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뒤엉킨 연(緣)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 오랜만입니다. 아빌 백작. ”

“ ... 예..오랜만이군요. 아르테 후작님. ”

“ 딱딱하게 왜 그러십니까. 평소처럼 부르십시오.”

아빌은 제 앞에 앉은 아름다운 청년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봐도 어제의 호우트임이 틀림없었다.
설마하니 저 사람이 ‘그’ 알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다소 놀란 감정이 드러났으나 그 놀란 표정이 알아보기 힘들 만큼 미미했다.

“ 평소.. 말입니까.. ”

“ 왜 있잖습니까.. ”

“ 망할 알리카. ”

옆에 서 있던 아시페로가 아빌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알리카가 그에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며 아빌은 참 전 아빌은 숨김이 없었구나 싶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던 때 차를 따르러 시녀가 들어왔다.
시녀가 알리카를 연신 힐끗대면서도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중히 차를 따랐다. 향긋한 향이 피어오르는 엷은 오렌지빛 다즐링차가 알리카의 앞에 놓여졌다.

‘ 음..? ’

제 앞에도 같은 다즐링차가 따라질 줄 알았는데 시녀는 그대로 찻주전자를 도로 가져왔던 카트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바로 아래에 있는 찻주전자를 들어 제 앞에 따랐다.
엷은 오렌지빛이 아닌 저번에 마셨던 반짝이는 진분홍색 차였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차가 놓아지고 시녀는 뒤로 물러났다.
딱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아 아빌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가 몸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끼며 아빌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 겨울 토벌건으로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용무인지요. ”

“ 아시다시피.. 아르테 후작가는 겨울이 되면 하이빌산에 타부토벌을 합니다. 3월부터 11월동안 힘을 키운 타부들이 몸을 드러내는 시기죠. 강하고 많은 수의 타부들은 저희 아르테 기사단도 다소 어려워서 말입니다. 그래서 백작가에 도움을 좀 받으려 합니다. ”

“ 그렇군요. ”

아빌의 단 답에 알리카가 차를 마시다 멈칫하며 아빌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아시페로도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저거 뭐 잘못 먹었나.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보통 토벌을 하실 때 참여하는 기사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

“ ... 기사단장과 부단장. 그 외 1기사단 전부와 2기사단 반절이 참여합니다. ”

“ 1기사단 수와 평균 실력은요. ”

“ .., 총 20명이고 개인마다 A급 마물 2마리씩은 감당 가능한 정도입니다. ”

아빌이 이것저것 물으며 아르테가(家)의 기사단 정보를 듣더니 타부진압 계획 및 토벌 방식을 듣고 겨울 토벌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365일 내내 전쟁으로 몇 번이고 진압하며 싸우고 죽을 뻔하고 죽여보기도 한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전투방식이 존재했다.
많은 목숨을 내어주고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상처 입은 방법을 얻었다.
허점을 잡아내고 위험요소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는 입에서는 씁쓸함도 함께 흘러나왔다.

‘ ...허.. 이게 무슨.. ’

알리카는 마치 전쟁을 수없이 치러본 사람처럼 토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아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허울뿐인 이야기인가 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알지 못하고 넘겼던 허점을 잡아내고 생각하지 못 했던 싸움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의견이 없었다면 이번 토벌에서 보다 사상자도 부상자도 많아 피해가 컸을 터였다.
서로를 죽이려는 싸움을 할 때에는 결코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수많은 변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지금 저 얼간이 아빌에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적어도 전 계획보다 완벽에 가까운 계획들이었다.

‘ ...지금 내가 뭘 보는... ’

놀란 건 알리카 뿐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있는 티어, 아시페로도 경악하고 있었다.
응접실로 그가 들어올 때에 자신을 훑는 더러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이상했지만 꼴에 자존심을 세운다고 생각해 신경도 안 썼다.
그러나 평소처럼 알리카에게 욕을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아빌이 점점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어뜯을 여부를 주었음에도 물지 않고 존대를 쓰며 확실하게 후작님이라는 호칭으로 알리카를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도 술술 내뱉고 있는 저 이야기는 무어란 말인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가 정녕 그 아빌 보스켓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 -까지가 제 생각입니다. ”

아빌이 제 할 말을 다 하고서 메마른 목을 차로 적셨다.
어느새 차 한 잔을 다 마신 아빌이 찻잔을 내려놓자 시녀가 다급히 다가와 차를 따르려 했다.
아빌이 괜찮다는 손짓으로 거절하자 시녀가 다시 빠르게 물러섰다.

