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내 손을 잡아요

바다는 제이의 아지트에서 스푼 건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신발끈을 주섬거리며 묶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몇 번 쓸어내린 바다는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나는 눈가가 살짝 빨개져있었다. 눈물자국이 볼 아래에 생겼지만 그녀는 그 사실은 몰랐다.

제이는 '다녀와.' 라며 달콤한 막대사탕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음..."

먼저 채비를 다 한 바다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던 한 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바다는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유나, 키네시스. 우리 순간이동으로 가도 되지 않나요? 여기서 거리도 먼데 굳이 걸어갈 필요는 없어보여서요."

그녀는 자신들이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걸어갈 필요를 못 느꼈다.

애초에 스푼이란 회사 자체가 초능력자들의 집단모임 아니겠는가. 뭣하러 걸어간단 말인가.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야하는 거리인데.

더군다나 서울은 버스에 사람이 없는 날이 없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 그게 좋겠네."

키네시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난 다른 사람이랑 이동 못 시키는데. 난 나 혼자만 움직일 수 있어서."

키네시스가 활짝 웃어보였다.
바다는 가끔 그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키네시스가 아이돌을 했으면 어울렸을거야.' 라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대체 왜 찬성한거야?!'

제이는 황당함에 사탕을 깨물어 먹었다.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달콤함이 목을 타고 들었다.

어이없는 제이와는 달리 유나의 표정은 활짝 밝아졌다. 그녀는 소리나게 손뼉을 한 번 쳤다. 꿀벌 색의 노란 눈동자가 별빛을 쏟아내듯 반짝였다.

"아, 그래서 그때 너만 갔던 거구나!"

유나는 바다를 찾으러 휙 사라졌던 키네시스를 떠올렸다. 같이 가자고 얘기했는데도 데려가지 않았던 건 같이 갈 수 없어서였다.
유나는 그저 키네시스가 텔레포트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다나 언니한테도 초능력에 제약이 있었지. 화가 나면 발동이 안되는..'

헐크 반대 성향.

집에서 다나에게 그렇게 놀리면 그녀는 엄청 화를 냈었다.
언니를 피해 방문을 잠그면 다나는 초능력을 못 썼다. 애꿎은 문만 쿵쿵거리며 때리고 있을때면, 항상 엄마가 나와 다나를 혼냈다.

유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가벼운 웃음을 뱉었다.


"괜찮아요. 내가 가능하니까요. 정확한 주소만 알면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주소도 제대로 적어뒀고...'

바다는 교복 안 주머니에 접어두었던 종이 한 장을 폈다. 구깃해진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를 펼쳤다. 귀능이 스푼의 주소를 적어둔 종이였다.

바다는 보란듯이 손에 든 종이를 팔락였다.


"신기하네. 그럼 매번 주소를 읽거나 봐야 하는거야?"

키네시스가 교복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물었다.

바다는 잠시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종이를 손에 쥔 채 옆으로 밀어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아뇨. 꼭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방향과 거리 정도에요. 가고 싶은 건물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잘 모르니까 주소지를 봐서 하는 거고, 매번 가다보면 몸이 저절로 기억해요. 그럴 땐 굳이 주소지를 안 봐도 돼죠."


"그래? 그럼 어서 가자."

키네시스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5시야.' 라며 중얼거렸다. 세 사람 모두 정상수업이 끝나자마자 왔는데도 벌써 저녁이라니.


'이래서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별로야.'

제이는 사탕을 다시 한 번 으적대며 씹어먹었다. 그는 입안이 비워지기 전에 재빨리 다른 사탕을 꺼냈다. 그러면서 커다란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했다.

여름철이라 해가 빨리 지지 않아 다행이지, 겨울이었다면 벌써 어둑해질 즘일 것이다. 그래도 노을이 질 무렵의 시간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제이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흔들어보였다.

"저번엔 얼마나 놀랬다고! 잘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다니."

사탕을 물고 있어서인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바다는 다시 한 번 초승달처럼 눈을 휘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유나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고, 키네시스는 "알았어." 라며 형식적인 대답만 했다.


"....아.
그런데, 가려면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뭔데?"

바다는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손가락을 입술 위에 포갠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부끄러운 것 보단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괜히 말했나...
하지만 난, 키네시스가 다같이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줄 알았는 걸. 너무 오랜만에 같이 이동하는 거여서 제약을 잊고 있었고.'

