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지막 조각(彫刻)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 ...왜 더 머물게 하려는 거야? ”

알리카가 아빌의 방을 나서자마자 그의 옆으로 붙어오는 아시페로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물음에도 대답이 없는 알리카를 보며 아시페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이상으로 물어오지 않았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한 번 더 물었을 터지만 알리카의 표정을 본 아시페로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곧 알려줄 테니 기다려. ”

“ ... ”

알리카가 제 방으로 들어서고는 책상 위에 놓여 진 마구를 손에 쥐었다.
푸른색의 마구를 문지르자 그 빛이 밝게 빛나다가 빛 무리가 사각형으로 모여들었다.
그 사각형 안으로 그의 수하인 오른이 비추어졌다.

‘ 알리카 후작님,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

오른이 알리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상체를 기울이며 인사를 전해왔다.
무어라 더 축하의 말을 전하려던 오른은 알리카를 보더니 말을 거두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반듯하게 닫혀있던 알리카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 최근, 내가 찾고 있는 티어가 있다. ”

‘ ...흑 사자 말입니까? ’

오른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에 덧붙여 물어왔고 알리카는 이를 긍정했다.

“ 그럼 일단 묻겠다. 오른. 날 도와주겠나? ”

‘ 지시만 해주십시오. ’

오른이 알리카의 말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귀를 기울였다.
알리카는 그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 그리 말해주니 다행이군. 그럼 잠시 아빌 보스켓을 내 곁에 두겠네. ”

‘ ....예? ’

“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

‘ ..예, 헌데 그것이 티어를 찾는 것과 무슨 연관이.. ’

오른뿐 아니라 아시페로도 의문을 느끼며 알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답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리카는 재차 두리뭉실하게 말을 내뱉었다.

“ 흑 사자는 신수다. 당연히 계약 욕심이 났지. 영원한 악연이란 없지 않나.”

‘ ... ’

오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은 알겠으나 어째서 그것이 아빌을 곁에 두는 것과 연관이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오른은 묻기는 했으나 ‘설마’하는 자신의 그 추측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시페로도 얼굴을 와락 구기며 알리카의 말을 답답하다는 듯 초조하게 기다렸다.
침묵을 유지하던 알리카는 아빌에게 불어넣었던 따스한 마력과는 상반되는 냉랭한 마력을 뿜으며 제 입가에 조소를 걸었다.
그 마력에 아시페로도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오른도 시선을 땅으로 내리기 바빴다.

“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려면 원하는 것을 곁에 두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

‘ ... ’

“ ..토벌을 하는 동안 한 가지 가설이 세워지더군. ”

알리카는 그 가설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오른과 아시페로는 직감적으로 그 가설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아시페로는 당장이라도 알리카에게 그 가설이 무엇인지, 제 생각이 맞는지 묻고 싶어 답답했으나 저보다도 더 답답해 보이는 알리카에 차마 묻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여하튼 아빌 보스켓 백작은 백작가에 더 늦게 돌아갈 터이니 관리를 잘 부탁하지. ”

‘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

오른의 말을 끝으로 통신구의 연결은 끊어졌다.
오른은 끊어져 빛이 사라진 마구를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을 따라 찬물을 급히 들이켰다.
멍하니 알리카의 가설을 떠올리다 문득 과거 아빌의 말이 오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더는 호우트가 될 생각이 없다. ’

“설마.. 티어이기 때문에 호우트가 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인가..? ”

그리 생각을 하던 오른이 순간 피가 싸하게 식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또 하나의 가설이 그의 몸 전체를 식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 ‘더는’... ‘더는’ 호우트가 될 생각이 없다고..? ”

떨리는 목소리로 아빌의 말을 곱씹던 오른의 눈동자는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더는 호우트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 과거에는 호우트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지 않은가. 실제로 백작가의 서재에는 호우트 관련 도서들이 반을 차지할 만큼이나 아빌 백작은 호우트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가 가진 많은 욕심 중에는 약도 있고 재물도 있고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욕심을 차지했던 건 호우트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그런 그가 호우트가 되기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제 앞에서 늘 툴툴거리며 누마인 제 신세를 한탄하던 그가 호우트이기를 포기한 이유. 설령 티어였다고 해도 계속 제게 누마의 한탄을 늘어놓았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 아니야.. 아니..설마 그럴 리가 없어.. ”

