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뒤엉킨 연(緣)

「보다 순조로운 이해를 위하여 세계관 설정을 참고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읽으시면서 이해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세계관 설정을 참고하셔서 봐주세요.」

오른이 서늘함을 느꼈거나 말거나 아빌은 그냥 이 답답함을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오른을 재차 불렀다.
그는 세 번째로 불러서야 겨우 고개를 돌리며 마주 보았다.

“ 오른, 최근 네가 한 일을 읊어봐라. ”

“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겁니까. ”

“ 읊어라. ”

최근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안다면 그것만으로 오른이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기 쉬웠다. 설마하니 아무런 일도 안 하는 작자는 아니겠거니 싶어 아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아빌도 그저 그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오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더니 굳게 다물어진 입이 벌어졌다.

“ 어제 한 일만 먼저 말씀드리면.. 영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저번에 부셔진 땜을 고칠 것에 대한 최종승인을 했습니다. 또한 곧 겨울인지라 제 3기사단은 숲의 경비를 강화시킬 것을 명했고.. 영지민들의.. ”

아빌은 오른의 말을 집중해 듣다가 의문을 느꼈다.
아무리 아빌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닐지언정 오른이라는 자가 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영주 이상의 인물이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소영주인가 싶었지만 그는 분명 ‘최종승인’이라고 했다.
소영주가 영지의 일에 최종승인을 하는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시녀의 태도, 오른의 공포 없는 눈, 무엇보다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

“ 오른. ”

“ 예. 백작님. ”

“ 네가 내 일을 대신 하느라.. 수고가 많겠군. ”

“ 아닙니다.. 다 백작님이 보다 즐거운 여생을 보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백작님은 훌륭하시고 존엄한 분이시니 응당 원하시는 것을 취하시고 편히 지내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

아니나 다를까 오른은 술과 색, 약을 좋아하는 횡포를 일삼는 대영주를 대신하는 대리자였다.
보아하니 살살 구슬려 과거 아빌을 일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자신이 이 백작저는 물론이고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듯 했다.

‘ 뭐. 상관없나. ’

하기야 폭군이 이끄는 나라는 폭삭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빌도 전쟁을 하는 내내 폭군처럼 전우들을 몰아세우고 억지를 부리던 대장의 부대는 가장 먼저 몰살당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그른 대장으로 망할 길을 걷는 것보다야 옳은 이등병을 따르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그도 생각했다.
아빌은 오른이 영지를 망치지 않는다면 굳이 대리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물론 오른이 정말 옳은 대리자인지는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 아까 기사단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나. ”

“ 아,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제3 기사단 건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는 듯싶습니다. ”

“ 일단, 집무실로 가지. ”

“ ..? 집무실로 말입니까? ”

아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오른이 눈에 당황스러움을 보이며 급히 아빌의 뒤를 따랐다.

***

오른은 아빌을 한껏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며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기사단장도 적잖게 놀란 눈으로 아빌을 바라보았다.
아빌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세금 관련 서류 및 영지 관련에 관한 서류를 전부 읽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 할 서류를 뭣 하러 읽는지 오른과 기사단장은 알 수 없었다.
정작 그 서류를 읽고 있는 아빌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 ...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운영 되고 있어.. ’

물론 대영주 아빌 때문인지 그에 들어가는 지출은 상당히 컸다.
유흥비며 값비싼 보석, 무엇보다도 약.
아마 아빌의 이 지출만 좀 적었더라면 이 영지는 상상이상으로 번성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부분부분 들려오는 기사단장과 오른의 대화 속에서도 영지를 위한 그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아빌은 전부 확인한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충분히 대리자로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음을 알았고 후에 마을로 가 두 눈으로 확인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 이제 가십니까..? ”

아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대화를 나누던 오른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아빌은 그에게 앉아 있으라 손짓하며 발걸음을 문 쪽으로 옮겼다.
오른이 그런 아빌을 주시하며 나가기 전 머뭇거리듯 물었다.

“ 어딜 가십니까..”

“ .. 잠시 밖을 다녀오지. ”

곧 그의 말을 들은 오린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마저 기사단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린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아빌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장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작은 글씨만 보고 있었더니 안 그래도 다소 근질거렸던 몸이 더 근질거렸다.

