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복권을 살 걸 그랬어

"바다라는 사람을 찾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그러니까 오르카 네가 좀 대신해주라."

소파에 앉아있던 메두사는 뒹굴거리며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부탁을 들어줄 걸 아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오르카는 그녀의 예상대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남몰래 아주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명령은 내 몫인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공부 잘한다 그러고, 여자고, 파란색 머리카락이고, 또....
아. 서울에 산대.
잘 찾을 수 있지?"


"예."

오르카는 메두사가 말해준 특징들을 머릿속에 담아넣으면서도 생각했다.

그 많은 서울 시민들 중에서 고작 그 정도의 특징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찾아내지.
한참은 걸릴텐데.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
.



'힘들다...'

오르카는 벽에 잠시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때려 치우고 싶지만 메두사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서울에서 사람 하나 찾는 게 쉬운 일인가.


그래서 오르카는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방금 생각했던 것처럼 서울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에서 사람 하나 붙잡는다고 그 사람이 그 바다라는 사람과 엄청나게 친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그 바다 본인일 확률은?

그래, 오르카가 붙잡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파란 색이긴 했지만 파란머리 여자가 서울에 얼마나 많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확률이 낮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단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오르카는 그 날 복권을 긁었다면 당첨됐을지도 모른다.


"바다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

바다는 잠시 오르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뭐하는 사람이길래 나를 찾는가 싶어 물어보려고도 했지만,

'..이 사람도 초능력자일 수 있어. 이미 세상에 초능력자가 나 하나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이상 조심해야 해.'

온 몸에 바짝 경계심이 섰다.


"바다와 친구이긴 해요. 그런데 그쪽은 바다와 무슨 사이인가요?
바다에게 오빠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바다의 눈이 가늘게 떠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있었다.


"....저는.."

바다는 오르카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라고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바다는 참았다.
뭐하는 놈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꾹꾹 눌러담았다.


"...사촌오빠입니다.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주러 왔습니다."

겨우겨우 생각해낸 변명이 고작 이거였다.

오르카 딴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그가 집어낸 사람이 정말 바다의 친구였다면 속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진짜 바다 본인이 아닌가.
그게 먹힐 리가 없었다.


바다는 자신도 모르게 '허'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쩜 이리도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전 사촌오빠 없어요."

문제는 무심코 내뱉은 바다의 이 말 이후였다.


'아차....!'

바다는 큰 실수를 했단 생각으로 고개를 빠르게 들어올렸다.
오르카 또한 표정에 당황함이 역력해 잠시 주춤거렸다.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로 바다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바다는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았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들통난 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바다의 희망은 짓밟혔다.

오르카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운이 안 좋군요."




-
-
-




"넌 어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반창고나 약 같은 건 미리미리 사뒀어야..."

"반창고 여기 있는데?"

제이를 마구 탓하던 유나에게 키네시스가 약 상자를 내밀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그의 표정에 유나의 눈동자가 동그랗고 크게 떠졌다.


약상자를 열어 제이의 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는 유나는 그에게 물었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네가 다 떨어졌다고 분명 말했잖아."

"원래부터 있었어. 네가 못 찾았지."

"그럼 빨리 바다한테 연락해야겠다. 반창고 있으니까 안 사도 된다고 전해야지."

유나의 손이 좀 더 빨라졌다.
제이는 그런 유나를 보고 속으로 유나가 '전담 의사'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농담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치료에 잔뜩 열중하고 있던 사이 키네시스만이 제이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왜 없다고 거짓말한 거야? 바다가 없을 때 우리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그래."

제이는 반창고가 완벽하게 붙어있는 손가락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유나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심각한 거야?"


"심각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희, 바다가 공부 잘하는 건 알고 있지?"

"당연하지. 저번에 네가 암호해독할 때 기발한 아이디어로 도와줬다며."


"그럼 바다가 전국 1등인 건 알고 있었고?"


"...뭐?"

"그게 정말이야?"

키네시스와 유나가 동시에 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네시스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키네시스와 유나는 모두 사립영재학교의 학생회이다. 그리고 학생회는 뭐 아무나 하는가.

꼭 공부잘하는 사람이 학생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연관은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도 스스로에게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꽤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떡하니 전국 1등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셈이니, 안 놀라고 배길 수가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해주는건데?"

유나는 찾은 휴대전화를 향해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신경은 제이의 입으로 쏠려있었다. 그곳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가 가장 궁금했다.


"..성적 얘기가 나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모의고사는 칠 때마다 만점이 나오지만 시험 얘기로 살짝 빠지려는 낌새만 보여도 얼굴을 찡그리더라."

"그래서?"

"바다 있을 때 성적 관련해서는 말하지 말자고. 아무래도 트라우마 비슷한 게 있는 것 같.."


제이의 말이 뚝 끊겼다. 말을 흐리는 것도 아니었다. 아예 무언가가 입을 막는 것처럼 멈췄다.

유나는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며 전화를 걸려고 했고, 키네시스는 그에게로 다가가며 왜 그러냐 물으려했다.

"제이. 갑자기 왜 그래?"

제이의 어깨를 만진 키네시스의 손으로 차가운 감촉이 타고올라왔다. 마치 돌덩이를 만지는 것 같은 딱딱함도 같이 느껴졌다.

키네시스는 뭔가 쌔한 느낌에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두 눈이 당황해서인지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제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걸음을 좀 더 앞으로 옮겼다.


"...뭔가 이상해 키네시스."

그와 동시에 유나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는 그들의 뒤에서 휴대전화를 계속해서 눌러보았다.

