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작은 변화(變化)는 커다란 파도(波濤)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아빌은 눈을 뜨자 알리카의 명으로 제 옆에 딱 붙은 의사를 볼 수 있었다.
자는 동안 제 얼굴을 그렇게 뚫어지게 보니 아빌은 어쩔 수 없이 잠을 설치게 되었다.
아빌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리자에게 받은 검은 손수건에 기침을 했다.

“ 아침마다 기침을 하십니까? ”

“ ... 예 ”

기침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오는 의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사는 종이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듯 써 내리더니 간단하게 아빌의 몸 상태를 검사했다.
아침부터 시달린 아빌의 기분은 최저였다.

“ 저..백작님. ”

리자가 퀭한 아빌을 조심스럽게 불렀고 아빌은 느릿하게 눈을 굴려 말하라 눈짓했다.
우물쭈물 거리며 리자가 말했다.

“ ...후작님께서 아침을 함께 하시자고 하셨는데.. ”

“ ... ”

“ ..거절할까요? ”

리자는 아빌의 얼굴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빌은 곧 고개를 살살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바로 내려가면 되나. ”

“ 아, 네..! 식당 길은 외워놨어요. ”

리자가 아빌에게 옷을 건네주고 아빌이 옷을 다 입자 앞장을 서며 아빌을 안내했다.
아빌이 졸린 눈을 마사지 해가며 식당에 도착하자 마치 데자뷰처럼 알리카가 큰 식탁의 끝에 앉아 있었다.

“ 편한... 아니, 몸은 좀 괜찮습니까. ”

“ 예, ...그러니 의사는 괜찮습니다. ”

“ 영지를 지탱해주는 영주님께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영지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영지를 위해 참아주십시오. ”

알리카가 단호하게 말하며 의자에 앉은 아빌을 향해 가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몹시 딱딱해서 보는 이들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다.

“ ... ”

아빌은 한숨을 내쉬며 제 앞에 내어진 샐러드를 찍어 제 입으로 넣었다.
신선한 채소와 달달한 소스를 즐기던 아빌은 알리카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 시가에, 마뱃잎이 있더군요. ”

“ ... ”

아빌은 알리카의 말을 들은 순간 의문을 표했다.

‘ 마뱃잎? ’

담뱃잎도 아니고 마뱃잎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알리카의 표정을 보니 그 식물이 아주 안 좋은 식물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고 더 자세한 건 아빌이 알기 어려웠다.

“ ...그렇습니까. ”

그러니 아빌은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워 이리 말하는 것이 그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것이 알리카에게는 닿지 않았을 뿐이다.

‘ 하. 그렇습니까라고.. 몰랐다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

조소를 지은 알리카는 제 입에 들어온 샐러드가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그것이 야채의 탓인지 마음 속 씁쓸함의 탓인지 구분할 여유가 지금의 그에게는 있지 않았다.
결국 알리카가 입을 다무니 아빌도 말하지 않았고 적막 속에서 오직 식기 소리만 남은 채 그들의 식사는 끝이 났다.

“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2일 뒤에 있을 토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알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식당을 벗어났다.
어떠한 것도 드러내지 않던 아빌의 표정이 알리카의 속을 더 긁어냈다.

‘ 어차피 이번 토벌을 끝내면 별 신경 쓸 것도 아니지. ’

식당을 벗어나던 알리카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

그렇게 아빌과 알리카는 별 접전이 없이 2일을 보내고 아빌은 기사가 건네줬던 갑옷, 옷들을 입고 제 검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아빌이 옷을 입고 나오자 많은 수의 기사들이 잔뜩 근엄한 분위기를 내며 칼같이 서 있었다.
아빌의 발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아빌에게로 향했고 아빌은 많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기사들 옆에 대충 맞추어 섰다.

아빌이 후작가에 온 첫 날 아빌의 실력을 본 그들의 입은 아빌에게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도 무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실력을 보았음에도 의심이 가고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비집고 새어나오는 것은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순간의 시선은 시간의 시선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사들의 신경이 아빌에게 가득 모여 있을 때쯤 기사단장과 알리카, 칼리도를 제외한 티어 3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 다들 모였나. 모두 알겠지만 오늘은 하이빌 산을 올라 타부 및 마물 토벌을 진행하게 될 거다. 겨울 산이니 만큼 방심은 목숨을 앗아간다는 걸 잊지 말도록. 후작님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절대. 절대 방심을 하지 마라. ”

