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요즘 유행

다급하게 달려온 듄은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바다는 처음 보는 듄의 흐트러진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다는 듄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달밤에 그려진 그림자가 춤을 추듯 으스러졌다.

"새겨들으면 안됩니다, 바다 씨. 꼬임에 넘어가면 안돼요!"

바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새겨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나이프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보단 어서 손목이나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싶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듄은 그제서야 다급하게 손을 거두었다.

"엇. 듄이잖아? 아직도 스푼에 남아있었어?"

백모래가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섬뜩한 웃음까지는 미처 숨기지 못했다. 미소조차도 범죄자같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손목을 문지르던 바다의 온 몸이 다시 얼어붙었다.

"분명 히어로 그만 둘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한테 한 번 거하게 털렸잖아."

듄이 티나게 어깨를 한 번 떨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바다는 듄과 백모래를 번갈아보며 상태를 살폈다. 무엇을 떠올린 건지, 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리 험한 말도 한 것 같지 않았는데.

"바다. 너 아까 살인자랑 말 안 섞는다 그랬지? 그럼 넌 듄이랑도, 사사랑도 얘기하면 안될텐데."

고른 숨이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땐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고, 백모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해할 수 있었다.

백모래는 그리 속삭였다.

"듄은 자기 동료를 죽였거든."


"........."

바다는 말없이 듄의 고개 숙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듬직한 어른같던 그가, 이젠 길잃은 꼬마아이보다 더 작고, 또 초라해 보였다.

"사사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바다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쓴 약을 먹은 듯 미간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못 본 척 할 수가 없지. 머릿속으로는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들이 다시 재현되었다.

축 늘어진 주아를 업어들고 스푼으로 이동한 뒤, 사사는 뒤늦게 나가와 함께 회사로 복귀했다. 순간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는 듯 했지만 주아를 안느라 옷에 배인 냄새라 생각했다. 코트에서 떨어진 권총 한 자루를 보고도 눈치채지 못했다.

백모래의 말을 듣고, 조용히 머리를 굴릴 때에서야, 비로소 퍼즐조각은 맞추어졌다.

생각해보니 그 작은 총 한자루엔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고, 무엇보다 계단 밖의 다른 이들의 대화가 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사사의 징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여기 좀 볼래?"

백모래가 가벼운 날개짓처럼 손뼉을 쳤다. 듄이 으스러질 듯 몸을 움츠렸다.

"아직 다나도 모르는 일이지, 듄이 자기 동료를 죽였단 건. 내가 자세히 설명해줄까?"

백모래의 옷자락이 뜨거운 바람에 휩쓸렸다. 바다는 덩달아 춤추는 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니까. 게다가 지금 이 사람에게 듣지 않으면 다시는 알지 못할지도 몰랐다. 다나도 모르는 일이라 했으니.

'....범죄자가 하는 말이 맞는건진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했다. 지금의 그녀로선 백모래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니까. 그러니 섣불리 듄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칠수도, 지금 당장 얼굴을 한 대 갈길 수도 없었다. 괜히 움직였다 듄이 다치면 안되니까.

"음...언제더라. 그래. 요즘같은 날씨였던 것 같네. 후끈한 바람이 엄청 불었거든."

타이밍이라도 맞추었는지,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백모래는 말을 이었다.

"우린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쳐들어온 스푼이, 우릴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싸우러 왔더라고."

바다는 듄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를 곁눈질했다. 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백모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도 총공격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우릴 얼마나 얕봤으면 그 수로 싸우러 왔을까?"

백모래는 한걸음씩,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비열한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간신히 억누르는 것이 눈에 띄였다. 바다는 뒷걸음질 치지도 못한 채, 온 몸을 긴장으로 포장시켰다.

"거의 전멸했지, 몇 명 안 남고. 듄이 속한 팀원도 다 죽었어.
그런데 딱 한 명 살아있었지. 겨우 숨이 붙은 하나. 그리고 그 옆엔 죽은 듄의 절친이 있었어."

