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마지막 조각(彫刻)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 ... ”

“ 반갑습니다. 알리카 아르테 후작님의 티어인 칼리도라고 합니다. 토벌에서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싸움에는 영 재능이 없어 함께하지 못 하고 귀로 전해들은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

칼리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빌에게 조심히 다가왔다.
아빌이 그에 무어라 대답하려는데 제 바짓단을 아래로 계속 당기는 힘에 눈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 엔비가 갑자기 뛰쳐나가서 안 보이기에 한참을 찾았는데-.. 백작님이 돌봐주시고 계셨군요. ”

누가 보더라도 아빌은 그저 길 가다가 엔비라는 토끼에게 바짓단을 붙잡힌 사람에 불과했지만 아빌은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칼리도는 아무 말 하지 않는 아빌에게 선한 얼굴을 지으며 엔비를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콱.

“ ... 엔비? ”

“ ... ”

엔비는 제게 뻗어오던 칼리도의 손가락을 제 이로 세게 물어뜯었다.
아무리 까칠하고 저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엔비지만 이렇게 세게 물은 것은 처음이라 칼리도는 순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칼리도의 손가락을 문 엔비는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동그랗고 예쁜 눈망울로 아빌을 올려다봤다.
멍하니 이를 바라보던 아빌이 칼리도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하하. 엔비가 백작님이 좋은가 봅니다. 저렇게 애교를 부린 건 처음 봅니다. ”

“ ..애교? ”

“ 한 번 안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엔비도 안아달라고 저리 말하는데. ”

아빌은 제 바짓단에 매달린 작은 털 뭉치를 보다 그 몸통을 잡고 들어올렸다.
다정함이나 세심함은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저 투박한 행동이었다.
평소 엔비라면 저런 투박한 손짓에 몸을 비틀거나 소리를 내지르며 화를 냈을 터였지만 아빌의 투박한 손짓에는 그저 가만히 대롱대롱 매달렸다.

“ 허. 정말로 엔비가 백작님을 좋아하나 봅니다. 저 녀석이 저런 애가 아닌데.. ”

칼리도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이를 보다가 곧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는 엔비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빌은 제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따뜻하고 보송한 털 뭉치와 눈을 마주쳤다.
엔비는 그 눈에도 피하지 않고 애교 부리듯 눈을 반짝 빛냈다.

“ ..엔비.. ”

아빌의 낮은 중얼거림에도 엔비는 크게 반응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모습에 아빌은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졌고 칼리도는 아빌이 토끼를 싫어하는 기색이 없어보이자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 백작님,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토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저쪽 들판 쪽에 토끼들 집이 있거든요. ”

“ 흠.. ”

“ 아, 피곤하시다면 .. ”

“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

아빌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자 칼리도도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조금 가까이 지내다 보면 의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지. ’

칼리도는 알리카의 명으로 아빌을 조사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도 아빌에게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전보다 더 세세하게 조사를 해도 아빌의 대한 정보는 큰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기사 한 명을 불러다가 아빌이 토벌 때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마치 제 영웅을 보듯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영웅담을 펼쳤다.
그것이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큰 원인에는 큰 결과가 있는 법이다.
아니 설령 작은 원인에 큰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이 있는 법인데 아빌에게서는 그 원인이 보이지가 않았다.

‘ 간접으로 안 된다면 직접으로 할 수밖에. ’

칼리도는 그를 관찰하던 눈을 거두고 그를 토끼들의 집으로 인도했다.
아빌이 들판에 발을 디디자 상당한 수의 토끼들이 서로 엉켜 붙어 들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아빌에게 향했고 어째선지 그들의 눈망울도 반짝 빛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아빌은 제 팔을 살포시 잡고 이끄는 칼리도에 따라 나무쪽으로 갔다.
칼리도는 나무에 기대앉더니 쫓아온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며 보던 아빌에게 칼리도 빙긋 웃으며 제 옆을 손바닥으로 살짝 두드렸다.