딱 하나,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을 성립시키는 가설이 그에게서 떠올랐다.
과거에는 누마임을 한탄하고 현재에는 호우트이기를 포기했으며 동시에 그가 흑 사자, 즉 티어로 의심을 받는 의문들을 정리할 단 하나의 가설.
「아빌 보스켓은 정말로 과거에는 누마였고 현재에는 티어다.」
이 웃기는 말을 현실로 만들어줄 감히 생각해서도 안 되는 가설.

“ ...‘금기(禁忌)’ ”

쨍그랑.

오른이 제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구자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신에게 대적하는..어리석은 자들이 깨는 ‘금기(禁忌)’ .. 만일..만일에 아빌 보스켓이 이를 행한 것이라면...”

오른은 급하게 그 생각을 접었다.
이 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금만 더 맞춰 본다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 터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알아낼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사실을 알아낸 자에게 짊어질 무게가 제게는 버거웠고 오른은 부디 이것이 단순히 제 자신의 불순한 오해이기를 바라며 유리를 치웠다.

***

통신구가 끊어지고 아시페로는 차분한 어조로 알리카에게 물었다.

“ 무슨 의미야. ”

“ ... ”

알리카는 아시페로의 질문에 입을 열려던 때 그의 방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가 하니 다름이 아닌 그의 티어 칼리도였다.
알리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칼리도는 그의 방으로 들어왔고 방 밖에서도 느껴지던 냉랭한 마력이 온전히 피부를 스치자 매끄러웠던 그의 미간도 저절로 구겨졌다.

“ 무슨 일이지. ”

“ 아빌 보스켓 백작님의 추가 정보를 알아왔습니다. ”

“ ... ”

알리카가 눈짓으로 보고할 것을 일렀고 칼리도는 이 상황을 황당하게 보고 있는 아시페로에게 눈길을 잠시 주다가 곧 입을 열어 보고했다.

“ 아빌 백작님이 가장 최근에 자주 들렀다는 클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 ..‘랭게스타’말인가. ”

“ 예, 랭게스타는 딱히 큰 클럽이 아닙니다. 생긴 지도 고작해야 3년 된 클럽입니다. 아빌 백작님이 주로 약을 구매했던 것처럼 그 클럽도 약을 주로 다루는 클럽이었고, 물론 클럽이니 만큼 술도 다양하게 들여온다더군요. ”

칼리도의 말을 듣는 알리카는 평소라면 넘겼을 것들을 유심히 들으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했다.

“ -.. 아, 그리고 아빌 백작님이 시가를 받아온 것도 이곳이라고 합니다. ”

“ ..그 말은 마뱃잎을 다룬다는 이야기인가. ”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헌데 이 뿐 아니라 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

칼리도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알리카에게 건네주었다.
종이를 받아든 알리카는 눈으로 내용을 훑다 눈을 가늘게 떴다.

“ ....확실히 그냥 클럽은 아니군. 어떻게 그동안 이런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 했는지 의문이야. ”

종이에 쓰여 진 내용은 다름이 아닌 실종관련 이야기였다.
랭게스타가 생겨나고 3년 동안의 시기에 맞춰 사라졌던 티어들이나 누마들이 모두 랭게스타를 주로 이용하는 단골고객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라지는 이들은 평민들이거나 쇠약한 가문의 사람들이었고 더 기이한 것은 사라지는 이가 평민이라면 그 사람의 가족들도 모두 사라지고 가문의 사람이 사라지면 그 가문에서는 그 자를 내보내 모른 채하거나 실종된 이가 가주라면 모두가 그 가문을 나가거나 어느 순간 몰락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었다.