듄의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듄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이미 죽은 절친 때문에, 그 살아있던 동료는 버리고 나왔지. 똑똑한 머리를 써서 한 번 생각해봐. 바다.
이게 살인이 아니면 뭐지?"

백모래가 의기양양만 태도를 보였다. 느끼는 게 있지 않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어깨는 거만하게 곧아져있었고, 반대로 듄의 어깨는 구겨질대로 구겨져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바다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듄은 그 때 부상을 당했을 테고, 지금 그 행동에 대해 이렇게나 후회하고 있었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살인자라 손가락질 받을 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백모래가, 듄을 비난한다니.

'개소리도 정성껏 하는 재주가 있어.'

빳빳한 고개를 치켜든 바다가 날카롭게 고른 숨을 뱉어냈다.

"그럼 백모래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 하나로 이렇게 눈물지은 적이 있나요?"

"........"

백모래의 반짝이는 눈이 붕대 사이로 새어나왔다. 바다의 간결하나 단호한 말 한마디가 그의 귀에 박혔다. 그의 심정을 파고들었음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의기양양한 어깨가 잠시 주춤할 리 없었다.


바다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알을 파내겠다는 각오로 백모래를 흘겨보았다.

"음....그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는데."

백모래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그리곤 다시 바다와 그 뒤의 듄을 번갈아보았다. 그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더듬는 것처럼, 초점이 그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다와 만난 순간 이래 처음으로 뒷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그냥 갈게. 하지만 한번쯤 생각은 해봐. 애초에 내 목적은 널 나이프로 영입하는 거였으니까."

"끝까지..."

바다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저속한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 했다. 그녀가 눈 한 번 깜짝하자 백모래는 안개처럼 스미듯 사라져버렸다. 좌우로 크게 고개를 돌리어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말할 정도로 백모래는 발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바다는 한숨을 쉬었다.

"듄 선배."

바다는 고개를 돌려 듄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바다보다 한참은 컸을 듄은 얼굴을 숙여서인지 바다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바다는 어디를 봐야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움츠러든 어깨에 겨우 시선을 걸쳤다.

"우선은...."

무어라 위로해야할 지 모르겠다, 바다는 그리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바다 자신조차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눈앞의 이 사람은 울고 있으니. 바다야말로 당장 울고 싶어졌다.

"죄송합니다. 바다 양."

바다의 말을 끊은 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보다 아래에 서 있던 바다는 그의 표정변화를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입가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전부.

그는 말없이 볼에 흐르는 투명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 뒤에 겨우 튀어나온 말은,

".....데려다..줄게요."

누가 누구를 데려다준다는 건지. 입장이 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한마디였다.

바다는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처지가 물에 젖은 강아지보다 처량해보였기에, 목 놓아 우는 아기새보다 슬퍼보였기에 바다는 부정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감사합니다.' 라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훌쩍이던 가로길을 지나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조명빛을 밟고, 겨우 도착한 집 앞에서 듄은 다시 한 번 울음을 꾹 삼켰다. 터져나온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는 걸 보고 있자니 바다는 자기 눈매가 더 쓰렸다. 머뭇거리며 손가락만 꼼지락대다,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손수건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렇게 듄이 집 앞을 벗어나고 나서야 바다는 조용히 집에 발을 들였다.


털썩, 거리며 천이 숨을 죽이는 소리가 났다. 쓰러지듯 엎드린 침대에서 눅눅한 냄새가 흩어졌다. 바다는 있는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세웠다. 며칠 전 하도 눈물을 흘려서 그런가 싶었다. 그 생각이 들자 짜증이 훅 가슴을 밀고 올라왔다.

바다도 힘겨웠다. 전부 내려놓고, 지금이라도 기억을 다 없앤 채 원래대로 생활하고 싶었다. 그 전 생활이 더 좋았다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힘들었다. 꼭 오늘의 일만 아니어도 울분 터지는 일은 있었다. 얼마 전의 어린이집 화재사건, 세크룬과 루리의 일, 그리고 결국 오늘 터져버린 살인.


