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작은 배려 큰 상처

"나가! 혜나! 유나! 키네시스!"

바다는 네 사람의 이름를 차례대로 불러보았다. 하지만 텅 빈 공사장에선 그녀의 메아리만 돌아왔다.

'살펴보기엔 컨테이너가 너무 많아.공중부양이라도 가능했으면 쉬웠을텐데..'

바다는 염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텔레포트도 가능했으며, 시간을 멈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공중에 떠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나.'

바다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두 눈을 감았다. 손을 꼭 마주잡고 있던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혜나야. 나 바다 언니인데."


"어?!
뭐야 이거, 어디서 들리는 거야?"

"혜나야 왜 그래?"

키네시스는 좌우로 두리번거리는 혜나에게 다가갔다. 그는 혜나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으며 물었다.

혜나는 당황스러움에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바다를 찾을 수는 없었다.

혜나는 키네시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키네시스 오빠는 이 소리 안 들려?
바다언니 목소리잖아."

키네시스가 부정의 답을 하려던 찰나, 바다는 혜나에게 뒤늦은 설명을 해주었다. 약간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이거 언니 특기야. 텔레파시.
아마 너한테만 들릴 거야."

"아, 그렇구나."

혜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태연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황당함이 앞섰다.

'무슨..특기가 대체 몇 개인거야.'


귀능이 얘기하기론, 한 개인이 두 개 이상의 복합특기를 갖는 경우는 소수라고 한다. 순간이동 특기자 중 한 명 이상을 달고 갈 수 있는 사람도, 염력으로 경차 이상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도, 두 가지 이상의 특기를 동시에 사용해도 지치지 않는 사람도 모두 소수였다.

다시 말해 바다같은 사람은 아주 드문 특기자. 즉 엄청난 인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뭐가?"

"바다라는 신입 말입니다."

"....."

다나는 말 없이 듄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입이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에 대해서 알겠는가.

나가라면 바다보다는 며칠 전에 들어왔으니 성격이라도 파악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글쎄. 애가 좀 순해보이는 거 말곤 없는데."

착하다는 인상 뿐이었다.


듄은 그 말에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종이를 넘겼다. 주변에 무심한 다나의 성격이 웃긴 모양이었다.


팔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종이에는 오늘 아침 찍은 세 사람의 사진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특기부터 시작해 기초체력까지, 나름 세부적인 사항들이 적혀있었다.


"그래도 셋 다 야망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삐뚤어지기라도 했으면 답이 없을 듯.."

"한 놈은 빼야되지 않겠냐."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키네시스의 사진을 툭 건드렸다. 이번엔 귀능이 낮게 웃었다.

확실히 다른 두 사람에 비하면 키네시스는 소시민과는 거리가 더 있어 보였다. 듄도 그런 키네시스의 성격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실없는 웃음을 뱉었다.


그는 무표정으로 돌아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쨌거나, 그래서 단점도 보이는군요. 재능이 있는데도 응용을 하질 않으니 제자리 걸음입니다.
특히 나가 군!"

듄은 나가의 사진을 콕 집으며 말했다.

"아침에 해 본 테스트 결과, 간단하긴 했지만 바다 양과 키네시스 군은 잘 따라왔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몇 번 연습해본 모양이고요. 하지만 나가 군은 기초체력부터 최악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군요."

"체력이야 보통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강한 특기가 있는 한 체력은 그리 쓸모있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하지만 윗몸 일으키기 10개...턱걸이 1개인데요."

"......"

다나는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가가 그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채 나가를 옹호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가 일행이 돌아오면 기초체력이나 키우라고 소리칠까 고민했다. 아주 잠깐.


"키네시스 군이 체력 결과가 제일 좋군요. 오래 달리기도 제법 잘 했고, 골고루 좋은 운동신경을 가졌습니다. 바다 양은 나가 군보단 낫지만 그리 좋은 수준은 아니고요."

듄은 바다의 체력결과도 나지막히 읽어주었다.

오래 달리기 30개, 윗몸 일으키기 25개, 팔굽혀펴기 20개. 확실히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그래도 바다가 악착같이 노력해낸 결과였다.

바다는 운동신경이라곤 정말 없었다. 그랬기에 이를 악 물고서라도 좋은 점수를 따내려 했다. 대학교에선 체육 과목 성적도 다 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녀는 온몸이 아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몇 십번은 다짐했다.