“ 잠시 밖을 나갔다 오겠다. ”

“ 여, 여기 옷과 돈입니다.. ”

시녀가 건네주는 돈이 든 겉옷을 입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뛰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집사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나서니 항시대기 인 것인지 화려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 백작님.. 오늘은 어디로 모실.. ”

“ 오늘은 나 혼자 가겠다.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돌아오는 것 또한 혼자하지. ”

“ 혼자 마을로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 내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말고 들어가라. ”

아빌의 단호한 어조에 마부는 곧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를 피했다.
아빌의 시선은 단 한 곳에 머물렀다.
근질거리는 몸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것만 같은 푸르른 숲이 저 멀리서도 금방 보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숲을 향하던 발은 어느새 경보로 변할 만큼 아빌은 당장 저 숲을 달리고 싶었다.
숲에 도착한 아빌은 허리를 쭉 피더니 순식간에 흑 사자가 되어 숲으로 사라졌다.

***

기사단장과의 말을 끝낸 오른은 어느새 집무실에 혼자 남았다.
곧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문을 잠그며 창문에 커튼을 쳤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집무실에 덩그러니 오른이 서더니 제 품에서 푸른색의 마구를 꺼내었다.
푸른색 마구를 손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곧 더욱 밝게 빛났다.
그렇게 얼마나 빛났을까 곧 빛이 사각형으로 모이더니 백발의 미청년이 떠올랐다.

“ 알리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

‘ 오랜만이네, 오른. 자네가 통신구를 쓰는 건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지?’

오른이 정중하게 앞에 떠오른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 같은 백색의 머리카락과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퍽 아름다워 시선을 사로잡았다. 차마 다 담아내지 못 하고 넘쳐흐르는 새하얀 마력이 그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지 모릅니다만.. ”

오른은 자신이 존경하다 못 해 한 명의 신처럼 보는 그를 차마 마주보지 못 하며 우물쭈물 거렸다.
괜찮으니 말해보라는 백색 남자의 말에 오른은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다름이 아니라. 아빌백작이 뭔가 이상합니다. ”

‘ 이상하다? 약에 취했다는 말인가? ’

“ 아닙니다.. 오히려.. 전보다도 멀쩡해 보였습니다. 여인을 부르지도 않았고 오늘 하루 술도 마시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흥을 즐기시러 나가시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

‘ ... ’

“ 무엇보다.. ”

‘ 무엇보다? ’

오른이 자신을 부르던 아빌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다시 한 번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 오늘 서재에 오셨는데.. 제게 ‘더는 호우트가 될 생각이 없다.’라며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허세나 포기이실지 몰라도..그분의 눈동자며 행동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일순간..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

오른의 말에 백색 남자는 침묵을 유지하더니 자신의 측근을 불렀다.
그리고 무어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다시 차가운 눈이 오른을 향했다.
차가운 눈에 움칫 떤 오른은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 겨울 토벌건으로 잠시 백작저를 방문하겠다. 토벌이 2주일 채 남지 않았으니 급히 만나러 가야겠지. ’

백색 남자의 말을 이해한 오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도록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

“ ..컥! ”

오늘도 아침을 각혈로 시작한 아빌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처음보다는 그 양이 줄었으나 여전히 각혈을 했고, 그동안은 생리적으로 눈물이 나와 아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피와 눈물을 쏟아내고 아빌은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대개 시녀들에게 이런 시중을 들게 하지만 아빌은 남에게 제 몸을 내어주는 것은 못미더웠고 그러기도 싫었다.

“ ...후우 ”

아빌은 책상에 앉아 ‘전’ 아빌의 일기장을 꺼냈다.
발견한 것은 2일 전이었으나 생각보다 그 양이 많고 지루해서 읽는데 다소 오래 걸렸다.
1/4 까지 읽은 아빌은 바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페르체력 975년 4월 18일
오늘은 그 망할 알리카를 만났다. 꼴에 호우트라고 주변에 티어들을 끼고 있는 꼴이 참 꼴사나웠다. 자신은 4명의 티어를 가지고 있다고 기고만장 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반드시 그 망할 보라색 눈을 찔러 없애 버릴 것이다. 분명 그 티어들도 내가 더 끌릴 터인데 내가 누마라 그 못 된 알리카를 떠날 명분이 없는 것이다....내가 누마가 아니라 호우트라면 상대도 안 될 텐데..」

