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작은 변화(變化)는 커다란 파도(波濤)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다음날 아빌의 머리를 보고 놀란 오른은 몇 분 동안이나 말을 버벅거리다가 겨우 멀쩡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 후작님께서는 마차와 기사단이 오고서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

“ ... 그래. ”

아빌의 머리카락은 미용사가 단정하게 다듬어 준 덕분에 멋스럽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빌이 허전한 제 뒷목을 손으로 문지르며 멍하니 밖을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기사는... ”

“ 예? ”

“ 그날 다리가 잘린 기사는 어떻게 됐나. ”

오른은 누구인가 생각하다 어제 아빌이 맨 처음 구해 준 그 기사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오른이 창밖만 바라보는 아빌을 지그시 바라보다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그 기사는 안타깝게도 다리 한 쪽을 잃어 기사직에서는 내려와야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기사가 제게 찾아와 연신 백작님께 잊지 못 할 것이라고 감사하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좀 있으면 제 자식이 태어나는데 아내를 두고 홀로 갔으면 죽어서도 그 죄를 갚을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요. ”

“ ... ”

“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진심으로. ”

오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빌을 바라보다 부드럽게 입매를 올리곤 방을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는 아빌에게서 아주 미묘한 변화를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

“ 백.. 백작님. 저.. 편지입니다. ”

서서히 아빌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시녀, 리자가 아빌에게 잘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아빌은 편지를 받아들고 리자가 함께 준 나이프를 들어 부엉이 모양이 찍힌 밀랍을 떼어냈다.
편지를 꺼내어보니 다름이 아닌 아르테 후작가의 알리카가 보낸 편지였다.

「친애하는 Avil Bosket 백작 건강하신지요. 이 몸 때문에 괜한 피해를 끼쳐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빌 보스켓 백작의 뛰어난 검술이 없었더라면 몹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만 백작의 은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 그렇게 돼서 백작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이번 겨울 토벌에 부디 그 은혜를 조금 더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럼 답 기다리겠습니다. By. Alica Arte.」

긴 편지를 요약해 보자면 겨울 토벌에 참여해줄 수 있느냐는 편지였다.
조금 있으면 있을 겨울 토벌에 참여해주겠다면 기꺼이 후작가에서 팔을 벌리고 환영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빌은 편지를 읽고 대충 아무 곳에나 그 편지를 내려놓았다.
아빌은 굳이 말한다면 싸우는 것에 대해 아무런 견해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 홀로 그곳에 들어갈 때에나 이야기다.
다수와 함께하는 싸움을 할 때면 제 눈앞에서 죽어나가던 전우들, 민간인들이 가슴을 아프도록 후벼 팠다.

“ ...거절하겠다고 전.. ”

아빌은 토벌에서 겪을 고통에 눈을 돌리려던 때 순간 알리카의 모습이 스쳤다.
제 목숨이 위험할지언정 결코 제 티어를 버리지 않던 모습, 보스켓 기사들을 도와 마력 운용을 하던 모습, 그 모든 모습이 거절하려는 아빌을 붙잡았다.
또한 이곳을 나가고 없지만 제게 감사를 전하던 기사와 제 눈앞에 서 있는 리자.

“ ... ”

무력하다는 죄를 짊어진 자신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빌은 생각했다. 돌아갈 곳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돌아갈 곳이 있는 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마음이 거절하려는 아빌의 말을 끌고 들어갔다.

“ ... 아르테 후작가에게 이를 승낙하겠다고 편지를 전해라. ”

“ 예... ”

리자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전하려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아빌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사람, 알리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절실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제 죄를 묻어 감출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

“ 그거 들었어? ”

“ ... 백작이 우리 저택에 온다는 거 말이야? ”

“ 그래!..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그 아빌 보스켓이 여기로 온다니까?! 여기!.. 아르테 후작저에 말이야!.. ”

“ 얘!.. 목소리가 너무 커.. 누가 듣겠다. ”

“ 들으면 뭐 어때. 다들 이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인지 공감할걸? 그 아빌 보스켓이 후작가에 오는 것도 모자라 토벌에 참여한다니.. ”

후작가의 시녀들은 청소를 하다가 말고 조잘조잘 입을 열어 수다를 떨었다.
시녀들에게서 아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도 흔한 일이었다.
그 아빌 보스켓이 또 후작님에게 욕을 하더라, 후작님의 티어를 몰래 덮쳤다더라, 아빌 보스켓이 후작을 죽이려들더라 등 많은 이야기가 후작가의 집사와 시녀들 사이에서 돌고 돌았지만 이번 소문은 달랐다.
아빌 보스켓이 알리카 아르테를 해하려는 것이 아닌 도와주러 후작가에 온다는 것.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개미마저 음식을 버리고 배를 보여주며 웃을 일이었다.
시녀들과 집사들이 이 소문을 믿을 수 없듯이 알리카의 티어들도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 ...진짜야? 진짜로 그 아빌이 우릴 돕는다고? 아니 심지어 네가 먼저 도움을 청했다고? ”

금빛이 도는 흰색의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비웃음을 던졌다.
제 귀를 의심하며 남자는 알리카의 얼굴을 잡았다.