'...운동 다시는 안한다.'


"그래도 절대적인 수치로 봤을 땐 셋 다 훌륭합니다. 인재라고 부르기에 충분하고요. 또, 공격계 포지션이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
다만.."

듄은 잠시 머뭇거렸다. 확실하지 않아 말을 해야할지 고민한 것이었다.

다나였다면 불확실한 말은 아끼는 게 좋을거라며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듄은 말을 뱉었다. 뱉어서 나쁠 것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바다 양은 서포트나 디펜스 타입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설문지에 적은 걸로 봤을 때 염력 외에도 많은 특기가 있었으니까요."

"바다가 제일 특기가 많았지. 하지만 염력을 제일 자주 사용한다하지 않았던가?"


"테스트 결과를 안 보여드렸던가요?"

듄은 종이 몇 장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부서진 나무판이 들어간 사진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한 겁니다. 과정만 보고 결과는 안 보여드렸군요.
강하기는 하나 나가와 키네시스보다 현저히 떨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걸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는?
네가 교육이라도 시키려고? 스푼 일은 그만 둔 네가?"

"...허락만 하신다면."

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팔짱을 낀 다나를 내려다보았다.


"세 사람에게 간단히 테스트 하나만 더 해보겠습니다."




-


바다는 약간 피곤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사 선배는 찾았어?"

"응. 지금 찾았는데.."

혜나는 말을 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컨테이너 안에선 사사가 나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가가 어딘가 다친 건 아니었다. 온 몸에 힘이 축 늘어지긴 했으나, 그건 어두운 곳에 있던 사사를 귀신으로 착각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가를 부축하는 이유는
정말 별 거 아닌 이유였다.


"갠타나 나가?!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사사 선배, 혀가...말이..."


"왜? 어디 다쳤어?"

"아니. 멀쩡해."

혜나는 걱정하는 바다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뒤에서 나가는 사사를 껴안고 울다시피 했다.

나중에 바다가 도착했을 때 사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마니 심해?"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뭘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마 바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알았을 것이다.

바다는 자동적으로 친절한 미소를 건네었다. 하지만 뱉어지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망설여졌다.

"음...어..
아...뇨, 별로..."


'차라리 욕을 해.'


작은 배려, 큰 상처였다.



-




아이들이 스푼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일하느라 수고했다."

"무능한 한 명 빼고요."

귀능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플라스틱 자를 손에 들었다. 그리곤 사사의 이마에 가볍게 한 번 튕겼다. 그래도 따가웠는지 사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몇 번 쓸어내렸다.

"선배가 되어서 모범을 보여야지. 첫 임무에서 이렇게 당하면 어떡하냐!"

다나도 사사에게 몇 번 꾸짖음을 했다. 명색이 저격수면서, 저격에 실패해 잡히는 게 말이냐며.


"아. 마침 생각나서 말하는 건데.
너희들 곧 있으면 여름방학이잖냐. 방학때는 더 자주 불러낼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 말을 듣자마자 혜나는 표정을 구겼다. 바다의 귀에는 혜나가 나지막히 '일 하기 싫어.' 라고 얘기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이내 '당연하지만 월급은 더 많다.'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다들 환희 웃어보였다.

"전 스푼의 충실한 개가 되려고 태어났습니다!"

특히 나가가 가장 밝아보였다.


"난 개학했을 때도 상관 없는데."

"넌 특기 좀 숨기고 다니는 척이라도 해봐."

유나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키네시스에게 말했다. 키네시스는 유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웃었다.


'돈만 준다면야, 뭐..'

바다도 달리 불평은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바다는 차라리 스푼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에 월급같은 사항이 없었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스푼에 입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특기자인 걸 들킨 채려 살아가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약간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그랬다.

'돈...
부족할 지도 몰랐는데 다행이네.'

차라리 안심스러웠다.



"바다 선배. 이제 해산해도 된대요."

"아, 그래요?"

멍하니 서 있던 바다에게 나가가 다가왔다. 바다는 표정을 환히 밝히었다.

"그럼 내일 봐요 나가."

나가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바다는 그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건지, 나가에게 초점을 맞춘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 주변으로 눈동자를 향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

낡은 책상.
오래된 동화책.
너덜해진 벽지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 안.

