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한가롭긴 한데

"아, 제이."

바다는 새빨개진 얼굴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손가락의 떨림이 전화기까지 연결되었다.

그녀의 뒤에선 나가와 혜나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유나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적잖이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새 노을이 지고 있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유나는 '세이렌은 무슨...' 하며 중얼거렸다. 부풀었던 기대감이 풍선 바람 빠지듯 사라졌다.

바다는 세 사람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심호흡을 두 어번 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려?"

제이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딱히 대답이 궁금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찾아낸 정보들을 바다에게 알려주었다.

"네가 부탁한 cctv 확인 해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

"아...정말이에요?"

바다는 적잖이 놀란 모습을 보였다.

"일단 알겠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제이."

전화를 마친 바다는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내렸다. 회사 안은 에어컨의 한기로 충분히 시원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하지.'

바다는 앞으로 다시는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명심에 명심을 몇 번이고 했다.

바다는 모여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가 제이의 말을 전했다.

"다들 들어보세요. 세크룬 씨가 당한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다른 건 정확한 날짜를 모른대서 제일 최근의 일로 제이에게 부탁했어요. 매니저 님이 얘기한 며칠 전 세크룬 씨 우편함의 비둘기 말예요."

바다는 세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하고 있음을 확신하자 그녀는 결론을 말했다.

"제이가 그 시간대의 주변 일대를 전부 확인했는데, cctv에는 아무것도 안 찍혔대요."

혜나는 탐정마냥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음....그렇구나. 경호는 엄청 어려운 거였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어!"

검지와 엄지로 턱을 괸 채 그녀는 장엄한 포즈를 취하며 외쳤다.

"범인은 특기자야, 그것도 상당한 실력의!"

유나가 곧바로 혜나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부드러움보단 억센 손길이었다.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였다. 혜나는 머리가 엉켰는지 짜증을 냈다.

"장난 아니야! 바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어? 음...."

바다는 당황한 눈치였다.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띄운 그녀는 잠시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확신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꺼내고 나서도 모양이 잡힐 정도로 우겨넣었다니까.."

바다의 머릿속에 사진으로 본 비둘기 시체가 떠올랐다. 네모반듯하게 구겨진 시체는 생각만해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비위가 약한 나가가 직접 봤다면 아마 실제로 구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웬만한 사람 힘으론 그렇게 하기 힘들겠어요."

나가도 혜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했다. 그제서야 유나는 무안했는지 혜나의 머리 위에 얹은 손을 내려놓았다. 혜나가 째려보는 눈길이 느껴지자 유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 자리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기자와 관련 있으면서도 자신들과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집단,

"나이프? 나이프일 리는 없다.
걔네들이 그렇게 한가로울 리가....."

전화를 받은 다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몇 번 만나본 나이프의 보스 백모래는,

"내 사랑은 말이야~"

"연애란 건~"

"사랑은~"

사랑, 사랑, 사랑......


'한가롭긴 하네.'

다나는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그녀는 귀능이 들고 있는 전화기에 다시 얼굴을 갖다대었다. 건너편의 나가가 '여보세요?' 라며 물었다. 다나는 잘못된 정보를 정정해주었다.

"어쨌든, 한가로운 놈들 맞긴 하지만 굳이 세크룬을 노릴 이유가 없는 놈들이다.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할 일도 없고. 얼간이처럼 보이긴 해도 그렇게 멍청이는 아니야."


혜나는 통화음이 끊긴 것을 듣자마자 나가에게 물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래도 순간이동은 고난도 특기잖아, 나가 오빠는 이런 일 할 수 있어?"

"물건만 이동시키는 건 못해서...
물건도 이동시키려면 잡고 같이 이동해야 하거든."

"바다 언니는?"

"나도 마찬가지야."

"봐, 순간이동은 고난도의 특기야. 그런데 바다 언니랑 나가 오빠처럼 천재인 사람들도 물건만 옮기는 건 못하잖아.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천재라니...."

바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나가도 그리 다른 반응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니.

유나는 "키네시스도 특기 잘 써." 라며 혜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혜나는 한껏 찌푸린 미간과 입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던 유나는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정말 특기라면 위험한 거잖아.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테니까!"

바다는 혜나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특기자가 스토커라면 피해자의 입장에 선 세크룬이 더 위험해진다. 바다는 머리를 질끈 묶으며 말했다.

"......그럼, 우선은 내가 순찰을 돌고 올게요. 주변에 스토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셋은 여기 남아서 세크룬을 보호해줘요."

애초에 그들이 의뢰받은 것은 세크룬의 경호원 역할이었지 탐정이 아니었다. 바다는 그것을 의미하여 말했다.