“ 칼리도 사람을 보내서 클럽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해라. 주로 알아낼 것은 랭게스타가 실종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맞는지, 맞다면 어째서인지 전부 조사해라 약도 조사하면 좋겠군. ”

“ 예,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람을 넣겠습니다. ”

칼리도는 알리카의 명을 듣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칼리도가 방을 나가자 마자 아시페로는 이제는 정말 못 참겠다는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 알리카, 대답해. 네가 생각하는 가설이 뭐야. ”

“ ...아빌 보스켓을 흑 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

의외로 알리카는 별 숨김없이 솔직하게 아시페로에게 말해주었다.
제 생각과 일치하는 가설의 정체를 들은 아시페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 아빌 보스켓은 누마야. ”

“ 아시페로, 너는 퍼즐을 맞출 때 단 한 조각을 남기고 전부 맞아떨어지는 상황에서 희한하게 한 조각이 들어가지 않으면 모든 퍼즐을 어그러뜨릴 건가? ”

갑작스럽게 퍼즐을 언급하는 알리카를 보며 아시페로의 찌푸려진 미간은 더 깊게 일그러졌다.

“ 나라면.. 한 조각을 새로 찾는 게 빠를 것 같군. ”

아시페로는 무어라 더 반박하려 운을 띄우자 알리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어진 표정이 이 이상으로 제 결정을 번복시키려 하지 말라는 듯 아시페로를 짓눌렀다.
아시페로가 아랫입술을 재차 강하게 깨물어 피를 내며 부들거리다 기가 차다는 듯 소리쳤다.

“ 그래! 아빌 보스켓이 흑 사자라고 쳐!! 그럼! 그럼 넌 어쩔 건데! ”

알리카가 흥분한 아시페로를 보다 한숨을 내쉬며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자 아시페로는 그런 알리카를 보다 화를 참으려 방을 나섰다.
분함과 속상함이 엉킨 아시페로의 발걸음은 무겁고 거칠었다.

‘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아시페로의 가문 오퍼는 예부터 뛰어난 티어가문으로 손꼽히는 가문인 반면 알리카의 가문 아르테는 예부터 뛰어난 호우트가문이었다. 두 가문은 서로 맹약을 맺어 오랫동안 협력을 이어가는 가문으로 아르테의 가주와 오퍼의 가주가 계약하여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것이 그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아시페로는 아르테 가문의 주인이 될 알리카를 위해 가문에서 악학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엄한 교육을 받았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정을 받는 뛰어난 티어가 될 수 있었지만 결코 신수가 되지는 못 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신수인 흑 사자를 그가 원한다고 할 때에도 그는 무어라 할 수 없었다.
흑 사자와 제 자신의 차이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아시페로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호우트 없이 맞붙는다면 상처라도 낼 수 있을까 싶은 강대한 흑 사자는 알리카에게 당연히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찾겠다고 했을 때 말릴 수는 없었지만 내심 그가 찾지 못 하기를 바라는 모진 마음이 있었다. 그냥 이대로 자신이 계속 지켜내어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에.
그래서 그는 더욱더 아빌이 흑 사자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정말 그가 흑 사자라고 한다면 자신은 알리카를 막지 못 할 것이고 흑 사자를 향한 그 마음을 알리카 스스로도 언젠가는 알아차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 제발... 제발 아니길.. ’

아시페로는 묵직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부디 아빌이 흑 사자가 아니기를, 설령 맞더라도 알리카가 끝내 알아차리지 못 하길 계속해서 속으로 빌었다.

***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체리바가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다람쥐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저를 보고 있었다.
체리바가 익숙하다는 듯 창문을 열자 다람쥐가 견과류 하나 받고는 제 목에 걸린 종이를 건네주었다.
종이를 펼친 체리바는 곧 칼리도가 보낸 편지임을 알아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 일 끝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또 이상한 걸 물어왔어..하아... 씨.. 돈만 아니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텐데.. ”

체리바가 종이를 폐기 처분하며 다람쥐에게 이번에는 가시로 변형시킨 제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쥐어주었다.
이는 승낙하겠다. 라는 의미로 체리바가 칼리도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체리바의 머리카락을 받아든 다람쥐는 곧 다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고 체리바는 의자에 걸터앉아 시가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 랭게스타.. 찝찝한 기분이 들어. ”

제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느낌을 들자 체리바는 이번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마치 뱀의 입으로 걸어 들어가는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시가를 구겨 꺼트리고 체리바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단련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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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31 16:46 | 조회 : 1,370 목록
작가의 말

오늘은 아빌이 안 나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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