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작은 병 속 추억은

"헉."

나가가 빠르게 숨을 들이마신 숨을 멈추었다. 쾌쾌하고 무거운 공기가 코로 훅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주춤거리는 사이 통유리 속 트래시가 손을 흔들었다. 인심 좋은 미소가 어디서 많이 본 듯 했다. 바다와 닮았지만 어쩐지 하나도 닮지 않아보인단 생각을 뒤로 한 채, 나가는 철렁한 가슴을 몰래 움켜쥐었다.

"여,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귀신인 줄 알았네...'

웃는 걸 보니 사람이구나, 싶었다.

트래시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안들린다고 신호를 보냈다. 나가는 알아들었다며 팔로 큰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혹시 납치해온 건 아니겠지..? 아니, 이미 마약밀매범인데 범죄에 거리끼는 게 있을리가....'

한참을 생각하던 와중, 똑똑, 유리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에 나가는 고개를 돌렸다. 트래시는 삐뚤어진 글씨가 적힌 종이를 들어 나가에게로 향했다. 초등학생이 쓴 것만도 못한 정도였다.

'제 이름은 트래시에요. 저와 제 친구인 베놈을 구해주세요.'

트래시는 종이를 다시 거두었다. 나가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놈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았다. 조용한 방 안에 작게 울리는 이름이 초라하게 들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같이 갇혀있는 사람인가보다 싶었다.

'돌아가면 서장님한테 말해야겠다.'

그나저나 고백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나가는 다시 시야에 들어온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글씨들을 따라 읽었다. 저희는 비인도적인 실험의 실험체가 되어있어요. 부디 도와주.....

탕! 탕!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불쾌한 소음에 나가의 온 몸에 서늘함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소리는 이미 멎어있었다.

"........"

하지만 유리 속에 있던 트래시조차도 알 수 있었다. 총소리. 무언가를 쏜 총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중간에 가로막혔다. 목표가 무엇이든간에, 적중했다.

탕!

총알이 한 번 더 쏘아올려졌고, 이내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선반에 올려진 물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듯한 소음이었다.
나가의 표정이 심상찮게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큰 사단이 난 것만은 확실했다. 유리에 손을 얹은 채 밖을 내다보는 트래시의 표정도 안절부절, 불안해보였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다녀올게요!"

나가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내달렸다. 말한다고 트래시에게 들리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크게 소리치고서 방을 나섰다.
소리가 어디서 난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대신 나가는 두 눈을 날카롭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배. 선배."

복도 너머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촉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는 그제서야 바삐 움직이던 걸음를 멈추었다.


"........."

나가의 눈앞이 하얘지다 못해 도로 검게 물드는 듯 했다. 상황파악을 하고 난 뒤에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로 들어온 소리는 머리로 빠져나가며, 온 몸의 열을 앗아갔다.


"선배."

노을보다 붉은 핏기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바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아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 주아 선배. 하지만 주아의 입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즐기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해보였다. 바다는 쏟아지는 햇빛처럼 주아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어떡하죠, 나가. 지혈은 하고 있는데 선배가 대답이 없어요."

바다의 새하얀 손이 주아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피가 바다의 옷을 조금씩 적셔갔다. 바다는 옷이 축축해지는 것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황무지 속 가녀린 꽃을 발견한 것처럼, 따뜻한 손길이 주아를 소중하게 매만졌다. 시들어버린 꽃이었다.


핏물로 눈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져내렸다. 노을엔 얼룩이 생겨났고,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고요한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자 바다의 푸른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차올랐다. 반짝임이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도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바다는 떨리는 오른손목을 왼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주아의 팔을 들어올렸다. 툭. 거셌던 팔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바다의 하얀 얼굴로 핏물을 튕겨냈다. 바다의 희고 뽀얗던 볼에 붉은 흔적이 새겨졌다.


-


그 날 저녁,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바다의 귀를 미친듯이 들쑤셨다. 바다는 조용히 두 손을 모은 채 은은히 퍼지는 향 냄새를 맡았다. 다른 사원들은 바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바다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이 가고 난 뒤에는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버릇처럼 입꼬리는 올라가있었고 말투는 상냥했다. 분명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말했으리라.


바다는 주아와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었다. 먼 사이는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활기차던 사람이 고작 저 안에 들어가다니.'

작디 작은 항아리 속에 주아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간 그녀가 살아온 세월 그 모든 것이 고작 그 공간안에 들어갔다. 볼품없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추억이 맺혀있을 터였다.


주아의 얼굴은 언제나 봄날에 피어오르는 벚꽃처럼 밝디 밝았다. 창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얼굴을 해선 안되는 사람이었다. 바다의 머릿속에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아이같은 웃음을 짓던 주아가 떠올랐다.

이제서야 스푼계약서의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는 건, 이런 걸 의미했던 것이었다.


바다는 온 몸에 힘이 빠지다 못해 제자리에 몸을 웅크렸다. 계단의 시멘트 속 추위는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 몸을 정신없이 휘감았다. 입을 막았음에도 결국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윽."