「페르체력 975년 4월 29일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그 알리카가 기어코 나를 시기해 모두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나를 후작가 파티에 초대해 놓고 나를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그 녀석들의 비웃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찢어죽일 새끼들. 」

「페르체력 975년 6월 1일
이건 있을 수 없다. 그 망할 알리카.
기어코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의 티어들과 키스를 나누었다. 나를 기만한 것이다.
문틈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으니 필시 그는 의도하고 나를 엿먹인 것이다. 4명의 티어들에게 둘러싸여 오만하게 나를 보던 그 보라색 눈을 잊을 수 없다.
그 자리는 내 것이다. 그 자의 것이 아니야. 그에게는 너무 과분해. 나는 모든 것을 가져야 하
는 존엄한 사람이란 말이다. 목줄을 쥐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야. 내가 그들의 왕이란 말이다. 」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일기를 읽던 아빌은 곧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백작님. 오른입니다. ”

“ 들어와라. ”

아빌이 일기장을 덮고 서랍장 깊숙이 집어넣었다.
곧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오른이 들어왔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가 유달리 그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 무슨 일이지 오른. ”

“ 내일 손님이 오시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

“ 손님? ”

아빌이 자신의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마시며 오른의 말을 기다렸다.
오른은 아빌이 바라는 대로마저 입을 열었다.

“ 아르테 후작가(家)에서 겨울 토벌건으로 상의하러 내일 오실 예정입니다. ”

‘ 아르테... ’

차를 마시던 아빌이 눈을 깜빡거리며 찻잔을 내렸다.
아빌이 익숙한 가(家) 이름에 답을 찾은 듯 오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 알리카... 후작 말인가? ”

“ 네, 맞습니다. ”

지금 제 책상 안에 저주를 퍼다 부은 일기장 속 가장 많이 나온 알리카.
천재 호우트라 불리는 알리카였다.
오른은 아빌이 알리카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기는커녕 심드렁해 하는 것을 보자 당혹스러웠다.
언제는 못 죽여서 안달이더니 지금은 무슨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저랑은 상관없다는 듯 구는 아빌의 행동에 오른은 안심이 되면서도 탐탐치 않았다.

“ 그래서.. 내일은 후작님도 오시니 백작님께서 직접 나서주시지 않겠습니까? 훌륭하신 백작님이 나서주신다면 이 오른. 더 없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

오른이 보이지도 않는 꼬리를 흔들며 아빌에게 입 발린 말을 떠들었다.
아빌은 분홍빛이 도는 차를 보다가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익숙한 감각에 아빌이 책상 위에 놓인 천을 들어 입을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을 막은 순간 날카로운 기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목구멍이 매우 뜨거워지며 기도를 타고서 무언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 컥!..켈록!..컥..헉..”

아빌이 숨을 거칠게 쉬며 기침을 하자 옆에 있던 오른도 당황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아빌이 어느 정도 숨이 진정되고 손수건을 떼자 예상했던 대로 천에는 붉은색 피가 가득했다.
가득하다 못 해 이미 점점 물들어 흰 천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일부러 피가 물들어도 잘 티가 나지 않는 검은색 손수건을 아침마다 사용하며 지내 별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처럼 아침에 한 번 하고도 모자라 더 한 것은 처음이라 아빌도 다소 의문스러웠다. 뭐 과정이야 어찌됐든 약간 멍했던 정신이 개운해졌으니 좋은 일이었다.

“ 백작님, 어디 편찮... 피?.. ”

“ 아. 괜찮네. 별거 아니야. ”

“ ... ”

오른이 두 눈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내보이며 손수건과 아빌을 번갈아 보았다.
손수건을 적신 피양을 보더라도 결코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 후작님은 내가 만나 뵙겠네.”

오른의 시선이 손수건에 멍하니 가 있는데 아빌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천을 대충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오른이 멍하게 있다 움칫 놀랐다.

“ 아.. 식사는.. ”

“ 안 해도 괜찮네. ”

“ ... ”

“ 그럼 밖에 나갔다 오겠네. ”

“ 또 유흥가이십니까? ”

오른에 질문에 아빌은 별 대답을 하지 않고 겉옷을 입었다.
오른은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 저 책상 위에 놓인 천이 자꾸 신경이 갔다.

“ 다녀오겠다. ”

“ ...다녀오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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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4 01:52 | 조회 : 1,49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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