“ 알.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

“ 놔. 로코. ”

알리카가 로코의 손을 떼며 차갑게 말했다.
로코는 손을 문지르며 입을 삐죽 내밀고 뒤로 물러섰다.
로코가 물러서자 그 옆에 있던 검은 눈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 알리카씨가 그렇게 한 거 보면.. 이유가 있겠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

“ 칼리도. 내가 분명 네게 아빌 보스켓에 대해 조사하라고 일렀을 텐데? ”

“ 그러니 더 믿기지 않는 거예요.. 정말 놀랄 거 하나 없이 클럽, 노예 경매장, 술집, 색방.. 여기만 이렇게 돌아다녔다니까요? 물론 최근 근황에 대해서는 그런 게 하나도 없지만.. ”

“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번 겨울 토벌 계획 수정안은 모두 그 아빌 보스켓에서 나왔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는 나와 아시페로도 인정한 검사다. ”

알리카의 말에 로코는 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지금 제가 뭘 들었는지 의심하는 듯 했다.
로코에게 아빌은 힘도 없고 나약하면서 제 권력만 믿고 날뛰는 얼간이다.
그런 그 얼간이가 뛰어난 검사?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알리카는 그런 로코의 표정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 아빌 보스켓은 앞으로 4일 뒤 있을 겨울 토벌을 위해 당장 내일 올 예정이다.
그리고 곧 알게 될 거다. ”

“ ... ”

“ 내가 왜 그 아빌 보스켓에게 도와 달라 부탁했는지. ”

***

후작가를 향하는 마차는 어느새 후작가 앞에 멈춰 섰다.
아빌은 덜컹거리던 마차의 움직임이 잦아들자 상채를 일으켜 기사가 열어주는 문에서 내렸다.
그의 눈앞에는 후작가의 시녀와 집사들이 깊숙이 머리를 숙여 길 양 끝에 늘어서 있었다.
마치 그가 처음 아빌 보스켓의 몸으로 보았던 그 장면 같았다.

“ ... ”

“ ..이리로 오시지요. 백작님. ”

집사가 상채를 깊게 숙이며 아빌을 안내했다.
아빌은 집사를 따라 후작가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후작가의 집사들과 시녀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제게 튀기라도 할까 목이 아프도록 숙여가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빌은 아무런 소동도 없이 조용히 후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 ?? ”

시녀 한 명이 그냥 조용히 닫히는 후작저의 문소리에 고개를 들며 의문을 표했다.

***

알리카가 아빌의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다소 놀란 얼굴을 짓다가 곧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하며 그를 반겼다.

“ 와주어 기쁩니다. 아빌 백작. ”

“ ... 약소한 힘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

아빌의 차분한 말을 들은 로코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고 칼리도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빌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지 않은 것은 기껏해야 아시페로, 알리카뿐이었다.

“ 일단 이야기라도 좀 나누죠. ”

알리카가 자신의 앞자리를 손짓으로 가리켰고 아빌은 별 말 없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알리카의 옆에 서 있는 칼리도와 아시페로, 로코가 알리카를 보고 있는 아빌을 바라보았다.
그 중 특히나 로코가 죽일 듯이 노려보며 살기를 띄웠다.
아빌은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알리카만 보고 있자 알리카가 어련히 손짓으로 로코를 제제했다.

“ 3일 뒤에 있을 토벌을 위해서.. 최대한 후작가는 아빌 백작을 편히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혹 불편한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

“ ... ”

아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시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왔다.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며 아빌의 앞에 신선하면서도 향긋한 오렌지 페코가 차에 따라졌다.
향긋한 향에 아빌이 찻잔을 지그시 바라보자 시녀는 아빌의 시선에 손을 떨어 결국 차가 찻잔 옆으로 새버렸다.

“ 허..헉!! 죄, 죄송합니다!!! ”

시녀가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숙이며 물이 섞인 목소리로 사죄했다.
시녀는 곧 날아올 손찌검이나 욕설에 벌써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제 실수를 후회했다.

