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너무 뻔한 클리셰

"바다야. 누가 널 보고 싶다는데?"

"응?"

바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쓰고 있던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아래에는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공책이 놓여져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자그마한 글씨였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바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중히 생각만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말하던 게 생각이 났다.



"아."

나무로 된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바다는 무심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회색 눈동자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다짜고짜 내게 와서 초능력을 가졌냐고 묻던 이상한 사람.

가벼운 손인사로 자신을 맞이하는 그 사람이 바로 어제 만난 사람과 아주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닮았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냥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지만 바다는 그 가능성만은 무조건 부정했다. 머리를 직접 살짝 흔들면서까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나를 찾아오겠어.'

무슨 수로 나를 찾겠냐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수백, 수천번을 내젓던 바다에게 키네시스는 작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 또 만났네."


"........."

바다는 한 단어에 집중했다.


'또.'


순간 바다는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누구.."

처음에는 아닌 척 발뺌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 거짓말은 어울리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상황 자체가 두려웠는지.
바다는 손에 차오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짝 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쪽도 교복을 입은 걸 보니 학생인 것 같은데,"

바다는 고개를 들어 키네시스의 두 눈과 마주보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바다는 단호히 말했다.

"방과후에 그 때 교차로의 카페에서 보는 걸로 하죠."


어제와 같은 시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 바다의 눈동자는 어제보다 더 맑아보였다.
어두운 골목에 갇혀 비치지 않았던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내리쬐자 눈동자에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바닷속에 비치는 햇살.'
같은 빛이라고, 키네시스는 생각하며 대답했다.

"마음대로."

키네시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복도에서 바로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그 바람에 주변에 사람이 있었는지 살펴보느라 고개를 좌우로 열심히 돌렸지만, 다행히도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은 모두 급식실로 가버린지 오래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다는 소리 나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갑자기 훅 사라지는 저 사람을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나도 오해받았을거야.'


바다는 다시 아무도 없는 반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습관적으로 볼펜을 집어들고 공책을 폈지만 아까 본 광경으로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 모의고사도 잘 봐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 뿐 공책에 끄적이지 못했다.


'순간이동 같은 걸 쓰는 걸 봐선 정말 초능력자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초능력자가 또 있을 줄은 몰랐어. 물론 세상에 나만 특별하진 않을거라 생각했고, 가끔 나오는 뉴스기사들을 보고 예상하긴 했지만..'

만일 초능력자가 다른 초능력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나를 싫어한다면?

싸우려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

북북 거리며 무언가를 긋는 소리가 갑작스럽게 멈췄다.

바다는 어느 새 공책 한구석에 새카맣게 볼펜을 칠하고 있었다.


버릇처럼 손톱을 몇 번 깨문 바다는 그 검은 색을 보고는 종이를 찢어버리고, 절대로 다시 펴지 않을 것처럼 구기고는 휴지통에 냅다 던져버렸다.

바다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두려웠다.


'기회는 단 한번이야.'




-
-
-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마자 몸 깊숙히 들어오는 것만 같은 커피향이 바다를 맞이했다.


'어디에 있지?'

바다는 카페에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검푸른 머리색에 회색 눈동자, 단정하지 못한 교복과 연예인 상으로 잘생긴 얼굴.
검푸른 머리색에 회색 눈동자, 단정하지 못한 교복과 연예인 상으로 잘생긴 얼굴...


몇몇 특징들만을 외우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바다에게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아. 여기야."

"......"

바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려다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다시 썼다.

학교만 마치면 항상 벗고 다녔지만 이젠 시력이 많이 안 좋아져서 매일 쓰고 다녀야하나, 하는 시덥잖은 생각과 함께 바다는 생각했다.

'안 봐도 훤하겠지.
목소리가 똑같았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던 그 사람은 키네시스가 맞았다.
차가운 음료를 손에 쥔 그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바다는 남몰래 작은 쉼호흡을 쉬었다.

'짧고 굵게 끝나기를 빌어야겠어.'


"왜 불렀나요?"

바다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물었다. 그녀는 키네시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지도 않은 상태였다.


절대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

그럼으로써 나의 결점을 쉽게 내보이지 않겠다.

두 가지의 단단한 결심을 한 이유였다.


다만 키네시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바다의 굳은 결심따위에는 관심없어 보였다.

바깥 하늘에서 노을이 진다느니, 떠다니는 비행기소리가 시끄럽다느니, 나 같으면 텔레포트도 가능하다느니.
정말 시덥잖은 소리밖에 하지 않았다.


"........"

계속 서 있던 바다의 다리가 슬슬 저려올 때였다.
언제 얘기해줄 거냐고 질책하려던 찰나이기도 했다.

키네시스를 노려보던 바다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말했다.

"그렇게 경계안해도 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 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날 찾았는지부터 말해요."

바다는 키네시스의 입이 열릴 다음 번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

키네시스는 아무 말 없이 휘적거리던 음료의 빨대를 잠시 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올려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과 또다시 으쓱대는 어깨가 바다의 눈에 띄게 들어왔다.
바다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친구한테 부탁했어, 걔가 해킹하는 거에 소질이 좀 있거든.
찾아보니까 서울고등학교로 나오던데."

"왜 나를 찾았나요? 어제 그 만남은 그저 우연 정도로만 끝내도 됐을텐데요."

"내가 무조건 잡고 싶은 놈이 있는데 네가 있으면 엄청 도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왜 도와줄거라 생각하나요?"

"초능력자인 거 들키면 안되는 거 아니야?"


바다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만 부드러웠지 이건 협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초능력자라고 온 세상에 밝혀버리겠다는 협박 아닌가.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것 같은 저 미소도 짜증나.'