바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곤 두 손을 유나와 키네시스에게 하나씩 내밀며 말했다.


"그...
내 손 좀 잡아줄래요?"



-




"발동조건이 손을 잡는 건 줄은 몰랐네. 그런 조건이 있는 특기는 처음 봐."

키네시스가 바다를 보며 살짝 웃었다.

바다는 창피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작은 얼굴이 기다란 손가락에 가려지자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어릴 때 말곤 친구랑 손을 잡아본 적이 없어요. 내가 고등학생이 돼서 손깍지를 낄 줄은 몰랐는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살짝 달아오른 바다의 얼굴이 보였다. 바다는 고개를 돌리고 손바닥을 파닥거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날이 많이 덥네..' 라며 중얼거리는 바다는 얼굴에 오른 열을 내리려 애썼다. 의식하니 더 뜨거운 것만 같았다.


"그게 왜 민망해. 나랑 유나는 어릴 때부터 엄청 많이 잡았는데?"

키네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음기는 여전했다.

그럴만도 했다. 그는 원래부터 스킨십에 있어서 자유로웠다.

물론 친하다는 전제 하에서이지만,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친하지도 않은데 덥석덥석 손 대는 건 범죄다. 그렇다고 키네시스와 유나가 지금 사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키네시스는 그랬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바다를 봤을 때, 손 하나 잡은 것 가지고 이렇게 민망해할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친구랑 친하게 지내봤어야지 뭐.'

바다는 애정표현에 있어서 서툴렀다. 친구와 속 없이 얘기해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라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주 어릴 때 빼곤 없는 것 같았다.

'시골에서 살 땐 나름 친구들이랑 친했는데 말야.'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바다는 남학생과 그리 접점이 없었다. 그렇다고 키네시스에게 다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손을 잡는 건 왠지 오글거리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고,

'어쨌든 별로야..'


바다는 단호하게 말했다.

"키네시스의 연애경험담은 안 듣고 싶어요."

"나 참."

키네시스는 어깨를 두 어번 으쓱했다.

유나는 내심 그의 그런 반응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 덩달아 달아오른 얼굴은 고개를 숙여서 가렸다.


"너희 거기서 뭐하냐."

다나가 중앙로비에서 노닥거리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방 안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그녀는 그들에게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소개해줄 사람 있어."


'소개?'

바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긴 오늘 막 들어온 신입이니 회사의 사람들을 소개해주려는 건가, 싶었다.


바다는 문득 고등학교 입학식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2, 3학년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신입생들은 인사를 했었다. 바다는 오른쪽에 2학년, 왼쪽에 3학년이 서 있는 채로 선배들을 마주보았었다. 긴장하던 옆 친구의 손을 잡아주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느낌인가?'

바다는 오랜만에 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바다는 그 날 대표로 나가서 상을 받고, 선서를 읽었다. 진단평가에서 학년 1등을 한 결과였다.

전혀 뿌듯하지 않았다.
그건 바다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난 차라리..'


"신입이라니 기대된다!"

바다가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녀의 귀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다나가 있던 방으로 걸어갔다. 위험이 판 치는 이런 회사에 꼬마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앗!"



"......."

바다는 맞은 편의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멋쩍은 웃음을 짓던 남학생이 바로 앞에서 바다를 마주보았다. 바다는 바람에 한쪽 눈을 가늘게 했다가 이내 바로 떴다.

동그란 눈은 익숙한 교복에서 멈추었다.
바다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바다는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가슴이 쿵쾅대는 것이 귀에서도 느껴졌다. 북을 치는 것만 같은 그 소리에 손이 살짝 떨렸다. 사람 친절해 보이는 웃음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누구일까?'

바다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외쳐댔다.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빌었다. 아니,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고 되내었다.

그래.
날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어? 나가 오빠. 오빠랑 같은 교복 아니야?"

확인사살.

바다는 작은 한숨을 두어 번 했다.
예전에 키네시스를 학교에서 보기 전 되내이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고민만 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그 말이 맞아.

"....안녕하세요."

바다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바다의 푸른 색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휘청거렸다.
밤하늘이 담긴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느릿느릿 사라지는 붉은 햇빛과는 정반대의 색이었다. 그래서인지 나가의 눈에는 더 특별하게 보였다.

나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바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나가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언니! 엄청 예뻐!"

분홍 머리의 꼬마아이가 바다에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빨간색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 같았다.