"그럼 내가 같이 갈게!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혜나가 바다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작은 손가락이 꼬물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는 혜나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혼자 간다 해도 딱히 위험할 것은 없을 것 같았지만 둘이 더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멀리서 나가가 바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혜나야, 그냥 오빠가 갈게'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그렇게되면 세크룬을 보호할 사람이 부족해진다. 유나가 예전보다 특기를 안정되게 사용할 순 있어도 그것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안돼...'

나가는 눈물을 머금었다.


-


'덥다..'

바다는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밤길을 걸었다. 회사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새 밤하늘에 달이 떠 있었구나. 바다는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크룬의 경호원 역할로 포크에 온 것 맞지만, 오늘 하루 한 일이라곤 노래 녹음하기, 세크룬 춤 따라하기, 같이 셀카찍기가 다였다. 물론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경호겠지만 바다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건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놀러 온 게 아닌가.


그때 바다의 앞으로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날이 바닥을 뚫을 것처럼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턱에 가까스로 닿을 듯한 똑단발과 전형적인 마녀모자. 괴상한 구두굽, 그리고 원피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구실의 하얀 가운. 바다는 특이한 외관에 홀린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레드럼이에요.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

"언니. 아는 사람이야?"

바다는 혜나의 손을 꼭 잡았다. 혜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다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레드럼이라는 여자 옆으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이 서 있었으니,

'제이가 말한 그때 마약밀매범들이구나.
신고되지 않았다던...'

"빨리 가야해서 간단하게 얘기해주셨으면 하네요."

바다의 입가에서 한 말이 맴돌았다. '마약밀매범들과는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그들을 놓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신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인지 이유를 알고, 이들을 다시 감옥에 처박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오늘은 간단히 소개만 할 거니까요."

레드럼이 손짓하자 옆의 한 남자가 종잇조각을 한 장 내밀었다. 바다는 레드럼에게서 종이를 건네받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곧이어 그녀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레드럼은 이제 볼 일 다 봤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다음 번에 보는걸로 하죠." 란 짧은 말과 함께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혜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뼉을 한 번 쳤다.

"바다 언니, 저 사람들 그때 그 밀매범들 맞지? 그냥 아까 다 잡아버리지 그랬어!"

바다는 실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혜나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음...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거 같아."

"헐. 이게 뭐야."

혜나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증명사진처럼 보이는 레드럼의 작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가장 큰 글씨로는 '레드럼의 마약판매소' 라 적혀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글이었다.

'쓸데없이 자세하네.'

바다는 명함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이름부터 그때 그 장소, 전화번호까지 다 상세히 적혀있었다. 마약이나 파는 사람들이 이렇게 개인정보를 흩뿌리고 다녀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됐어 혜나야. 이만 가자."

바다는 작게 혀를 차며 무릎을 굽혔다. 혜나의 손을 잡은 지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이 발을 디딘 배경은 포크의 사무실이 되어있었다. 혜나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더 이상 신기해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을 걸어다니는 바다의 신발소리가 자박거렸다. 바다는 자신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려 일부러 소리를 더 크게 냈다. 행여나 놀라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는 다른 이의 외침에 묻혀버렸다.

'싸움? 무슨 소리지?'

바다가 들어가려던 문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세크룬의 사무실이었다.


"어떻게 네가........할 수가 있어?!"

점점 격정적이어지는 목소리는 누군가와 맞서고 있었다. 심상치않음을 눈치챈 바다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무슨 일이에요?!"

"바다..."

유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바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잘 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유나를 먼저 볼 겨를이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루리와 그런 루리를 염력으로 누르는 나가, 그리고 세크룬과 함께 구석에 쭈그려앉은 매니저였다.


"........"

바다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팔짱을 꼈다. 상황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바다는 그저, 혜나와 함께 스토커가 주위에 있는지 확인하러 잠깐 나갔다 온 것 뿐이었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기껏 해봐야 10분 이내일 것이다.

그런데 다녀오니 루리는 죄인이 되어있고 세크룬은 화가 나 있다. 두 사람의 주위에는 키다 만 라이터가 굴러다녔고, 세크룬은 기름이라도 뒤집어씌었는지 온 몸이 미끌거렸으며, 매니저는 방금 전까지 말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알 만 하네.'

그 작은 사무실 안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바다의 작디작은 한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릴 정도였다.

바다는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녀는 세크룬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수건을 염력으로 띄워 세크룬에게 주었다. 그리고 루리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루리 씨. 세크룬 씨에게 불을 붙이려했죠?"

루리는 말이 없었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다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평소의 자상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랬어요?"

혜나가 어느새 유나의 옷깃을 잡으며 루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이해가 안 돼. 둘은 팬층도 다르고, 루리 언니도 세크룬 언니 못지않게 인기가 많잖아. 굳이 악질적인 스토킹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웃기지 마!"

혜나의 말에 루리가 반응했다. 모두가 숨죽여 루리의 악 받힌 말을 들었다.

"'저런 새대가리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더 기분나빠!"

"새대가리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루리!"