바다는 속으로 키네시스를 약간 씹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이만큼이나 스트레스를 받은 건 오랜만인 듯 했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가보자. 이대로 물러서면 안돼.'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난 상관없는데? 애초에 들킬 게 두려웠다면 이렇게 사람많은 곳에서 대놓고 초능력자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겠지."


"............."

"......."


키네시스는 말 없이 음료를 한 번 마셨다.

그리고 둘 사이의 다가온 이번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바다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방안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보였다.
더 강하게 나간다면 키네시스가 정말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다닐까봐 무서웠다.

소문이 퍼진다면 일이 어떻게 번질지는 시나리오를 직접 짜보지 않아도 눈앞에서 펼쳐졌다. 바다는 절대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협박에 의해서 키네시스의 말을 듣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큰 일 아니야.
우리 아지트에 모여서 하얀 마법사가 어디 있을지 힌트를 맞추고, 초능력 조절하는 법도 좀 연습하고 그게 다야. 그냥 노는 거나 다름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 이거야."

"......"



다른 평범한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친구' 라는 말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뻔한 클리셰가 아닌가.

진정한 친구를 찾고 싶어하는 주인공 A씨는 어느 날 우연스럽게 만난 B와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내용.

하지만 바다는 다른 내용에 더 솔깃했다.

그건
"노는 거나 다름없어."
라는 말이었다.

'그럼 공부 얘기는 절대 안 나오겠지.'


정말 행복하겠다.

바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이름부터 가르쳐줘요. 언제까지고 '그쪽' 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한참 뒤에 고개를 든 바다가 말했다.
처음 키네시스를 만났을 때같은 친절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웃음기가 스며있는 표정이었다.

"수락해준거야?"

키네시스는 신이 난 어린아이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다는 그 바람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뒷걸음질을 치지는 않았다.

"그래요."


키네시스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언제나처럼 입가에는 작은 미소를 띄우고, 바다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키네시스.
내 이름이야."




-
-
-



그리고 소란스럽던 첫 만남 이후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바다를 아지트로 데려왔을 때는 유나가 엄청나게 반대하고 또 화를 냈다.

역시 들킬 줄 알았다, 잘 숨기고 다니지 그랬냐, 절대 안된다, 같은 얘기를 했지만 키네시스는 모두 웃음으로 받아치며 '이미 약속을 해버렸는걸.' 이라고 말했다.
결국 반강제적으로 바다는 그들의 일원 비스무리한 게 되었다.


그리고 바다는 그렇게 된 걸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어. 공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됐었는데.'

바다는 그 이후로 보충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채 매일 방과후 아지트로 왔다.
그곳에서 하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바다는 그런 점이 오히려 좋았다.
더 자유로운 느낌이며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은 분위기가 황홀하리만큼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다.


'낯가림이 있는 유나랑은 아직 많이 얘기를 안 해봤지만...'



"나 왔어요."

그 날도 평소와 비슷한 날이었다.


"어서 와."

"오늘은 좀 일찍 왔네."


노을이 지고 있는 오후에 바다는 아지트에 들어왔고, 제이와 키네시스는 그녀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맞이했다. 유나도 크게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눈짓으로 바다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계획 있어요?"

"별로. 제이 암호해독하는 거 돕기 정도?"

키네시스는 소파에 앉아 제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까닥했다. 바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컴퓨터 몇 대를 앞에 두고서 열심히 타자를 치는 제이가 있었다.

바다는 커다란 화면을 바라보며 제이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컴퓨터로 내 신상을 털었겠네요. 성능이 여간 좋아보이는 게 아닌데."

"아. 이제 그 얘긴 안 하기로 했잖아...."

"농담이에요."

바다는 싱긋 웃었다.
바다의 동그랗던 눈이 순식간에 초승달로 변해 제이를 비추는 듯 했다.
이제 바다는 그들에게도 곧잘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제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마카롱 상자를 뜯어내려 했다.

바다는 '또 단 거 먹어요? 자꾸 그러면 이 썩어요.' 라고 말하며 다시 배시시 웃어보였고, 키네시스도 '그래. 내가 항상 말했잖아.' 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유나도 키네시스의 옆에 앉아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웃으며 동조했다.

제이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알겠다니..
아야!"

제이의 어깨가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왜 그래요?"

옆에서 은은한 웃음을 짓던 바다가 그 소리에 놀란 듯 했다.


제이는 손가락을 움켜쥐며 바다에게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베인 거 같은데...."

제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어떡해.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잖아!"

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도, 하다못해 반창고 하나도 찾지 못하자 유나는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게 아무것도 없잖아? 피라도 멎게 해야하는데.."

"마침 다 떨어졌거든..."

제이는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 여전히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유나에게 바다가 나섰다.

"내가 약국에 다녀올게요. 어차피 약국에 갔어야 했었으니까."

"그래? 그럼...부탁할게 바다야."


"다녀올게요. 피라도 멎게 휴지로 닦고 있어요."

여전히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는 유나에게 바다는 싱긋 웃으며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바다의 표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리 좋은 주제는 아니었지만 유나와 대화를 했다.
제이가 많이 아플테니 서둘러서 다녀와야겠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노을색도 예쁘네.

그 정도의 생각들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검은 색과 흰 색이 섞인 긴 머리카락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바다에게 말을 걸었고,


"혹시 바다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바다의 이름을 묻기 전까지는 적어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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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23 11:42 | 조회 : 1,192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새벽 12시에 올릴려다가 시간을 놓쳐서 낮 12시에 올리려했는데, 병원 가느라 못 올릴 거 같아서 어중간하게 지금 올리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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