완벽하게 상극인 능력이라는 것.

그래서 이를 사용해서 ‘저주’를 깨려고 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다. 최대한 다른 영향은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자신의 능력을 조사해 달라고 가람에게 부탁해 뒀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특징은 밝혀내지 못했다.

내 ‘저주’와, 그의 ‘괴물’처럼,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 능력이 어느 속성인지, 어느 마음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째서 그 사람에게 가게 되었는지 아마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는 큰 리스크가 따른다는 점.

그래서 능력자들은 보통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간단한 체술이나 호신술을 배워두는 편이다. 물론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물의 죽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죽음? 무슨 상관이야. 다 흘러가는데로 죽으면-

“윤! 정신차려! 어떻게 할거냐고 묻잖아.”

우왁, 깜짝이야.

“아아, 아. 미안. 잠깐 생각하느라고.”

“너 지금 태평하게 생각할 때야?...아, 젠장.”

가람은 따지듯 나무라다가 작게 욕을 내뱉으며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병실 바깥에서였다. 만약 의사나 간호사라면 외부로부터 막혀서 나갈 수 없는 우리를 밖으로 잡아 끌어 줄지도?

작은 희망을 품고(적어도 나는. 욕을 쓴 것 보니 아마 가람은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우리 두 사람은 문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는 웃긴 일이였다만.

드르륵, 하고 병실 문이 열렸다. 새하얀 의사 가운이 보였다.

“아! 저기-”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다가가려고 했는데 가람이 뒷덜미를 잡고는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뒤로 숨겼다.

“야, 잠깐만. 왜 그래?”

“닥치고 있어봐.”

“어..”

한 번도 나에게 욕이라는 걸 하는 가람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왠지 살짝 서럽기도 한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윤은 못 넘겨. 전처럼 시끄럽게 굴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빨리 사라져.”

의사는, 아니 의사로 보이는 청년은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검지로 치켜 올리더니 씨익 웃었다.

“역시, 그 아무리 강하신 분이라도 지킬 것이 있으면 약해지는 법이지요.”

지킬 것? 대충 이 구도로 생각해보면 가람이 지키고 싶어하는 게 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왜? 나에게서 무엇을 얻고 싶어서?

생각해보니 그런 건 고민해본 적 없었다. 가람은 대체 왜 나를 돕는 것이지?

“시끄러워. 말했지, 헛소리 씨부릴거면 꺼지라고, 새끼야.”

“에헤이, 에헤이. 진정하세요. 싸우려고 온건 아니라고요?”

“무슨 소리야. 저 자식 지금 완전 무장하고 왔어. 이 벽은 어떻게 해명할 건지, 그리고 지금 깨진 창문 밖에서 대기타고 있는 저 3명은 누군지 말해야 할거야.”

대충 가람에게 한마디를 거들어주자마자 나약한 몸에서 바로 반응이 일었다.

목이 따끔거리더니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채웠다.

“우읏-”

한모금 정도 되는 피가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그 모습에 가람은 당황해서 야, 를 연거푸 소리치며 계속 피가 흘러나오는 내 입을 지혈하듯 틀어막았다.

“호오~ 능력을 쓰면 어디가 무너지는 모양이네요. 생각보다 완전 이상적인 실험체는 아니였네요, 성윤 군.”

“큽, 너 어떻게 내 이름을..”

“야, 말하지 마! 피가 더-”

가람이 꽤나 다급하게 자신의 후드 점퍼로 피가 흐르는 것을 닦고, 받쳐주었다.

어떻게 보면 저 의사 가운을 입은 자식은 나름 대화를 하러 온 것 같았는데 내 각혈로 인해 소외되고 있었다.

저런, 불쌍해라.

가 아니라. 썅, 하나도 안 불쌍해. 좀 있으면 바로 태도 바꾸고 죽이려고 들 녀석이다.

창문 밖의 3명이 왜 있겠는가? 여차하면 들이닥칠 기세다. 아마 이 가운남은 시간이라도 끌라고 명령 받았을테지.

이럴 때 보통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회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때, 가람이 나를 휙 뒤로 들쳐 업으면서 말했다.

“네가 여기서 우리에게 뭘하든, 우리는 탈출할 예정이니까 다치기 전에 비켜. 3초 준다.”

“에엥?”

“1초”

“잠깐, 잠깐만요!”

“2초!”

3초는 개뿔, 그는 직접 가운남에게 메롱을 선사하고는 그대로 병실 문을 향해 달렸다. 이미 가운남이 열어놓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게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고 (애초에 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병실을 탈출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밖으로 나가자마자 가람은 할말을 잃어버렸다.

“...성윤.. 너 이건 왜 말 안했냐?”

“너 진짜로 내가 죽길 바랬구나?”

“그거랑 별개잖아! 차라리 창문 밖 녀석들 말고 이 복도를 가득 매우고 있는 기관총 든 자식들을 먼저 생각해라고!”

아, 예에~ 잔소리 심한 녀석.

나는 피가 묻은 그의 후드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반쯤 감고는 속삭였다.

“어차피 너라면 이것들은 쓸어버릴 수 있잖아.”

“너 정말..”

“그럼 난 좀 잘게. 나름 환자라고.”

가람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를 제대로 들쳐 업었다.

“그럼, 제대로 업혀 있으라고.”

“네가 떨어트리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뭘로 그렇게 확신하는 건지, 하여튼 근자감 하나는 끝내준다. 하지만 평범하게 알고 있는 그런 뜻의 근자감은 아니였다. 그러니까...

근거 있는 자신감

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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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20 09:36 | 조회 : 982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아 미리 말씀드릴게요! 저는 자유연재 전문이랍니다(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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