기사단장이 엄중히 기사들에게 말하자 기사들이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마음을 굳건히 다졌다. 그때 알리카가 아빌에게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했고 아빌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아빌의 올곧은 시선과 올곧은 발걸음이 기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몇 번이고 토벌을 떠났던 기사들도 다소 긴장이 되어 마른 침만 삼키는데 앞으로 나서고 있는 아빌에게서는 긴장은 볼 수 없었다.
무슨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여유롭지만 그렇다고 방심을 하고 있는 아둔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기사들은 앞으로 나가는 아빌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번 토벌에서는 아빌 보스켓 백작이 함께 할 것이다. 보스켓 백작의 은혜가 닿은 오늘을 감사하며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마라. ”

알리카가 딱딱한 음성으로 기사들에게 말하곤 뒤로 살짝 빠졌다.
아빌도 권력이 높은 자로서, 토벌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자로서 말 한 마디 하라는 알리카의 뜻이었다.
아빌이 제 앞에 늘어선 기사들을 보며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전쟁에서 마지막 악을 쓰며 준비를 하던 때도, 토벌을 떠나는 지금 순간에도, 그가 할 말은 하나였다.

“ 돌아가게 해주마. ”

아빌의 말에 기사들은 가지각색으로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기사들뿐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며 배웅을 준비하던 시녀와 집사들도 알리카와, 티어들도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현재 돌아갈 수가 없는 이들에게 했던 말.
설령 이 약속을 전부에게 지키지는 못할지언정 최대한 지켜내 보고 싶었던 말.
모두가 벙 쪄 제 얼굴을 바라보던 전우들의 얼굴이 겹쳐 저도 모르게 아주 얕은 쓴 미소가 걸렸다.

“ 가족이 있는 자들이든.. 꿈이 있는 자들이든.. 돌아갈 곳이 있는 자들을.. 내가 반드시 돌아가게 해주겠다.”

기사들은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기사가 토벌을 나갈 때 듣는 말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방심하지 마라, 죽지 마라, 제 목숨은 알아서 챙겨라.
분명 반드시 필요한 말이나 그것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다.

토벌은 작은 전쟁과 같았으나 사람들은 ‘작은’에 가려 전쟁인 토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 토벌에 들어가 돌아오고 나서야 그들은 그것이 작은‘전쟁’임을 깨닫는다.
결코 가볍지 않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임을 그들은 그제야 깨닫기도 하고 깨닫기 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토벌을 나가 버티기 위해 제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은 하나였다.
기사 단장의 멋지고 위엄 있는 말도, 제 주군의 위로도 아닌 그저 제게 내일이 찾아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런데 지금 그들의 앞에 선 남자가 돌아갈 곳에 돌아가게 해주겠다 말했다.
어쩌면 가장 기사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지도 모를 그 말을 제 주군도, 기사단장도 아닌 우연히 참여하게 된 남자가 말했다.
하물며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나약하고 아둔하며 전쟁의 전도 모르는 얼간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들을 돌아가게 해 준다? 누구 한 명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면 다행이었다.

“ ... ”

그럼에도 기사들은 그 누구도 웃음을 흘릴 수 없었다.
웃음으로써 생길 백작가의 화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어쭙잖은 감동이나 받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빌은 기이할 정도로 크지만.. 든든할 만큼 자신들과 동등한 곳에 있었다.
그들보다 아래에 있지도 위에도 있지 않은 그저 딱 같은 위치.
그래서 그의 말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겼던 말과 동등한 위치로 올 수 있었다.
그 바람보다 위에 있지도 아래에 있지도 않은 같은 위치로 나란히 말이다.
기사들은 잠깐의 침묵을 유지하다 아빌의 말에 큰 소리로 답했다.

“ 예! ”

***

겨울 산 토벌을 위해 길러진 특수한 말들이 눈을 헤쳐가며 일행들은 산을 올랐다.
당연하게도 많은 마물과 타부들이 뛰쳐나와 그들은 쉼 없이 그들을 베어 나갔다.
기사단장과 아빌이 선두로 마물과 타부들을 처리했고 기사들이 뒤를, 티어들이 알리카의 보호를 맡으면서 생각보다도 수월하게 처리해 나갔다.
아빌이 제안했던 동선과 대형 또한 한 몫을 하며 보다 수월하게 그들을 이끌었다.

“ ..윽!!! ”

그러던 중 기사 한 명이 옆구리에 마물의 손톱이 긁혀 피가 흘러나왔고 마물은 이를 놓치지 않고 기사를 죽이려 손의 든 거대한 돌을 내리 찍었다.
그 뒤에 들리는 것은 살을 뭉개는 끔찍한 괴음이 아닌 철과 맞닿은 짧은 소음이었다.
아빌이 검을 꺾어 마물의 상반신을 잘라내자 마물은 힘없이 늘어졌다.