수천개의 조명이 설치된 스푼과는 대조적인 장면들이 바다에게 떠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연이어 나오는 것들은 전부 낡고 병든 것 뿐이었다.


"입 안 아파?"

바다는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네시스가 창틀에 기댄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가요?"

바다는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승달처럼 휜 눈매는 언제나 인상을 순하게 만들었다.

"계속 웃고 있잖아. 특히 나가한테."

"....."

바다는 그제서야 웃음을 멈추었다. 고개는 그대로 앞을 향한 채, 눈동자만 위로 올렸다. 키네시스의 얼굴이 간당간당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땐 안 그랬지않나?"

키네시스가 처음 본 바다의 얼굴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물론 맨 처음은 지금처럼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비밀로 해달라는 바다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때부터였다.

바다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딱히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가 녹은 것도 아니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돌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

"딱 지금처럼."


"......"

바다는 팔짱을 끼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시선은 여전히 키네시스에게 고정한 채였다. 표정은 차가웠다.


"그거 알아? 너 항상 나가한테는 더 친절하게 대해.
대체 왜 그런건지 물어봐도 되나?"

상황은 반대였다.
항상 웃고 다니던 바다는 웃음을 버렸고, 키네시스가 웃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생각보다 재미있던 모양이었다.


"학생회장이라고 들었어요."

"어?"

동문서답.
키네시스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장이랑 친절함이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래서 날카롭던 눈매도 잠시 동그랗게 변했다.


"학생회장이라면, 적어도 헛소문에 휘말려본 적 없겠네요. 그러니까 키네시스는 절대로 이해못할 거에요."

"........"


저녁 5시, 따뜻한 바람이 불던 여름날. 그 날 창문 너머 붉은 노을빛에 비친 그녀의 새파란 눈은 첫눈이 가득 담긴 바다같았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눈.

그렇게 새파란 눈은 처음이었다.


"키네시스는 소문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래요."

키네시스는 바다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따뜻하고도 포근한 눈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목소리는 파도가 치는 것만 같은 눈동자에 파묻혀버렸다.

바닷속의 고래들이 에워싸며 헤엄치는 것 같았다.

꽃이 만발한 것만 같은 장관.
눈을 뗄 수 없었다.

키네시스는 지금껏 보아왔던 친절한 웃음들이 전부 만들어낸 가짜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는 어떨까, 궁금했다.


'아.
저건 진짜구나.'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은 채, 키네시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벽지에 시선을 고정한 바다의 눈동자는 이상하리만큼 외로워보였다.

쓸쓸함.
그래, 쓸쓸함이구나.
키네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 그 바다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가을 하늘, 간간히 떠오르던 붉은 색 석양. 아마도 나만 보았던 푸른 눈 속의 첫눈.

'절대로 잊을 수가 없을 테니까.'


-
-
-



"뭐야. 왜 이것밖에 안 남았어?"

뾰족한 모자를 쓴 여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초등학교 앞에서나 팔 법한 전형적인 마녀 모자였다. 모자 아래에선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그게 레드럼 님, 저희가 일어나 보니 마약들이 전부 사라지고 이것밖에 안 남았습니다..왜 그런지는 필름이 끊긴 것 마냥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요."

"머저리들!"

레드럼은 남자들이 건네준 마약 두 봉지로 머리를 쳤다. 때리고 나서야 그녀는 봉지들을 소중하게 품안에 넣었다. 하지만 화는 그치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말하지 그래?"


"그래도 누님, 나름 좋은 수확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노트북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레드럼은 머리를 다듬으며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보여보라는 신호를 주자 남자는 영상을 틀었다.

영상에선 바다를 비롯한 아이들이 특기를 사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바다가 몰려오는 무리를 한 번에 쓸어넘기는 장면. 그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버려진 공터엔 수십개의 컨테이너 뿐이라 생각했을텐데, 그 사이사이에 cctv가 숨어있었다. 바다는 그 사실은 몰랐다.


"누님이 찾고 있던 능력 아닙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드럼의 눈치를 보는지 이따금씩 그녀를 힐끗거렸다.

"....괜찮네."

레드럼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조만간 만나러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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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2-17 00:03 | 조회 : 848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12시 땡하자마자 올리고 싶은데, 조아라를 먼저 올려야할지 폭스툰을 먼저 할지 고민하다가 두개 다 놓친 적이 많아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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