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알게 뭐람!

스푼에 돌아간 바다는 그 날 있었던 일을 다나에게 전했다. 루리를 어떻게 할지는 그쪽 사장님이 알아서 할 일이고, 문을 닫는 마지막 순간 세크룬의 찰진 쌍욕을 들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라며 말했다. 순간 바다는 옷을 부여잡던 매니저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벌 떨고 있던 그녀는 제발 비밀로 해달라며 부탁했다. 세크룬이 욕쟁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얻을것이 없었기에 바다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며, 옆의 다른 세 명도 당연히 그리 대답했다.


바다는 잠시 머뭇거리다 레드럼의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는 제법 구겨져있었다. 바다는 민망함에 건네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종이를 손으로 쭉 피고는 다시 다나에게 넘겨주었다.

다나는 연구실의 주소까지 상세하게 적힌 명함을 바라보았다.

"무슨 연구를 한다는 걸까요?"

옆에서 귀능이 명함을 같이 보며 물었다. 다나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마약밀매범과 연관된 건 마약으로 돈을 벌어서 연구자금을 얻으려는 속셈이겠지. 어느 쪽이든 불법인 건 마찬가지다."

다나는 이제 막 회사로 돌아온 사람들을 다시 불렀다.

"바다, 주아, 사사, 나가. 너희는 며칠 뒤에 이 연구소로 가라. 저번에 잡았던 마약밀매범들이 있는 곳이다. 가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와."

바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침 그녀도 밀매범들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하던 찰나였다. 마약이나 파는 놈들이 마녀빗자루를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분명 평범한 과학자 놀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주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흘러내릴 듯 붉은 노을색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나 쉬고 싶단 말이야, 다나!"

주아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방금까지 움직이는 시체를 보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포영화 뺨치는 일이었다.

입이 가벼운 주아는 금세 이 이야기를 스푼 직원들에게 말하고 다녔고, 그 소문은 비 오는 날 밤이면 스푼직원이 한 번씩 입에 담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소문은 스푼에 등장하는 좀비 이야기로 변질되었다. 스푼이 옛날에 폐병동 건물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헛소문에 바람을 실어주었다. 훗날 모든 것의 진원을 알고 있는 키네시스는 그저 웃음으로 이 사태를 흘려보냈다.


"근거리에선 주아 씨가 적격이니까요."

귀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주아를 달랬다. 다나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없었다. 주아의 징징거림을 듣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황급히 정리했다. 그리곤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바다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렸다. 묵직한 무게감에 바다는 약간 휘청였다. 주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바다에게 말했다. 이가 훤히 드러날 정도의 함박웃음이었다.

"바다야, 넌 나랑 다니자! 너랑 얘기해보고 싶었거든."

"네."

바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속으론 '손 좀 내려놓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지간히 무거운 게 아니었다. 운동 좀 한 사람의 힘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조금 더 힘을 준다면 어깨뼈가 아작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며칠 뒤에 연락할테니 그때까진 쉬어도 돼요. 서장님이 연락하실거에요."


-


"어서오세요. 친구분들도 데려왔네요?"

바다는 등 뒤로 선 세 사람을 가렸다. 들어오면 안된다고 할 순 있겠지만, 혹여나 셋에게 위협이라도 가할까 싶어서였다. 동그란 두 눈에 경계심이 뚝뚝 흘러넘쳤다. 하지만 다행히도 레드럼은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으며 그들을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마음껏 구경해도 됩니다."

"........"

바다는 대답도 없이 레드럼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그러나 서슬퍼런 의심의 눈초리는 걷히지 않았다. 재빠르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주아는 긴장따위 하나 없는 태도로 '이상한 놈들이네' 라며 중얼거렸다. 속삭임이라기엔 들으란 듯이 큰 소리였다. 레드럼이 움찔했으니 들은 건 분명했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긴 건물 내부는 제법 실험실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서적들과 책상 위에 널브러지듯 세워진 플라스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약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알코올 냄새가 코로 연기처럼 은은하게 스며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연구소같은 분위기를 냈던 건

"유리벽? 엄청 크네요."

방 한개의 크기만한 통유리였다.
나가는 통유리 안을 힐끗 보곤 관심없단 듯 지나쳤다. 사사또한 말없이 나가를 뒤따라갔다.

'아무것도 없어.'

바다는 유리에 손을 얹었다. 안에는 방금까지도 사람이 지냈던 것처럼 흔적들이 만연했다. 읽다 만 것 같은 책은 구겨져있었고 꺼진 담배꽁초에선 연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바다는 그 순간 유리의 사방이 막혀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담배냄새는 끔찍했다. 바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곳 안에 사람이 살 리는 없었겠지만,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가능했다. 사람이 아니지만 실험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주위에 만연했다. 순혈인간들이 생각하는 영물이나 혼혈 같은 것. 실험체로 딱이지 않은가. 평범한 사람과 비슷한 신체구조를 지녔으면서도 인권은 사람보다 낮은 것.


"그러고보니 목표가 뭐길래 이딴, 아니 이 짓거리, 아니, 이 실험을 해?"