회사 선배가 하루아침에 죽었다.
꽃가루가 흩날리듯 피가 튀기는 모습을 눈앞에서 봤고, 죽기 싫다고 울다 두 눈을 감는 선배를 끌어안았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그때 선배의 몸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 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져내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배는 울컥 쏟아지는 피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스푼에 괜히 들어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였다고. 괜히 영웅이 되어보겠다고 양지로 기어올라와 이렇게 개죽음을 당한다고.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리를 얻어맞다 못해 파쇄기에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바다도 누군가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그 사람이 등을 토닥이며, 고생했다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지쳐 잠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울고 있는 듄의 옆에서 같이 징징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회사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슬퍼하고 있었는데, 나도 좀 봐달라고 떼를 쓸 순 없었다.


혼자 방 안에서 울다 잠드는 것은 유난히 공기를 차갑게, 그 감각을 더 선명하게 했다.

'짜증나....'

능숙하게 닦여진 눈물이 베개에 스며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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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언니!"

삐걱대는 문을 열자 혜나가 기다렸단 듯 바다에게 뛰어올랐다. 바다는 희미한 안개꽃같은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평소보다 확연히 지쳐보이는 눈짓이었다. 밝은 반짝임이 말라있었고, 눈 아래가 검은 빛이 돌았다.

혜나가 눈치좋게 알아차리고 물었다.

"며칠동안 안와서 걱정했어. 어디 아팠어?"

"으응. 머리가 좀."

바다의 핑계에 혜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바다의 코앞까지 다가와,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하나하나 힘을 실어가며 말했다.

"요즘은 아픈 게 유행인가봐. 우리 언니도 아프다면서 한동안 못 나올거래."

'유나가?'

다나는 오는길에 마주쳤으니 아마 남은 유나 얘기인가 싶었다. 그러고보니 키네시스는 봤지만 항상 붙어다니던 유나가 보이지 않았다. 방학이 되고 나선 제이의 아지트에도 자주 가지 않았으니 소식을 몰랐다. 조만간 가볼까 싶었다. 진짜로 아픈 건가.


"바다 선배."

멀리서 나가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바다는 느리게 그의 얼굴을 훑는 것으로 대답했다.

"서장님이 이번 한 주는 쉬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그 기간동안 훈련을 시킨대요."

"훈련이요?"

"곧 있으면 선생님도 오실 거라는데요."

바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의 조심스런 눈치가 볼 옆으로 쏘아졌지만 모른 체 했다.


며칠 전 백모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대로 된 훈련 받은 적 없지 않냐' 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

다나가 왜 갑자기 훈련을 시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바다는 지레 짐작하기를 인원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스푼은 원래 인력난이기도 하고, 또 위험한 직업인 만큼 죽는 사람 수도 많으니까. 더 강하게 키워서 그런 일 없게끔 만드는 거겠지. 마침 주아 선배가 죽었으니까.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어쩌면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여러분을 가르칠 선생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에도 담배향이 묻어날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 떨어진 낙엽같이 바랜 색감이 비쳤다. 바다는 얼떨결에 듄에게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옆에 같이 서 있던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양, 잠시."

듄은 손짓으로 바다를 불렀다. 그녀가 몇 발자국 더 다가가자 듄이 허리를 굽혔다.

"며칠 전엔 감사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백모래와 만났을 때 들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비밀유지에 대한 감사.

바다는 곤란함에 손사레를 쳤다. 싹 뒤바뀐 표정의 온화함은 덤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굳이 감사인사를 하실 것까진 없었어요."


만일 그 정보가 큰 이익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바다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그리 가치 있는 정보는 아니라 판단했다. 무엇보다 그때의 듄은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처량해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나 힘겨워하는데, 더 괴롭게 하는 건 바다도 싫었다. 이득도 없이 실만 있는 행동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듄은 간단하게 어떤 훈련을 할 건지 설명을 시작했다. 대충 학교 체육시간에 할 것같은 종목들 뿐이었다. 처음에 바다는 왜 많은 사람들 중 하필 나가와 자신 둘만 하는 것인지 궁금해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쌤, 저 너무 힘들어요...."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단호한 대답에 나가의 팔이 육안으로 보일만큼 부들거리었다. 손바닥의 땀 때문인지 자꾸만 철봉이 미끄러졌다. 바다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지만, 힘없이 풀리는 팔 때문에 흙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15초....."