“ 아, 감.. ”

기사가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아빌은 마물들을 상대하러 몸을 돌렸고 부상을 당한 기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을 쉼 없이 내리 달렸을까 첫 번째 세이브 존이 보였다.

“ 모두 수고했다. 세이브 존에 도착했으니 막사를 펴고 편히 쉬어라. 내일 아침부터 빠르게 다시 오르기 시작할 테니 괜히 나중에 후회 말고 푹 자둬라. ”

기사들은 세이브 존에 오자마자 맘 편히 쉬지 못 했던 숨도 마음껏 내쉬며 막사를 폈다.
음식을 담당하는 기사들은 불을 지피고 분주히 요리를 했다.
간단한 수프의 온기가 차갑게 긴장하고 있던 이들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 여기, 받으세요. ”

배에 붕대를 감은 기사가 앉아 있는 아빌에게 다가와 그릇을 건넸다.
아빌은 별로 먹을 생각이 없어 머뭇거리다 조심히 받아들었다.
아빌이 묽은 수프를 내려다보며 스푼을 들어 올리던 때 수프를 가져다 준 기사가 갑자기 아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

“ ... ”

“ 백작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미 돌에 뭉개져 곱게 죽지도 못 했을 겁니다.. 하하 ”

기사가 직각으로 몸을 숙이면서까지 감사를 표하자 아빌은 다시 시선을 수프로 돌렸다.
수프의 온기가 손에 닿아 온 몸을 따듯하게 하는 듯 아빌의 몸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사가 여전히 상채를 숙이고 있자 아빌은 딱 붙어 있던 입술을 벌리며 말을 내뱉었다.

“ ...넌 돌아갈 이유가 있나? ”

“ 예?.. 아. 예, 있습니다. ”

“ 그럼 난 약속을 지켰을 뿐이네. 그리 감사해하지 않아도 돼. ”

아빌이 그리 말하며 스푼을 들어 묽은 수프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맛이 딱히 있지는 않았지만 몸을 녹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수프를 먹고 있는데 어느새 상채를 들어 올린 기사가 멍하니 아빌을 바라보았다.
아빌이 고개를 들어 올려 기사와 눈을 맞추자 기사는 당황하며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 아, 아..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기사가 부상을 입은 옆구리가 쑤실 만큼 빠르게 물러나며 제 무리로 돌아갔다.
아빌은 그 기사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스푼을 이용해 수프를 제 입으로 날랐다.
냉혹했던 겨울 산으로부터 지친 몸을 수프로 녹이자 어느새 해는 떨어지고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 드르렁....크으...”

“ 커억....컥걱.. ”

기사들이 저마다 다양한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들었고 세이프 존이니 만큼 안전해 보초를 서는 이 없이 모두 편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아빌은 최근 계속 묘하게 근질거렸던 몸에 잠을 자지 않고 막사를 벗어났다.
모두가 잠에 빠진 세이브 존은 코고는 소리를 제외하곤 무척이나 고요했다.

‘ 조금만 돌아다닐까. ’

막사에서 떨어진 곳에서 조금만 돌아다니다 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빌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순식간에 흑 사자로 변질해 막사에서 멀어졌다.
오랜만에 마음껏 뛰자 아빌의 몸도 좋다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눈이 내린 새하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아빌은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을 발견했다.

‘ ...호수? ’

아빌의 눈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호수였다. 보름달에 아름답게 비춰져 생긴 신기루처럼 그 호수는 몽환적이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빌은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호수의 앞까지 다가갔다.
하늘에 높게 떠오른 금빛 달과 겨울인 탓에 얼어버렸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운 호수가 아빌을 사로잡았다.
그 조합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시간을 바라만 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아빌은 그곳에 가만히 앉아 몸이 근질거렸던 것마저 잊어버리고 멍하니 그 풍경을 감상했다.

만일 수풀 사이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없었다면 아빌은 새벽까지 그 자리를 지켰을 터였다.
아빌은 숲에서 들린 인기척에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경계했다.
아빌의 금안이 번들거리며 한 지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저 나무 사이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굳이 저쪽에서 안 온다면 저도 굳이 만날 이유가 없어 아빌은 막사로 돌아가려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그를 붙잡는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렀다.

“ 어째서.. 여기에 있습니까? ”

아빌이 떼려던 발을 다시 땅에 붙이고 몸을 다시 틀자 수풀 사이에서 아름다운 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미청년이 걸어 나왔다.
아빌이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는 아름다운 호우트, 알리카였다.

14
이번 화 신고 2020-03-19 10:56 | 조회 : 1,658 목록
작가의 말

오늘은 다소 일찍 올렸습니다. 오늘도 읽으러 와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 )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