주아가 팔짱을 낀 채 레드럼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몇 번 말을 고치긴 했으나, 초면에 반말을 하는 것이 거리낌없이 당당했다. 어쩌면 일부러 그리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인간의 소망을 이뤄주려 하고 있죠."

레드럼은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화를 참는 것이 눈에 환히 보였다.

"불로불사. 질병과 병균에도 당하지 않은 최고의 신체를 바탕으로 한, 죽지 않는 인간."


".........."

나가는 온 힘을 다해 얼굴을 찌푸렸다. 보진 않았으나 다른 이들도 그 순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약따위나 파는 '인간쓰레기' 가 아니라 '인간 쓰레기 사기꾼' 혹은 '인간 쓰레기 멍청이' 정도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레드럼은 그 생각을 인식했는지 얼굴이 발개졌다.

"농담 아니에요, 옛날 문헌과 서적에도 불사신에 대한 얘기는 많다고요. 우린 그것들을 해석하면서 연구 중이죠."

"과학만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하죠. 그래서 악마의 힘을 빌리는 거고요. 컨테이너 안에 고이 모셔둔 제 빗자루 기억나죠?"

"아..."

'그게 왜 있나 했더니.'

바다의 눈앞에 지푸라기가 엮인 빗자루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봐도 동네 시장에서 파는 나뭇가지가 엮인 듯한 형상이었다. 소중하다거나 중요한 것과는 거리감이 상당히 있었다. 어쨌거나 그 빗자루는 거의 혜나의 소유가 되어있었다.


"저....누님, 책장을 실수로 엎었는데 순서를 모르겠어요."

경호원 한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문을 열었다. 레드럼은 '그럴 줄 알았다!' 라 외치며 혀를 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방 한구석에 놓여진 작은 박스를 뒤적거렸다. 그 속에서 명찰이 서 너개 나왔다. 레드럼은 네 사람에게 그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죄송하지만 금방 다녀올게요. 버튼 같은 거 누르지만 않으면 둘러봐도 괜찮으니 견학한다는 느낌으로 보시면 돼요."

레드럼은 명찰을 매는 시늉을 해주었다. 그리곤 진짜로 매는지 확인도 안 한 채 자리를 나섰다. 경호원이 하도 재촉을 해댄 탓도 있는 것 같았다.


"멍청한 놈들."

주아는 킥킥대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명찰은 제자리에 벗어던졌다. 바다조차도 해야할 이유를 못찾겠는지 손에 들고만 있었다. 그녀는 곧 놓여져있던 박스 안에 도로 던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나가."

바다는 나가에게로 돌아보았다. 나가는 기다렸단 듯 대답을 쏟아냈다.

"선배 부탁대로 들어오는 길에 건물을 투시해봤는데, 생각보다 내부구조가 복잡해보였어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자세하겐 못 봤지만 이 안쪽으로 더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았고요."

"그럼 간단하네. 1명씩 다 나눠서 돌아다니자."

"하지만 선배, 그러다 공격이라도 받으면 어떡하죠?"

바다의 걱정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안보에 대한 불안은 아니었다. 혼자 떨어져남았을 때의 다른 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적어도 바다는 자기 자신의 안전만큼은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주아는 그런 바다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활짝 핀 얼굴을 했다.

"걱정 마. 나나 사사나 웬만해선 안 지니까. 바다 너는 내 특기 뭔지 모르지? 체술이야 체술, 그러니까 싸움 붙으면 내가 다 때려눕힌다는 뜻이지!"

주아는 그 말을 증명하듯 주먹을 빠르게 앞으로 내밀었다. 봄날에 피어오르는 벚꽃처럼 밝디 밝은 낯빛이었다.

바다는 민망했는지 머리를 살며시 매만졌다. 주아는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어깨를 힘껏 두 어번 쳤다. 순간 바다의 눈에 눈물이 핑 하고 맺혔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 1시간 정도 뒤에 여기로 다시 모이자. 레드럼이 찾으면 적당히 어디 숨거나 하고. 다들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한다!"

주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아이같은 웃음을 내비쳤다.



-



'이상하다.....이상해.'

바다는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전부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건 분명 주아 때문이다, 바다는 그리 확신했다.


주아 생각만 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가슴이 쿵쾅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메스껍기도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절대 기분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건드려선 안될 것을 건드렸을 때의 위험신호 같았다. 심장이 마치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숨쉬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워야 했다.


분명 어디선가 느껴봤던 분위기이다.
노을처럼 붉은 머리카락도, 저 활기찬 성격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 것까지도 누군가를 닮았다.

'누구를?'

"아...."

바다는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관자놀이를 힘껏 짓눌러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바다는 복도 한복판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내색하지 않으려해도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헛구역질 몇 번만 하면 바로 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바다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세웠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몇 번 하자 상태는 꽤 괜찮아졌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됐어. 주변탐색이나 똑바로 해, 바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기시감이 좀 느껴지면 어때서?
바다는 그렇게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불안감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챙그랑!

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소음에 바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방 안에서 난 소리가 분명했다.