굵은 눈물짐에, 바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


"바다 어디갔냐."

"바람 쐐러 간다길래 귀가해도 좋다고 했어요. 지금쯤 집에 가는 길이겠죠."

다나는 팔짱을 끼려다 풀고 계단난간에 손을 짚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귀능을 곁눈질했다. 착잡하다 못해 화가 난 것 같았다.

"옆에서 잘 지켜봐야 하는데. 하필 마지막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는 걸 정면에서 봤다고 하니까."

"티는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많이 놀란 눈치더라고요. 아까 보니까 몰래 울고 있기도 했고...."

귀능은 계단을 열자 보이던 바다를 떠올렸다. 서늘한 공기가 코를 쓸던 때 홀로 떨던 바다가 생각났다. 귀능은 위로하려 다가가고 싶었지만, 혼자 슬픔을 삭히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바다는 주변의 누군가가 다가가면 인위적으로 표정을 고쳐버리니.


한 번 크게 한숨을 지은 다나는 목을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건조한 회색빛 천장이 시야에 전부 담겼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뒷목을 한 번 쓸었다.

"너라도 잘 챙겨줘. 바다 걔는...너도 알다시피 다른 애들한테 기대지를 않아."

"맞아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잘 대해주고 상냥하지만, 또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를 않는 것 같아요. 항상 선을 지키는 느낌이라서 더 다가가기 힘든 것 같기도 하고...."

귀능은 격하게 공감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다는 언제나 긴장에 둘러싸여있었다. 온 신경은 곤두서있고, 그러면서도 아닌 척을 하듯 미소지으며 친절한 얼굴을 취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자 다나는 입을 달싹였다. 귀능이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말을 이었다.

"사사는."

"징계 받을 거 같던데요. 근신 정도면 약과니까, 일주일 정도만 쉬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지. 깨지는 건 내 몫이고."

"앗....."

귀능은 다나의 눈치를 슬슬 살피다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주아 씨를 죽인 놈, 입고 있던 옷에 나이프라 적혀있었다 했잖아요. 굳이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야할까요? 진짜 나이프인지도 의문이고..."

다나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젖혔다. 그러고선 그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확히 동맥이 흐르는 자리.

"목에 나이프 문신이 있었어. 말단조직원 정도일거다. 중요한 건 여태 잘 있다가 왜 갑자기 선공을 하냐는 거지."

"음....예전에 저희가 선공했을 때의 복수 아닐까요?"

"그게 언제적인데 그러냐. 스푼 생긴지 얼마 안됐을 때 얘기잖아. 그리고 그때도 우리쪽 희생자가 더 많았어."

다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 창문밖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비참함이 넘칠 듯 출렁였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도 이런 날이었다. 이렇게 심상찮은 바람이 이따금씩 머리칼을 휘집어놓던 날이었다.
영정에게 있어서 일생의 단 한번의 실수로 일어난 대규모 희생. 사사의 팀이 바뀌게 된 계기, 듄이 히어로를 그만두게 된 원인.


다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비릿한 향 냄새가 옷자락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두 눈을 있는대로 찡그렸다.

"됐어. 다른 팀에서 조사결과 알려주면 그때 생각해야지. 우선 지금은 나가랑 바다 컨디션 조절에 힘써야한다. 아무리 강해도 아직 학생이야."

도시의 밝은 빛이 창문 밖에서 아른거렸다.


-



"후......"

바다는 물에 뛰어들기 전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바닥까지 꽉 찼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그렇게 하기를 3번정도 반복하니, 두근거렸던 심장이 괜찮아진 듯 했다.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바다는 요령없이 문질러 따끔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거울로 비쳐보았다면 새빨개져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피가 안 났으면 다행이라 생각될 통증이었다.

바다는 무감한 표정으로 손을 떼곤 한껏 고개를 젖혔다. 손바닥 안 쪽으로 눈알을 크게 감싸며 벽에 기대었다. 하도 눈을 깜빡여서 그런지 눈동자가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우뚝 서 있는 꼴이 제법 우스웠다.


"뭐 하니?"

장난기 섞인 비웃은 말투가 들린 것도 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바다는 잔뜩 곤두선 신경으로 두 눈을 번뜩이며 떴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 발 아래로 그림자가 크게 지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달이 참 밝지? 바다."


그렇게 밝디 밝은 달보다 더 새하얀 빛을 뿜어대는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옷까지 전부 밝은 색감의 남자. 순간 바다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이름이 있었다.

'하얀 마법사?'

"내 이름은 백모래야."

"아."

'아니구나.'

바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초도 지나지 않을 짧디 짧을 찰나의 순간.

백모래? 들어본 이름이야.
누구더라.
백모래, 백모래....

"나이프."

황급히 입을 막았으나, 이미 뱉어버린 후였다. 어쩌자고 나이프의 이름를 입에 올린 것인지. 바다는 잔뜩 긴장한 눈치를 살피며 위를 흘겨보았다. 백모래가 옥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이고 있었다.

"나 알고 있네? 다나가 설명해줬나봐?"

"알려줄 의무 없어요."