바다는 옆에 서 있던 다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선은 왠지 서로 닮은 것 같던 붉은 눈동자에서 분홍빛 머리카락으로 넘어갔다.

바다는 두 사람이 자매가 아닐까, 하고 반 정도는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매가 이리도 닮을 수가 없다.


"언니, 내 이름은 혜나야. 언니 이름은 뭐야?"


'귀여워!'

바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았다.
다나의 여동생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귀여운 건 진리야...'

바다는 자꾸 올라가려는 입가를 애써 내리며 무릎을 굽혔다.

취미생활이 애완동물 영상보기인 바다는 어린 아이도 좋아했다. 이유는 물론 '귀여워서!'


잔뜩 긴장하던 바다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나가였고, 다른 하나는 귀여운 분홍머리 꼬마아이 때문이었다.


바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 혜나야."

바다는 혜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언니 이름은 바다야."

"그렇구나!"

혜나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곤 옆에 서 있던 나가와 사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있던 나가에겐 팔꿈치로 살짝 치기도 했다.
어서 인사하라는 듯이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바다는 그 의도가 눈에 뻔히 보여서 웃음이 나오려했다. 아이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 작은 손가락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어...안녕하세요. 저는 나가라고 해요."

'어색해...'

나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약간 매만졌다.

아까 전 혜나에게 말했듯 자기도 들어온 지 얼마안된 신입인데. 또 신입이 들어와 이렇게 정식인사를 한다는 이 상황 자체가 나가는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사사..."

사사는 말을 아끼는 듯 했다.

그때의 바다는 이유를 몰랐기에 사사의 얼굴을 몰래 한 번씩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과묵한 건지, 말 하기 싫다는 표시인건지.

훗날 바다는 사사와 만날 때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난 처음에 사사 선배가 우리랑 얘기하기 싫다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찌나 과묵하던지.'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난 키네시스."

"...난 유나에요."

유나는 키네시스의 등 뒤에 서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바다는 새삼 유나가 낯가림이 심하단 걸 다시 떠올렸다.

'하긴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바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혜나를 바라보았다. 별 생각없이 바라본 혜나의 눈은 반짝거렸다. 바다는 아무래도 키네시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키네시스의 얼굴은,

'잘생기긴 했지.'

바다는 내심 인정했다.

만약 자신이 키네시스의 부모님이었다면 당장 연예인을 해도 손색없지 않을거라며 칭찬을 해댔을 것 같은데. 바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활짝 웃을때면 정말 아이돌이 따로 없다. 바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누가 연예인기획사 흉내 안 낸달까봐. 이번엔 왜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뽑아둔거야? 누가보면 오디션 합격자인 줄 알겠네!"

"어. 그러냐."

어질러진 책상을 뒤적거리던 다나가 걸어왔다. 전혀 관심없다는 말투였다. 혜나는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다나는 들고 있던 종이 세 장을 키네시스와 바다, 유나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뭐지? 자세한 내용은 그때 나눠준 종이로 확인했는데.'

바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치료를 받고 눈을 뜬 전 날 밤, 바다는 달빛 아래에 비친 종이 한 장을 받았었다. 그 날 자세히 말해주지 못했던 스푼에 대한 내용이었다.

대충 스푼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알려져있는지, 급여는 어느 정도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였다. 더 자세한 건 직접 물어보라고 적혀있었지만 나름 세부적인 사항들이 많았다.


"어서 적어라."

다나는 볼펜 세 자루를 쥐어주며 말했다. 그녀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혜나와 나가, 그리고 사사는 무슨 상황인지 모두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세 사람도 모두 겪었던 과정이기에 그랬다.


'아.'

유나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다나 방의 책상에 올려져있던 종잇조각들 중 하나란 걸 눈치챘다.

그건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소개서 같은 것이었다.
이름은 뭐고, 나이는 어떻게 되며, 특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적는 자기소개서.

그리고 그 동시에 계약서 비슷한 것.


'...이후에 일어나는 사고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을 명시함.....'

키네시스는 눈을 약간 찡그렸다.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바다가 생각했을 때, 별 쓸데없는 내용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두 개 정도였다.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느냐'와 '회사는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의 항목.

평범한 척 다른 문장 속에 숨겨두었지만 본질은 그 두개일 것이 뻔했다.


"........"

바다는 조용히 하나씩 써내려갔다.