“ 괜찮네. ”

“ .....예? ”

시녀가 날카롭게 찌르는 어조가 아닌 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경을 칠 일임에도 고개를 들어 아빌을 바라보았다.
아빌의 얼굴은 구겨짐 하나 없이 시녀를 바라보다 따라진 차를 제 입에 가져가 맛보았다.

“ ... ”

아빌이 눈을 감고 혀에 닿아오는 입 안의 차를 음미했다.
부드러운 차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눈을 천천히 떠 시녀를 보자 시녀는 그제야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가, 감사합니다. 백작님. ”

시녀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쩔쩔매다가 알리카에게도 차를 급히 따라주고 물러났다.
황당함에 노려보는 것도 잊은 로코가 멍하니 아빌을 바라보았다.
로코와 칼리도가 놀라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악연이라 해도 모자랄 저 둘이 지금 평범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이것이 꿈인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 지, 지금 저게 진짜 그 아빌이라고? ... ’

‘ 확실히 조사한 거랑은 좀 다른데.. ’

로코도 칼리도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노크 소리를 내며 집사가 문을 열었다.

“ 후작님, 마물입니다. ”

“ 또 왔군.. ”

알리카가 제 집 앞에 늘어선 마물들을 보며 낮게 한숨 쉬었다.
다행히 후작가의 뛰어난 기사들은 이를 잘 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몇몇 마물들이 마을 쪽으로 빠지는 것이 그의 눈에 밟혔다.
알리카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는 아빌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백작, 혹시 지금 당장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

“ 내가 갈게. ”

옆에 서 있던 로코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고 알리카는 그럼에도 아빌을 보며 재차 물었다.

“ 마을 쪽으로 마물들이 빠졌습니다. 그 마물들의 처리를 좀 부탁하고 싶습니다만.. ”

“ ... ”

아빌은 곧 아무런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승낙이라는 바를 알아챈 알리카는 그의 뒤를 따라가라며 로코를 붙였다.
로코는 이를 드러내며 아빌을 노려봤으나 아빌은 몸을 돌려 빠르게 마을 쪽으로 향했다.

“ ... 확실히 뭔가 전보다 분위기가 차분하네요. ”칼리도의 말에 알리카는 비스듬히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 로코가 돌아왔을 때는 아빌을 보는 눈이 달라질 거다. ”

“ ... 그 정도인가요? ”

“ 기다리면 안다. ”

아시페로도 무언의 긍정을 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알리카는 그저 차를 마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

‘ ...누마 맞아? ’

로코가 아빌을 보면서 든 생각은 오직 이것 하나다.
지금 저보다도 앞장서서 빠르게 달리고 있는 아빌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말이 안 될 정도였다.
순식간에 마을로 향하던 마물을 따라잡았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 ...야, 너 뒤로 빠.. ”

로코가 생각보다 많은 마물 수에 완전체를 하려던 때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철퍽.

“ ... ”

로코의 바로 앞에 떨어진 누군가의 큰 발.
제가 죽은 것도 모르는지 발이 움찔움찔 떨다가 축 늘어졌다.
로코가 멍하니 발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자 눈인사를 하기도 전에 마물들이 몸이 듬성듬성 잘려나갔다.
가지각색의 피가 피어오르는 끔찍한 살생 속에서도 로코의 눈에는 그 사이에 걷고 있는 아빌만이 보였다.
제 몸에 가득히 피를 묻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마물들을 그어 내리는 아빌에 로코는 우뚝 멈춰 서 있었다.

“ .... ”

로코는 강한 자는 인정한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강한 자는 로코는 아무리 성격이 거지같아도 인정했다.
로코는 그 끔찍했던 공간에서 나오게 해준 알리카의 강함을 인정해 그를 따랐고 그를 제 주군으로 삼는 것에 불평이 없었다.
아빌을 매우 싫어했던 것도 제 알리카에게 계속 시비를 터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약해서였다.
과거의 자신의 약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약한 자를 로코는 극도로 싫어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약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제 금빛 은색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겨울처럼 시리도록 냉정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 어떤 것도 담지 않을 만큼 무표정이었다. 저 마물들의 피가 결코 아빌이라는 물을 흐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 마물까지 홀로 처리해 낸 아빌은 곧 제 뒤에 서 있던 로코를 바라보았다.
로코의 눈은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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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7 18:54 | 조회 : 1,130 목록
작가의 말

댓글을 남겨주신 독자분들 다 너무 감사합니다. :)) 힘이 막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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