매니저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바다는 그런 매니저에게 손을 뻗으며 제재의 행동을 취했다. 매니저는 잠시 주춤하며 말을 멈추었다. 반면에 루리는 더 화가 난 듯 했다.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어. 하루에 3시간도 못자고 지칠 때까지 춤만 춰대고 노래만 불렀어. 근데 너희 순혈 인간들 눈에는 징그럽다고 몇 년이나 데뷔도 못하고 밑바닥에서 굴렀지."

그 순간 모두가 루리의 모습에 눈이 갔을 것이다. 뱀처럼 보이는 머리카락부터 곤충과 비슷한 녹색 눈까지. 그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징그러움' 이란 건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바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꼬리표는 언제까지 따라붙을까 싶었다. 10년이 지나면 사라지려나. 아니 100년? 500년?
그때가 되면 다들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가능할까?


"그래서 혼혈이라는 특징을 다 죽였어, 파충류 눈이 징그럽대서 3번이나 수술을 해서 왼쪽 눈은 잘 보이지도 않아! 그렇게 버텼는데, 그래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세크룬 너는....."

루리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났다. 바다는 루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단지 순혈들이 더 좋아하는 동물이었다고 노력도 없이 모든 걸 다 얻었지. 네가 혼혈 아이돌 붐을 낳았다고 떠들어댈때마다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너흰 내 심정을 절대 이해 못해. 루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바다는 잠자코 그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루리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은 분명했다. 고개를 휙 돌리자 세크룬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자격이라면 당사자인 세크룬에게 있겠지.


루리는 혼혈로서 더 주목받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동등한 위치의 같은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그 어떤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으로 보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같은 가수라는 직업에서 대해지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바다에게는 루리 또한 또다른 희생자일 뿐이었다. 분노를 세크룬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루리의 잘못이 분명하나, 시작점은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말뿐인 평등일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르다' 라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개념인지. 바다는 그 날 하루종일 그에 대해 고민했다.



-
-
-


키네시스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지 신발을 몇 번 바닥에 쳤다.

"총알은 염력으로 다 튕겨낼 수 있으니까 제가 가서 제압하고 올게요. 선배들은 여기서 숨어있으세요."

"죽이진 마! 내가 한 대는 때릴거야!"

주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키네시스가 서 있던 자리에 소리쳤다. 그제서야 사사는 전화기를 접고 벽에 기댔다. 한숨 고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사."

주아는 사사의 이름을 불렀다. 적막함 사이에서 사사가 고개를 돌렸다.

"넌 그 놈이랑 붙게 되면 어쩔 거야?"

"....."

사사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누굴 말하는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알 수 밖에 없었다. 아군이었지만 적군이 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사사의 머릿속에 들판보다 푸르른 긴 머리칼이 떠올랐다.

주아는 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호탕한 웃음소리로 소리쳤다.

"옛정에 취해서 후회할 판단을 하지 않았으면 하네!"


순간 챙그랑,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야!"

주아는 놀라 소리를 빼액 질렀다. 붉은 색감의 머리카락이 좌우로 흩날렸다. 키네시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창문으로 들어왔다.

"아. 너구나."

주아는 짧은 머리를 몇 번 쓰담으며 민망함이 섞인 당황한 표정을 삼키려 했다. 그 속에서 씁쓸함이 짧게 스쳐지나간 것이 키네시스에게 보였다. 하지만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아는 키네시스가 던져둔 물건을 보았다. 눈앞에서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주아는 앞에 쓰러진 남자를 발로 툭 쳤다. 감각이 없는지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아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기절했어? 몸에 힘이 쭉 빠졌네."

"아뇨. 죽었어요."

"뭐?!
어쩌다가? 힘 조절 잘 했어야지!"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였어요."

키네시스의 억울한 표정은 사실임을 호소하고 있었다. 주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리에 비쳐진 햇빛이 그녀의 눈에 퍼즐조각처럼 딱 들어맞았다. 선홍빛 보석이 아른거렸다.

"분명 우리를 쐈잖아!"

주아의 말을 증명하듯 쓰러진 남자의 품에선 긴 저격총이 나왔다. 절그럭 거리는 쇳소리가 바닥을 쓸었다. 키네시스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공포영화도 아니고!"

주아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온 팔에 털이 곤두서있었다.


사사는 한쪽 다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시체는 죽은 지 오래되어보였다. 이미 온 몸의 수분이 증발해 미라마냥 말라있었으니 확실했다.

'적어도 우리를 저격하고 바로 죽은 건 아니야. 우릴 쏜 건 확실히 죽은 시체다.'


구조대원같이 순간의 판단이 중요한 직업에는 혼혈의 비율이 비교적 많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물만큼은 아니지만 혼혈의 감은 뛰어났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 사사의 감은 말하고 있다.

무언가 심상찮은 것이 다가오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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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6 00:16 | 조회 : 1,00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코로나...그만 좀 가라...눈치 없게..남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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