“ 찬 바닥에 풀밭이라 별로시겠지만 앉으시겠습니까? ”

“ ... ”

아빌이 별 말 없이 묵묵히 칼리도의 옆에 앉자 쭈구린 그의 몸으로 엔비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아빌의 다리와 복부 사이 비좁은 품속으로 들어간 엔비는 엉덩이를 씰룩이다 잘 자리 잡은 듯 움직임을 멈춰 그 상태로 있었다.
아빌은 그런 엔비를 보며 생소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 동물들은 다 식량이었는데. ’

전쟁 때 그들은 동물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 동물은 오직 그들의 먹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식량은 부족하고 배는 고프니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은 던지고 잡아먹었었기 때문에 아빌은 제게 이렇게 가까이 오며 애교를 부리는 엔비가 낯설었다.

“ 쓰다듬어 보세요. 무척 부드러울 겁니다. ”

칼리도가 그런 엔비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아빌에게 쓰다듬을 것을 권했다.
아빌은 칼리도의 말에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엔비의 둥근 몸통을 쓸었다.
그 손도 투박하기는 그지없었으나 안아 올렸던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느릿하게 쓰다듬는 아빌의 손길에 엔비가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있자 아빌은 그런 엔비가 다소 귀여워 보였다.

‘ 다시 봐도 놀라운 일이야. 엔비가 저렇게 사람의 손길에도 가만히 몸을 맡긴다니.. ’

그때 칼리도의 손에 있는 먹이는 무시하며 토끼들이 아빌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칼리도가 당황스러워하기도 잠시 토끼들은 아빌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점점 파묻혀가는 아빌을 보며 칼리도는 황당한 표정으로 먹이를 떨구었다.

“ 우풉... ”

아빌이 제 입으로 들어온 토끼 귀를 빠르게 뱉어냈다.
토끼들이 어느새 제 몸을 오르더니 머리를 정복하는 놈도 있었고 옷 속으로 파고들려는 놈, 어깨에 앉는 놈,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놈 등 아주 다양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칼리도는 그런 토끼들에게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는 아빌을 보며 놀랍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물론 아빌은 딱히 이 토끼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몰라 그저 토끼들의 터 잡기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

“ 푸흐 ”

토끼들에게 파묻힌 아빌을 보며 칼리도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 그렇게 있으시니 꼭 토끼가 되신 것 같습니다. ”

“ ... ”

칼리도의 말에 아빌이 그쪽으로 고개를 느릿하게 돌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토끼들도 마치 그를 흉내 내듯 똑같이 칼리도를 보며 작은 얼굴을 기울였다.
그 묘한 모습에 칼리도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고 아빌은 이유를 알지 못 해 미간을 찌푸렸다.

“ 토벌에서 매서운 검을 휘두르셨다는 백작님으로 안 보이는 군요. ”
칼리도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즐겁다는 듯 전보다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정말 놀랍.. ”

“ 칼리도님. ”

그때 그들의 사이로 집사 한 명이 비집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빌을 보더니 놀란 눈을 하다가 곧 상챌 숙여 인사했고 칼리도는 찾아온 이율 물었다.

“ 후작님께서 부르십니다. ”

“ 아,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
칼리도는 사뭇 아쉽다는 눈으로 일어서더니 아빌을 보며 말했다.

“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만 가시겠습니까? ”

아빌은 제 몸을 짓누르는 토끼들을 보다 눈이 마주치자 짧게 대답했다.

“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

“ 네, 그럼 죄송하지만 먼저 자릴 비우겠습니다. ”

칼리도는 다소 아쉬운 마음으로 아빌을 뒤로 하고 알리카의 집무실로 향했다.

***

“ 후작님, 칼리도입니다. ”

“ 들어와라. ”

칼리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복잡한 얼굴을 한 알리카가 눈에 보였다.
칼리도가 고갤 숙이며 들어오자 알리카는 서류를 내려놓고 부른 목적에 대해 말했다.

“ 새 정보를 읊어라. ”

“ 요구하신 흑 사자의 대한 정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별로 새로운 정보는 얻지 못 했습니다. 희한하게 엘런 숲에서 돌아다니던 흑 사자의 행방이 뚝 끊겼습니다. 행방이 묘연해진 시간은 꽤 됐습니다만 추측해보자면 일주일 전부터입니다. ”

알리카는 칼리도의 말을 듣고는 팔라에서 본 흑 사자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에게 남겼던 흔적을 가져간 포코의 모습도 동시에 떠올랐다.