‘ 뭔가 또 몸이 나른하네.. ’

아빌이 멍해지는 정신을 깨우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알리카를 바라보았다.

“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 아니요. 없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책략가가 있을 줄이야..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봅니다. ”

“ 기사단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

아빌이 제 옆에 앉은 멍한 오른을 손으로 살짝 가리켰다.

“ 제 대리자인 오른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

“ ..알겠습니다. ”

알리카가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몹시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아빌을 바라보았다.
오른이 이상하다고 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여유있게 앉아 있는 저 아빌은 누구란 말인가.
탐욕적이며 무식하고 더러운 행동을 하는 그 아빌이 맞다는 말인가.
확실히 그가 왜 저리 되었는지 지켜볼 필요성이 느껴져 알리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 헌데..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리는 겁니다만... 백작저로 오는 동안 엘먼 숲에서 너무 많은 마물과 타부를 만나 현재 마차 상태는 물론이고.. 기사들도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부디 아주 조금만 백자저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

“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른이 알아서 방을 내어줄 겁니다. ”
흔쾌한 허락이 떨어지자 알리카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 은혜는 꼭 갚겠.. ”

“ 쿨럭!... ”

순간 아빌이 기침을 하더니 상채를 숙였다.

“ 커헉..! 켈록 컥.. 커억.. ”

숨이 넘어갈 듯이 기침을 하며 상채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아빌을 보며 알리카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옆에 있던 오른이 벌떡 일어서더니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 백작님! ”

오른이 아빌의 상태를 보며 자신이 쓰러질 듯 창백해진 반면에 아빌은 미간을 좁히며 눈을 연신 깜빡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

아빌이 제 입을 막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욱신거리는 배를 잡았다.
누군가 안에서 칼로 찌르는 듯 하는 통증과 부족한 숨으로 눈물이 맺혔다.
다급히 막은 손 사이로 막아내지 못한 피가 넘쳐흘러 카펫을 적시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면 할수록 통증이 잦아들어 점점 숨 쉬기가 쉬워지자 주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꺅!!.. ”

“ 뭐하나!! 어서 의사를!!! ”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아빌이 잔기침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 큽..쿨럭.. 괜, 찮네. 의사는 괜찮..흡... ”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를 쏟아내고 옷과 입, 손에 피를 가득히 묻혀 눈물까지 흘리는 판국에 괜찮다고 하니 퍽이나 괜찮아보였다.
오른 뿐만이 아니라 응접실 안 모두가 기가 차는 것을 넘어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아빌을 보았다.

“ 하아..... ”

진정 된 아빌이 심호흡을 하며 상채를 완전히 들었다.
차향으로 가득했던 응접실은 어느새 피 냄새로 비릿하게 가득 찼다.

“ ....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모습을..보였군요. ”

쏠린 시선에 아빌이 무슨 살짝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듯 태평하게 말했다.
그렇게 짧게 정적이 흐르다가 오른이 기어코 시녀를 지시해 의사를 데려오라 했다.

“ 아니.. 괜찮.. ”

“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백작님. 알았으니까 그냥 가벼운 검사만 받으십시오. ”

“ ... ”

아빌이 단호한 오른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곤 알았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누구도 아무런 말도 없이 있다가 곧 의사가 왔고 상황을 본 눈이 경악에 빠르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빌은 의사를 따라 검사를 받으러 응접실을 떠났다.
시녀들이 빠르게 피를 치웠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때까지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오른이 시녀들과 집사를 내보내고 응접실에는 아시페로와 오른, 알리카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셋은 환기를 했음에도 나는 피 냄새를 맡으며 알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저게 뭐지. 오른. ”

“ ... ”