손잡이를 움켜쥐자 쇳덩이의 차가움이 발끝까지 스미는 듯 했다. 찰칵이는 소리로 봐선 열리지 않았다. 분명 근처에 스위치가 있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코너 옆의 작은 버튼이 눈에 띄었다. 순간 버튼 같은건 만지지 말라던 레드럼의 경고가 떠올랐다.

'알게 뭐야.'

바다는 다시 한번 손잡이를 잡았다. 방문은 그제서야 유려하게 움직였다. 바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한 뼘 정도만을 열고서 숨을 죽인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들어올 때 보았던 커다란 통유리가 방 안에도 있었다. 유리 안에는 깨져서 널브러진 유리병이 있었다. 아무래도 맥주병인 듯 했다. 소음의 원인이었다. 그 뒤로 누군가의 보랏빛 신발이 있었다. 바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발에서 수상한 자의 얼굴까지 타고 올라갔다.

"뭐야. 너 뭐하고 있는 거야."

유리가 두꺼워서인지 말이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바다는 입모양으로 얼추 뜻을 해석하려했다. 이미 들켜버린 이상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그 남자는 화가 난 듯 했다. 그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서 바다에게 방으로 들어오란 손짓을 했다. 바다는 순순히 그의 제안에 따랐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무전기 비슷하게 생긴 것이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건가요?"

바다는 무전기를 든 채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에 가져다대는 시늉을 했다. 따라하라는 의미였다. 바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잠시 치직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연구 도와달라고 불려왔지?
어쩐지 오늘 내 방을 옮기더라."

담배 때문인지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바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 진심 어린 슬픔이 가득 실려있었다.

통유리는 거대한 우리였다. 실험체를 가두는 우리. 그 남자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좁디 좁은 공간을 자신의 방이라 정의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절대 적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바다의 표정을 살피더니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짐작했겠지만 이건 평범한 연구가 아니야. 생체실험이지."

"목표는 불로불사가 맞나요?"

"뭐? 그것들이 그렇게 설명했어?"

남자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어쩌면 황당함이 더 앞선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자세를 가다듬은 그는 작은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었다. 눈썹을 가릴만큼 길게 뻗친 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피다 만 담배꽁초를 다시 주워담아 한 번 빨아들이고선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실제론 다른 목적이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특기란 거와 관련있댔어. 대충 초능력 비슷한 거랬으니까. 너도 그 특기자란거지?"

"어....."

바다는 당황했는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 같았다. 남자는 관심없단 듯 시선을 돌렸다.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됐어, 레드럼이 구하는 조력자라면 특기자가 분명하니까. 대답할 필요없어. 그냥 너희는 이 연구에 가담하지 않고 실험체가 된 사람을 구해주면 돼. 의무는 아니지만....."

베놈은 뒷말을 흐렸다.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명령하는 말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바다는 그 마음을 너그러이 이해했다.

"갇힌 사람이 또 있나요?"

"있어. 2층에 트래시란 여자애. 내 혈액을 그 애 몸에 계속 주입중이야. 잘못하면 위험해."

바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충격이 그녀의 온 몬을 휘감는 듯 했다.

"오늘은 살아있었어. 오늘도 내 피를 가져갔으니까.
하지만...당장 1시간 뒤에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거야."


'그래서 화가 났던 거구나.'

바다는 그제서야 깨진 유리병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끝나지않는 연구란 변명의 비인도적인 실험을 향한 단순한 화일수도, 도와달라 소리치는 괴로운 비명일 수도 있다. 바다는 그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길게 내려온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흘러내리려는 땀이 옷자락에 적셔졌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수혈하러 오는 레드럼 일행의 개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트래시는 졸작이라 했다. '그 분' 이 계셨다면 지금쯤 연구는 벌써 성과를 냈을 것이라며, 트래시가 목표의 반만이라도 따라잡는 순간 죽일 것이라며 떠들어댔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리벽을 깨부수고 나가 당장이라도 레드럼의 목을 녹여버릴까 생각했지만, 소용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오물에서 태어난 자라 해도 그는 약했다. 유리를 녹이는 것만으로도 온 기력을 다 쓸 것이었다. 어찌저찌 운좋게 빠져나가도 그는 죽는다. 고위 관리들은 그를 레드럼에게 팔아넘겼으니,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가 도망치는 것을 내버려 두면 자신들의 돈이 빠져나가고, 그 놈들은 그꼴을 넋 놓고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

".........."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엔 서먹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 넘기는 소리마저도 유리가 깨지던 순간보다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 한여름의 사막을 분위기로 나타내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바다는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앞의 이 남자도 척 보기에 영물 아니면 혼혈이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자유로운 곳에, 다른 이는 사방이 틀어막힌 좁고 답답한 곳에 갇혀있었다.


"....베놈이야."

바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담배연기를 한 번 불어냈다. 바다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눈동자가 붉었다.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 이름. 베놈이야."

"........."

바다는 말없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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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22 00:03 | 조회 : 992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낙원의 이론이란 책을 요즘 읽고 있는데 겁나 재밌어요...거기에 쿠키 다 쏟아붓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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