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은은한 강(1)

“윤아!”

스스럼 없이 다가오는 목소리. 짙은 검은빛 머리카락의 아이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은가람..이였나.”

“응! 용케도 내 이름 알아줬구나, 고마워.”

가람은 상냥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에 답해줄 수 없었다. 일곱 살의 나에게 너무나도 빨리 배워버린 현실은 차가웠다.

그때의 나는 태어난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왜 나에게 말을 건거야?”

그에게 웃으며 답하기에는 이전의 일이 불우했다.

아직도 몸의 군데군데에 남아있는 멍자국은 일주일이나 흘렀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스칠 때마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라는 듯.

가람에게 물었던 왜, 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였다.

나와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 거야, 라는 말의 간접적인 왜 였다.

“그거야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나에 비해 가람은 가볍게 대답하고 나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또 평소대로 그의 손을 내쳤다.

“내가 싫어..?”

금세 꼬리를 내리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데, 원래는 금빛이 살짝 섞인 갈색 눈동자가 마치 붉게 물든 것만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붉다.
붉은 것이 흘러내린다.
발치에 고인다.
흥건하게 온몸을 적셔온다.

“우읍-”

급하게 입을 가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저것’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가는 정말이지, 그 앞에서 속을 개워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은가람...”

뒤에서 집요하게 따라붙는 일곱 살짜리 꼬마 아이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일곱 살짜리의 나는 구석을 찾아 웅크렸다.

‘저게 뭐야...’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저것’은 처음이였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머리칼의 검은빛처럼 어두운 막이 눈앞을 가린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은 맹수의 붉은 눈동자였다.

그때, 코에서 뜨끈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주륵 흘러내렸다.

“아..”

손으로 슥 닦아내니 피가 묻어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코피라니, 정말 도움되지도 않는 몸이다.

“어머, 윤아, 코피가..”

유치원의 도우미 선생님이 휴지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와 내 코를 막았다. 하지만 뭐, 그래봤자 아무 도움 되지 않을 것이였다.

“선생님, 이 코피 그렇게 해봤자 안 멎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윤아. 이렇게 하면..”

“됐어요.”

나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휴지를 밀어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피가 나도록 내버려두세요.”

“..윤아, 왜 그래..?”

평소에도 남에게 차가운 나였지만 이렇게까지 어른의 말을 거부해본 적이 없었기에 선생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억지로 휴지를 코에 가져다 대려고 했다.

끝까지 오만한 여자였다.

“선생님, 치우세요.”

나는 나긋하게 말하며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지식의 끄트머리를 전달했다.

“..!”

어차피 이런 지식 따위 선생님이 얻든 말든 상관 없었다. 그 지식들은 내가 아닌 이상 공기 중으로 분해되버릴테니까.

“으윽-”

선생님은 머리를 움켜쥐면서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을 덜덜 떨더니 나에게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괴.. 괴물..”

그래. 그게 평범한 반응이지.

*

성윤, 내 이름이다. 그리고 지금 17년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져있다.

“시발..”

“우리 윤이는 아직도 성격이 그대로야. 그치?”

어릴 적의 기억을 새록새록 유발시키는 짙은 검은빛의 머리카락. 젠장, 말만 새록새록이지, 나는 오늘로 죽게 생겼다.

어느 때와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내 안을 탐하듯 설레발치는 감정에 손을 뻗어 매만지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무 문학적으로 말한 것 같다.

쉽게 설명하자면, 음흉한 눈빛이라고 말하는 게 맞지 않을까?

“너도 그대로야, 은가람.”

여전히 그 이름이 안 어울릴 만큼 잔인하구나.

“어떻게 오랜만에 본 친구를 칼로 찌를 생각을 해!”

뭐, 사실 친구는 아니였지만 이에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그냥 친구라고 치자. 하지만 친구라는 사실과 별개로, 여기는 병원이며, 나는 환자고, 저 자식은 외부인이였다.

목이 말라서 정수기에 물을 마시러 가기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저 자식과 그대로 마주쳤고, 잠시 추격전이 벌어졌다.

나름 숨이 넘어갈 때까지 달렸지만 환자인 나는 링거까지 꽂고 있었고, 그는 달리기가 빨랐다.

잡히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일부로 따라오기 힘들 것 같은 진료실까지 쳐들어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바로 문 앞에서 그에게 막히고 말았다.

온갖 난리를 피운 외부인이 잘생겨서인지 간호사분들은 되레 그의 말만 믿고- (그러니까 내가 잠시 히스테릭을 보였다나 뭐라나로 둘러댔다.) 생전 처음보는 외부인에게 나를 병실까지 데려다 줘라는 중책을 맡겼다.

말만 데려다 주는 거지 끌리다 싶이 해서 돌아간 거긴 하지만.

“칼이라니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는 은근슬쩍 품에서 꺼낸 커터칼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베시시 웃고는 눈을 예쁘게 접었다.

“그나저나 고2가 학교는 안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넌 눈이 삐였냐? 나 병원복 입고 있다고. 환자야.”

“미안 미안, 코스프레인줄.”

하, 죽일까 진짜. 저걸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몇 년 만의 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친근(?)하게 말을 섞을 수 있는 것은 꾸준히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시작은 은가람 저 자식의 놀리는 듯 한 말투의 문자 한마디였다.

“코스프레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냐?”

“글쎄다. 하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인정했네?”

“득츠, 이 시키야..”

이를 악물고 대답했더니 그제야 가람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났다. 흥, 굳이 이렇게 위협적으로 굴어야지만 그렇게 빠지는 거야?

여전히 야비하네. 그때도 일부로 날 자극했던 거면서.

“은가람, ‘너’를 찾는 건 아직이냐?”

“글쎄.. 이 안의 본능이 널 향한다는 사실은 찾았- 아니, 아니다. 미안.”

가람은 또다시 능글거리는 말투로 말하려다가 내 살벌한 표정을 보고 재빠르게 부정했다. 하긴, 그렇게 부정하지 않으면 그때야 말로 내 주먹이 튀어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아직이야. ‘나’를 찾는 건. 하지만 걱정하지마.”

그는 아까처럼 다시 반쯤 눈을 접으며 미소 짓더니 나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너의 그 ‘저주’를 푸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렇지? 숲속의 저주받은 공주님.”

“솔직히 조금 감동했는데 마지막에서 무너졌어.”

그래도 처음에 감동한 게 있으니까 주먹은 안 날리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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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17 23:51 | 조회 : 1,232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질렀습니다.. 질러버린겁니다..! 한번도 써 본적 없었던 BL을 드디어 처음으로 건드려봅니다..!! (((평소에도 bl웹소설 자주 보면서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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