오른은 자신의 주군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정확하게는 몰랐기 때문이다.
저번에도 각혈을 하는 것은 보았으나 저 정도로 심하지는... 아니 심했지만 이번 경우는 완전히 수준이 달랐다.
멀쩡하게 걸어 나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 ...저도 이번으로 두 번째 본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것이 2번이지.. 반응을 보아 전부터 계속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 ...그럼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 이유는 아나? ”

“ ...들었다시피.. 본인은 괜찮다며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

알리카가 아빌이 앉았던 자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앉았던 자리의 의자는 피가 묻어 집사들로 인해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른이 알리카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 감히 추측한 건데.. 그간 복용한 약과 시가 때문이 아닐지 생각 중입니다. ”

“ 그것 말고는 없기야 하겠군... 당장 오늘만 해도 약을 했으니 ”

“ 예... 오늘 아빌이 마신 라이츠의 꽃잎을 우린 차만 해도.. 꽤나 강한 마약이니까요. ”

오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분홍색의 차를 떠올렸다.
어느새 알리카의 옆에 털썩 앉은 아시페로가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 제 몸을 그 지경으로 만들 정도로 약을 하다니 우습도록 미련해. ”

“ 최근 시녀의 말을 들어보면 약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고는 합니다만.. 하루에 매번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걸 보아.. 유흥가에서 더 없이 많이 약을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봤으나.. 청구서는 오지 않더군요.. ”

“ ...저 몸 상태도 몸 상태이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아빌의 책략이다. ”

알리카가 식어버린 다즐링 차를 차갑게 내려다 보다 눈을 들어 올리며 답을 요구하듯 오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른은 그저 얕게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 저도 놀랐습니다. 저 자에게 그런 정보력이 있을 줄은... ”

“ 저건 단순한 정보력으로 만들어지는 책략이 아니다. 전장에 수없이 나가 본 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

세 사람 모두 좀 전의 아빌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평소 모습을 모른다면 당장이라도 친분을 다져놓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 사람이 변하는 건 죽을 때가 돼서라는데..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

“ 죽을 때가 되어서 저 정도로 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랍겠어. ”
알리카가 아시페로의 말을 대충 흘리며 턱을 괴었다.
그때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짧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오른이 들어오라 이르자 집사가 문을 살짝 열고 말을 전했다.

“ 의사께서 검사를 마치셨다고 합니다. ”

“ 의사를 불러오게 ”

오른의 말에 곧 의사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다가오자 오른이 물었다.

“ 그래.. 백작님의 몸 상태는 어떤가. ”

“ ...그게.. ”

“ 말해 보게. ”

의사는 대답하기는 커녕 시선을 바닥에 두며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에 오른이 답답해져 답을 재촉하자 의사는 쩔쩔매며 기어이 대답했다.

“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

“ ...뭐? ”

“ 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건강하십니다. ”

“ ... ”

오른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의사를 보자 의사는 건강하다고 반복할 뿐이었다.
내게만 말해보라며 의사를 달래도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백작은 건강하다고 말했다.
건강한 이가 피를 쏟아내는 것이 참 모순되는데 의사는 그럼에도 건강하다고 말했다.

오른이 헛웃음을 지으며 나가라 손짓했다.
의사가 응접실을 나가고 응접실 안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조소를 지은 알리카는 낮게 중얼거렸다.

“ 어지간히도 제 병을 알리고 싶지 않나 보군. ”

***

의사가 제 눈을 의심하며 검사를 5번이나 하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나갔다.
아빌은 침대에 앉은 그 상태로 왜 자신이 피를 토했는지 생각했다.

‘ 저번에도 그렇고.. 공통점이라곤... ‘차’인가? ’

아빌이 자신이 마셨던 진분홍색 차를 떠올렸다.
자신은 남들과 다른 차를 마신 것도 그렇고 몽롱해지는 정신도 그렇고 아빌은 그 차가 보통 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그 차를 내오지 말라고 일러둬야겠네. ’

남들이 하는 생각은 요만큼도 모른 체 아빌은 제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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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5 22:13 | 조회 : 1,22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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