중간에 걸리는 문항이 몇 개 더 있었지만, 대충 거짓말을 한다고 눈치챌 것 같진 않았다. 바다는 약간 고민하다가 작게 체크 표시를 했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바다의 짙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속에선 얼어붙은 호수가 숨쉬고 있었다. 차갑지만 깊은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나가는 그 모습을 빤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분명 내 이상형이 아닌데?'

참고로 나가의 이상형은 안경 쓴 까칠한 사람.

하지만 바다는 지금 안경도 쓰고 있지 않으며, 까칠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예쁜 건 맞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미인이라고 칭송할 정도도 아니다.

하지만,

'시선을 못 떼겠어.'

세 사람의 연필소리가 나가의 귀로 한꺼번에 들어왔다. 종이에 사각대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

키네시스는 가끔씩 눈을 힐끔거리며 나가를 곁눈질했다.
바다가 작성을 끝낼 때까지도 나가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걸 알아차린 키네시스는 작게 웃음소리를 한 번 냈다. 그에겐 이 상황이 웃길 따름이었다.



"소개해주는 데로 따라가 앉아있어. 곧 갈테니까."

다나는 세 사람의 종이를 거두며 말했다. 언제 왔는지 길을 안내하러 귀능이 서 있었다.

귀능은 방 안의 여섯 명을 데리고 회의실로 안내했다. 특유의 '뀨뀨'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다는 처음 만났을 때의 '뀽' 하는 소리가 이 사람 것임을 알아차렸다. 참고로 둘의 첫 만남이라 하면, 귀능이 오르카에게 맞아 얼굴이 갈렸던 때.

'그런데도 상처가 하나도 없네.
하긴 나도 하루만에 다 나았긴 하니까.'

바다는 문득 자기를 치료해준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인사는 반드시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귀능입니다. 방금 전에 보신 분은 우리 회사의 미친개라 불리는 서장님이고요. 전 서장님 비서입니다!"

다나가 눈에 불을 키며 말했다.

"두부처럼 찌그러지기 싫으면 조용해라."



귀능과 바다의 짧은 대화, 나가와 혜나의 작은 소곤거림, 키네시스와 유나 사이의 작은 장난. 모든 것들이 방에서 나간 후 다나는 그제서야 혼잣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 참.
이번 신입이 우리 회사 전력의 반 이상은 먹겠네."

양손에 든 건 키네시스와 바다, 나가의 자기소개서였다.


-
-
-


귀능이 문을 열고 형광등을 켰다.


커다란 원형 책상은 방 하나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귀능은 창문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던 두꺼운 파란색 커튼을 열었다. 빼곡한 건물에 가려진 햇빛때문에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빨간 노을이 여름날의 뜨거움을 한층 높일 뿐이었다.


'깨끗하네.'

바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낡은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이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 같았다.

연예인 기획사인 척 세운 것이니 몇 년 안 된 건 맞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연예인에 그리 관심없는 나가도 알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당연히 소식을 들었다.

'이 동네에 「그」기획사가 지어진대!'

라며 소문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바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쪽 길을 자주 다니지도 않고, 길을 지나갈 땐 거의 단어장을 붙들고 걸어다녔으니.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것보단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으니. 주위를 둘러볼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귀능 씨. 회의실에는 무슨 볼 일이길래 그래요?"

나가는 대충 아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뒤로 약간 밀려갔다.


"서장님이 여러분 전체에게 물을 게 있다고 하셔서요."


"용건은 그게 다야? 나도 있잖아!"

귀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귀능은 '올 게 왔군..' 이라며 중얼거리곤 고개를 떨구었다. 들으란 것처럼 큰 한숨도 쉬었다.

유나는 귀능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의 한숨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누구길래 그러는거지?'

키네시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목청 되게 크네.'

당시의 바다는 그것밖엔 생각하지 않았다.


'깜짝이야.'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유나도 화들짝 놀랐다. 하얀 신발이 바닥에서 잠시 붕 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감히 날 빼먹다니!"

삐죽삐죽 솟아난 주황색 머리는 하늘을 물들인 붉은 색감과 어울렸다. 머리와 맞춘 듯 눈동자 색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힘 있고, 당당하고, 또 쾌활했으며, 당사자의 성격이 전부 녹아든 목소리 같았다.

밝았다.


그 여자는 검지 손가락으로 귀능을 가리키며 외쳤다.


"초기멤버 주아를 잊으면 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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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1-27 00:07 | 조회 : 81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푸하하 만 자 쓰느라 서른마흔다섯시간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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