듄은 말없이 스톱워치를 초기화했다. 체력도 없고 실력도 없단 소리나 듣던 듄도 이것보단 나은 기록이었다. 차트에 적혀있던 기록은 잘 나온 기록이었다.


"죄송합니다."

바다는 후끈하게 붉어진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바람이 불어도 시원한 것 같지도 않았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덩달아 떨어진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체력테스트만 해보려고 했으니까요. 진짜 훈련은 내일부터 할 겁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도 좋아요."

듄은 바닥에 정갈하게 내려둔 짐들을 차곡차곡 손 위에 쌓았다. 작은 아령 두 개, 악력기 하나, 스톱워치 그리고 기록들을 적어둘 차트와 볼펜. 듄은 턱끝까지 차오른 짐들을 겨우 들고 두 사람에게 얕게 고개를 숙였다. 바다와 나가는 송글하게 맺힌 땀을 닦고 덩달아 고개숙였다. 거칠게 불안정한 호흡은 덤이었다.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려던 듄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옅은 갈색의 머리가 날릴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왜인지 말은 머뭇거렸다. 바다가 땀에 젖은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자 그제서야 듄이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나가는 듄의 뒷통수를 보았다. 듄에게서 희미한 담배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짐이 무거운 와중에도 니코틴은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바다 선배, 듄 쌤이 선배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글쎄요. 딱히 없는데요.."

바다는 듄과 얽혔던 일들을 빠르게 훑었다. 감사인사할 만한 일은 백모래와 만났을때 일 뿐이었지, 사과할 만한 건 없어보였다. 바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유는 바로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바다 선배!"

나가가 막 피어난 개나리처럼 밝게 바다의 이름을 불렀다. 바다가 커튼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뽐내며 나가에게 다가왔다. 바람결에 나가의 볼에 머리칼이 닿았을 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가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매만지며 바다를 흘끗 보았다. 평소처럼 옅은 웃음이 베어져있었다.

'선배는 괜찮나보네. 난 고기만 보면 비위상하던데.'

며칠 전 나가의 아버지는 오랜만의 외식제안을 했다. 나가는 당연히 수락했고, 나가의 부모님은 맛있다는 말을 연거푸 하며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생고기가 나오자마자, 나가는 화장실에 들어가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기 한점 입에 대지도 못했다. 그릇에 담겨진 선홍색 핏물이 주아를 떠올리게 만들자 나가는 오싹한 공포와 함께 헛구역질을 해버렸다. 숲에서 녹아버린 베놈과 트래시의 시체가 나왔다는 소식도 톡톡히 한몫했다.
당연하게도 그 날은 세상 최악의 외식이 되었다.


"나가 씨, 바다 양!"

듄이 다급하게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평소보다 더 진한 담배향이 온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에, 바다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나가는 대놓고 앞의 공기를 없애겠단 포부로 손을 휘저었다.

가쁜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듄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바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예고했던 훈련을 못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아마 내일로 미뤄야할 것 같으니, 오늘은 혼자 체력훈련이라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듄은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바다와 나가는 손사레를 치며, 그럴 필요 없다며 얘기했다. 오히려 힘든 운동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듄은 한 번 튕겨보는 것도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웬만해선 그래도 시간 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같이 예의상이라도 말할 법 한데. 바다는 듄이 어지간히도 바쁜 선약이 있나보다 싶었다.


마찬가지로, 한 시간 정도 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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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4-06 00:00 | 조회 : 1,020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나비보벳따우 봇보벳띠~*^^* 이거 완전 내 최애곡이잖나비보벳따우 봇보벳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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