"전화가 안 가...아예 멈췄어. 아무것도 안 눌러져."


전화기가 고장났다고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유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지?'



쾅-!


뭔가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한 유나가 굉음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소리로 얼핏 들어서는 건물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큰 소리였다.

키네시스는 커다란 창문을 향해 다가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빼곡히 다른 건물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는 것 같았다.


"키네시스. 저기 좀 봐."

키네시스는 유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차도, 사람도 많이 다니던 도로였다.

"전부 멈춰있어."

유나의 끝말이 미세하게 떨렸다.
키네시스는 그 말에 곧바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던 사람, 뛰어가던 어린아이, 앞으로 가던 자동차들, 광고가 나오던 대형전광판까지.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춘 것 마냥 멈춰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상한 폭발음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이따금씩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키네시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유나. 나 먼저 저쪽으로 가볼게. 위험하니까 넌 오지 마!"

"잠깐 키네시스, 잠깐만 기다려봐!"

유나는 그에게로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키네시스에게는 닿지 못했다.


'자기혼자만 텔레포트를 썼어..'

유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손발을 동동거리기만 했다.

마음같아서는 소리가 나던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자신은 아직 초능력도 잘 다루지 못하고, 싸움을 잘하지도 못했으니까. 어쩌면 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자신만 이렇게 멈춰있을 수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갈거야.'


"제이. 다녀올게!"

유나는 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제이에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소리가 나던 곳까지 뛰어가면 5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었다.



-
-
-




"?"

오르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약간 까딱였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서 너번, 옆의 건물 벽을 더듬거리기를 두 어번.
그럼에도 뭔가 예상 밖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듯 표정을 짓자 그걸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왜요. 이상하나요?"

바다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이 당했는데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게 신기한가요?"

바다의 온 몸에 타박상이 많았다.
무언가에 짓눌렸는지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의 건물 파편은 바다가 튕겨졌단 걸 암묵적으로 말하는 듯 했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는 노을이 그렇게나 피같은 색일줄은 몰랐다고 바다는 생각했다.
언제나 아름답다거나 아예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노을이었는데,

'이렇게나 개같은 색감일줄은 몰랐지.'

바다는 흐릿한 노을을 보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고개를 드는 것도 아파서 힘들었다.


'왜 내 염력이 나를 공격한 거지?'

공간왜곡?
반사?

대체 뭐냐고.

바다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어째서 나와 달리, 아무 상처도 없이, 은근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을 수 있는지.
그 사실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여기서 무사히 살아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힘도 없는데.'

처음에는 피하는 것보다야 맞서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저 염력으로 가볍게 제압한 후 피하는 것도 낫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신상정보를 알고 있는 한 어떻게든 다시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능력을 쓰는 족족 다 내가 맞지를 않나, 저 사람은 신체능력도 좋은지 자꾸 나를 두들겨 패지를 않나.

'초능력은 들키면 안되니까...시간까지 멈춰봤는데.'

저 사람은 멈추지 않아.

바다가 자포자기한 듯이 바닥에 피를 뱉어냈다.

텔레포트할 힘은 커녕 걸어다닐 힘도 없었다.
고개 드는 것도 힘든데 움직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
짜증나..'


바다는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고, 오르카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로 다가가던 때였다.



"이 범고래 자식이 여긴 왜 온 거야!"

귀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에 오르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확히 오르카의 머리만을 노리고 발차기를 하는 귀능이 있었다.


'귀찮게..!'

오르카는 귀능의 발목을 잡아채 땅에 거꾸로 처박았다.
그 바람에 귀능은 '뀽!' 하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발목을 쥐어잡으며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질렀다.


"쯧. 그러니까 왜 그렇게 빨리 가냐."

또 다른 목소리의 등장에 오르카의 어깨가 흠칫하는 듯 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위험신호가 떠올랐다.

바다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부딪힌 바람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굳이 머리를 쥐어싸매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상황이 엎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바다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바닥에 뒹굴고있는 남자 하나. 그 옆에 서 있는 자기를 공격하던 다른 남자 하나.
그리고,


'검은 머리의 멋진 여자...'


"스푼 근처에서 날뛰다니 간이 많이 커졌네."



".....!"

오르카는 쏜살같이 내지르는 다나의 주먹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정말 '겨우' 피하는 정도였다.
그의 얼굴에는 주먹이 스쳐지나가며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렇게 바다가 공격해도 발끝조차도 닿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다쳐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절대로 못 피할 것이었다.

오르카는 직감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다나의 주먹이 아닌 그 자리를 피해야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나는 서둘러 옆 골목으로 뛰어간 오르카를 뒤쫓으려 했지만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생각을 멈췄다.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의 적은 아군이지.'

바다는 부서진 벽에 기대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다는게 무슨 느낌인지 바다는 약간의 움직임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다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오르카를 눈으로 잠시 찾아보며 다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아직도 바닥에 뒹구는 귀능에게 비키라며 약간의 신경질을 부렸고, 그러고 나서야 바다에게 다가갔다.


"넌 왜 여기 있는거지?"

"......."

바다는 피곤함에 힘 없이 풀린 눈으로 다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역시 안경이 없으니 잘 안 보이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는
키네시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타나며 바다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다나가 "넌 또 뭐야?!" 라며 이빨을 드러낼 무렵에는

"다나 언니....?"

유나가 도착해 다나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언니가 왜 여기 있어?"

유나의 당황한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바다는 차라리 자는 게 낫겠다 싶어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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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30 15:51 | 조회 : 1,01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다나 유나 혜나 이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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