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은 가볍게 색기 어린 웃음을 흘리더니 내게 들이밀었던 자신의 얼굴을 뒤로 물렸다. 오랜만에 봐서 몰랐는데 여럿 꼬시고 다녔을만한 얼굴이였다.
매끄러운 턱선, 립스틱은 물론이고 립밥조차 안 발랐으면서 윤기가 흐르는 분홍빛의 입술, 적절하게 위치한(?) 코,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멍한 눈, 짙은 색의 매력적인 검은 머리카락.
마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비주얼.
“왜 그렇게 빤히 봐? 반했어?”
“그런 옛날 멘트는 때려치워. 그런 얼굴에 그딴 멘트라니, 하나도 안 어울- 우읍”
난데없이 틀어막혀진 입에 나는 놀라서 멍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입 속에 말캉한 느낌이 들면서 쓸데없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 흡-”
가까스로 멘탈을 붙잡아서 그를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지만 오히려 손목을 잡혀버렸다.
입안을 가득 매우는 내 것이 아닌 혀가 온갖 곳을 훑고 다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깨달았다.
꽈득-
“악!”
가람이 화들짝 놀라서 내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때며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럴만도 하지. 얼마나 센 강도로 깨물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깨물릴 짓을 했잖아!
“하아-”
겨우 참아야 했던 숨을 연신 내쉬며 손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겉으로는 아무런 당황함 없이 행동했지만 사실 속은 달랐다.
‘젠장, 저 미친 자식이!’
‘내 첫키스를...!’
‘미친 새끼! 진짜 또라이야!’
‘하지만 기분은 좋았어.’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마지막에 생각난 하나의 감정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굴이 화끈화끈 거렸다.
내가? 기분이 좋았다고? 저런 미친 놈의 키스가..?
“뭐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반한 것 같았는데.”
가람은 내 턱을 붙잡고 두 눈을 마주쳤다. 혀를 깨물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어, 라며 그는 비릿하게 웃음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새빨간걸까, 우리 윤이는?”
“...우리 윤이라고 부르지 마, 이 더러운 자식이.”
나는 턱을 붙잡은 그의 손을 세게 때렸다. 가람은 처음부터 져 줄 생각이였던 건지 그대로 손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너야말로 학교 안가? 고2잖아. 바쁠 때 아니야?”
“아, 그거~”
학교에게 그거라니. 쓰레기에게 그거라니. 과분하잖아.
보통 아이들이 말하는 재미없는 학교, 나에게는 그 의미 이상이였다. 쓰레기 같은 학교. 어차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굳이 그런 걸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툭하면 견디지 못한 몸이 이상증세를 일으켰고, 결국 보건 선생님이 직접 나를 병원에 쳐박아버렸다.
하지만 병원도 나쁘지는 않았다.
나를 경멸하는 부모에게서도 떨어져 지낼 수 있었고, 쓰레기 같은 수업과 반 애들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금 심심한 것을 제외하고는 병원이라는 건 정말로 좋았다.
아니, 쓸데없이 너무 오래 회상해 버렸구나.
“학교 말이지... 여자친구 병문안 간다고 빠졌어.”
“여자 친구? 이 미친 새끼가. 여친 있으면서 이런 짓을 해?”
넌 그 여친 분한테 무릎 꿇고 사과해야해. 왜 니 사랑 일에 나까지 끌어들여? 여친도 있는 주제에.
“왜, 질투해?”
“질투는 그 여친 분이 하게 생겼다.”
“내 여친 너잖아.”
“무슨 헛소리- 뭐?”
이게 아주 적극적으로 꼬셔보겠다, 이런 건가? 굳이 이런 병실에서? 무슨 피폐물도 아니고. 게다가 나는 남자거든?!
“야,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냐? 장난이야, 장난.”
“개새끼...”
“칭찬 고마워.”
가람은 병실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자신의 옆에 손을 두들겼다. 그쪽에 앉아란 소리겠지? 하지만 저런 놈 옆에 앉았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저건 아직이야...’
아직은 불안정한 숙주였다. 잡아먹히는 건 나중에.
아니, 나중에도 싫어!
나는 그의 손짓을 깔끔히 무시한 채 벽에 기대어 섰다. 링거를 꽂은 손이 벽에 살짝 부딪히는 바람에 조금 얼얼했지만.
“그래서. 10년간 여태껏 찾아오지도 안았으면서, 대체 무슨 심보야?”
가람은 내 질문에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방긋 웃었다.
“네가 위험해질지도 모르겠더라고.”
“...뭐? 내가 왜 위험해져?”
나 엄청 조용히 살았는데.
‘모든 것을 아는’ 저주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조용히 입 다물고, 모든 말에 수긍하고 걷어차는 발에 맞아주면서 살았는데.
“정말 미안하게 됐어. 내 실책이야.”
그는 씁쓸하게 하하, 하고 웃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람은 고개를 숙였다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래서?”
“응..?”
나는 담담하게 물었고, 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가 날 위협하게 됐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다.
부모? 친구들(이란 이름의 또라이들)? 선생? 대체 누가 나를 위협하게 된거지? 나는 누구로부터 위험한거지?
상관 없었다.
그런데,
“..그러니까-”
와장창-
가람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자마자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깨졌다. 순간적으로 바깥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다수의 살기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깨진 창문 때문에 유리조각들이 손등을 햘키고 지나갔다. 나는 당황해서 곧장 자세를 낮춘 후 침대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는 비오 듯 자신의 뒤로 쏟아지는 유리조각들을 그대로 맞으며 말했다.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