바다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서장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질리도록 들었다. 주아선배를 죽인 자가 나이프 소속이었다고. 나이프를 꼭 없애야만 하니 도와달라고. 그리고 그런 나이프를 만든 사람이, 그 조직의 보스가 눈앞에 있었다. 바다는 먹잇감을 노리는 사나운 맹수처럼, 조심스럽지만 언제든지 달려나갈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기회만 잡으면 넌 오늘 끝이다, 라는 각오였다.

"음....왜 그렇게 경계하는거지? 혹시 그쪽 팀원이 오늘 죽어서?"

"그렇게 쉽게 입에 담지 마세요, 백모래!"

외마디 비명같은 소리가 울렸지만, 빠르게 스치는 자동차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강렬했던 포효는 초라하게도 소리 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주변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싫어?"

바다가 이를 아득 물었다. 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하죠."

"그럼 얘기가 쉽겠네."

백모래는 가볍게 바다의 앞으로 떨어져내렸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가벼워 바다는 마치 한마리의 나비를 본 것으로 착각했다.


백모래가 한걸음씩 다가올때마다 바다는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바다가 한걸음 멀어지면 그는 두 걸음, 바다가 세 걸음을 피하면 그는 다섯걸음 다가왔다. 그렇게 코앞까지 다가온 백모래가 한음절 한음절, 말에 힘을 담아 말했다. 마치 기회는 이번 한 번이라는 듯이.

"바다. 나이프에 들어와.
스푼이 전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바다의 뽀얗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다시 한번 손이 떨려왔지만 그녀는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두려움을 삼켰다. 이겨내야 해, 내가 겁먹었단 걸 드러내면 안돼. 하지만 입은 착실하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피 튀기는 꼴은 두 번다시 보기 싫어.'

바다는 빠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화필름처럼 붉디 붉은 핏물이 얼굴에 튀어오르는 장면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오늘 하루만에도 수 백번은 돌려본 장면이었다.

백모래는 바다의 두 다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지자 바다는 몸을 한발짝 더 뒤로 내뺐다. 옅게 떨리고 있단 걸 들켰다.


"음...이건 그냥 짐작하는 거긴 한데.
아직까지 스푼에서 힘든 훈련 받아본 적 없지?"

"........"

바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숙인 채, 틈이 생기면 공격할 것이라 다짐하며 백모래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백모래는 그 의도를 알고는 있는 건지 아닌지,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아마 다나는, 어쩌면 스푼의 모든 사람들은 무서웠던 게 아닐까? 성장시키면 널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뺏기기는 싫으니까."


'웃기시네. 이길 사람이 없긴 왜 없어.'

바다는 무심결에 왼쪽 허벅지를 꾹 눌렀다. 키네시스와 싸우다 갈린 타박상에 아직도 욱신거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상처는 이미 치료된 지 한참이었다. 역시 엉터리네.


"그렇게 매섭게 노려보지 말구, 진짜 나이프에 들어올 생각 없어?"

백모래는 쉽사리 풀리지 않는 표정을 보더니 손뼉을 경쾌히 쳤다.

"그럼 이렇게 해야겠네. 바다 넌 언제 처음 특기가 생겨났어?"

"살인자에겐 할 말 없어요."

"뭐 굳이 말 안해도 상관은 없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

백모래의 머리카락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온 달빛은, 그 상황에서도 아름다웠다. 바다는 유려하게 내려온 시선으로 붕대를 바라보았다. 백모래의 눈에 씌워진 붕대에 저절로 이상한 눈빛을 지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깐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정상이 아닌 게 확실하구나. 백모래는 시선을 느꼈는지 웃음을 비추었다.


"스푼이 어떤 곳인지 내가 알려줄게. 거긴 능력주의자들만 모아둔거야. 넌 머리가 좋으니까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지? 능력이 없으면 쉽게 버려진단 얘기라고."

바다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백모래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백모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특기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거니까 갑작스럽게 사라질 수도 있겠지. 만약 너에게 그렇게 강한 힘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생각해봐. 주변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니, 애초에 그 순간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제가 나이프에 들어가면 버림받지 않는단 걸 얘기하는건가요?"

백모래가 손가락을 꼬와 딱 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정답!"

그의 비열한 웃음이 달무리를 비집고 헤어나왔다. 바다의 온 몸에 살얼음같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천천히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름인데도 서늘한 공기가 몸을 휘감는 듯 했다. 분위기가 오싹하다 못해 냉동고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우리와 같이 있으면, 능력이 없는 무특기자라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어. 우린 특기에 너희처럼 크게 의존하진 않거든."

바다는 입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날 굳이 나이프로 섭외하려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요? 그쪽 말도 모순이 가득한 역설뿐이잖아요, 날 그렇게 멍청한 사람으로 봤나요?

그리고 그 말들을 억지로 집어삼켰을 때 쯤, 옅은 담배냄새가 안개처럼 스미었다.


"백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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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30 00:03 | 조회 : 987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벚꽃 엄청 예쁘게 폈더라고요!!!근데 제대로 구경도 못가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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