“ 이번 토벌에서 흑 사자를 만났다. ”

“ ?!.. 흑 사자를요? ”

“ 팔라에서 만났지. ”

“ 아니.. 흑 사자가 왜 그곳에..? ”

“ ..정말로 우연이거나, 토벌 단에서 누군가와 연이 있거나. ”

알리카의 말에 칼리도는 생각에 잠기며 조심히 물었다.

“ 그럼, 토벌 단 누군가와 흑 사자가 연이 있다는 겁니까? ”

“ 포코. ”

“ ...예? ”

“ 난 그 흑 사자에게 마력의 흔적을 남겼다. 근데 그 흔적을 포코가 가져갔다. 양을 보아 사실이 분명한데 포코는 모른 채 하더군. ”

그 말을 들은 칼리도는 제 주군이 포코와 흑 사자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흑 사자에게 넣은 마력의 흔적을 가져간 포코가 바보가 아닌 이상 흑 사자와 어딘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칼리도는 포코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다음 이야기를 넘어가려는데 알리카는 아직 남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마력의 흔적을 남긴 이유는 관련된 이를 찾기 위함도 있었으나 또 하나의 가설 때문이었다. ”

“ ... ”

“ 토벌 단 ‘누군가와 연’이 있거나.. 아니면 토벌 단 ‘누군가’이거나. ”

알리카의 말을 들은 칼리도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 대해 반박했다.

“ 기사단에서는 사자 티어가 없습니다. 애초에 설령 있다고 해도 그들이 굳이 숨길 이유가.. ”

“ 기사단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

칼리도는 알리카의 말에 미간을 좁히다가 곧 제 주군이 한 가설의 정체에 그도 다다를 수 있었다. 칼리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금 제 생각이 맞는 것이냐는 충격을 눈빛으로 전했다.
토벌하는 내내 수 없이 생각하고 확실한 증거에 끝내 저버렸던 가설.
그 가설은 포코를 보고서 다시 피어올랐다.
알리카 자신에게 그 가설이 틀렸음을 보여준 증거는 ‘자신이 남긴 마력의 흔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흑 사자가 아니다.’였다.
그러나 ‘포코가 마력의 흔적을 가져가서 남아있지 않다.’ 라는 것이 입증된 지금은 그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한 증거가 사라졌다.

“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변화를 보이며 흑 사자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엘먼의 숲과 가까운 백작가의 주인.... 네 말대로라면 흑 사자가 모습을 감춘 시간은 7일 전부터. 분명 있지 않나? 7일 전부터 이곳에 머무는 이가. ”

“ ... ”

“ 합당한 가설이라 생각하는데.. 흑 사자는.. ”

알리카가 계속해서 맞아 떨어져 가는 퍼즐 속에서 잘근잘근 씹듯 그 이름을 내뱉었다.

“ 아빌 보스켓. ”

“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는 분명 누마라는 것이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

칼리도가 알리카의 말을 듣자 다소 흔들리는 목소리로 급히 소리쳤다.

“ 그래, 누마는 티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거다. ”

칼리도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잡고 그의 가설을 곱씹었다.
분명 아빌 보스켓이 최근 이상하리만큼 변한 것은 사실이다.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싸움 실력은 제가 환각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누마다.
누마이기에 티어의 특성인 완전체를 할 수 없고 누마이기에 그는 지금껏 그렇게 알리카를 질투한 것이 아닌가.
분명 어긋난 가설이다.

‘ 그런데 어째서.. ’

그럼에도 칼리도 제 자신의 감은 계속해서 이 가설을 끌어들였다.
분명 될 수 없는 일임에도 이 가설을 간과할 수 없었다.

“ 찾아야 한다. ”

알리카가 그런 칼리도를 보며 낮게 명령했다.
푸른빛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의 지금의 상태를 보여주듯 낮고 차갑게 이글거렸다.

“ 어긋난 퍼즐을 맞출, 마지막 조각을.”

12
이번 화 신고 2020-03-26 18:47 | 조회 : 1,347 목록
작가의 말

포식자에게 조아릴 줄 아는 토끼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