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스토커

* * *

평화로운 아침. 지원이 드디어 연기가 스토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컷 두들겨 패겠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이나 행한 행동이라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온 지원은 바닥에서 자는 연기를 발로 툭 치고 냉수를 들이켰다. 밥그릇 때문에 야단이 나 가방에 있던 물건을 전부 보여주지 못한 지원이 안에 든 물건을 꺼내 들었다.

"….“

개 목걸이는 좀 심했나?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건 좋은 것 같은데.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지원이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진 개 목걸이를 연기의 목에 채웠다. 그래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디자인을 신경 쓴 목걸이였다. 연기가 깨지 않게 줄을 손에 휘감아 살짝 당겨본 지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소파 밑에 못 기어들어가겠네.

"주인님?"

지원은 습득이 빠른 편이었다. 연기는 버려봐야 다시 돌아오고 제가 평생을 귀신을 봐왔던 것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제 편의에 따라 돌아가야만 했다.

"응."

지원의 냄새를 맡고 눈을 뜬 연기가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다 목에 감긴 개목걸이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무엇인가 하는 표정에 지원이 싱긋 웃으며 연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연기는 제가 개목걸이에 속박당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입을 헤 벌리고 축 늘어졌다.

"좋아?"
"응."

오늘은 주인님의 기분이 좋은가보다. 연기가 지원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아양을 피웠다. 목걸이를 찬 채로 순종적으로 행동하자 어딘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지원이 연기의 엉덩이를 한 번 세게 쥔 후 놓아 주었다.

"주인님은 내 엉덩이가 좋아?"
"…….“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숨길 것이라고 생각한 지원은 예상 밖의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엉덩이가 좋으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그냥 통통하게 살이 올라 볼록하게 생겨 한번 주무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좋다고 하면."
"응?"
"좋다고 하면 대줄 거야?"

주인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며 토라질 모습을 기대했던 지원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연기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지원이 혀를 차며 연기의 앞머리를 쓸어넘겨 줬다.

"좋다고 하면 네 엉덩이에 내 좆 쑤시게 해줄 거냐고."

행여나 좆이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까 싶어 연기의 성기를 짓누른 지원이 얼굴을 가까이하고 되물었다.

"….“

그제야 지원이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목덜미부터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연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더듬었다. 그에 지원이 술에 취한 것처럼 실실 웃으며 목줄을 잡아당겼다.

"아!"

깜짝 놀란 연기가 목을 부여잡고 신음했지만, 지원은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연기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향했다. 결국, 개처럼 네 발로 기어 지원을 졸졸 따라가게 된 연기가 제 앞에 놓인 것을 보고 땀을 뻘뻘 흘렸다.

"이게 뭐야….“
"네 집."

지원이 보면 모르겠느냐는 얼굴로 천으로 된 개집을 툭툭 치며 밀어주었다. 대형견 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꽤 가격이 나갔다며 네가 사용하지 않으면 짜증이 날 것 같다고 말하는 지원에 연기가 잔뜩 풀이 죽었다.

"뭐 해?"

개집이라니. 연기가 파란색 레이스로 구성된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계약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주인님이 나를 좋아하게 될 날이 찾아오기는 하는 걸까? 연기는 정말로 이 개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맞고 들어가겠느냐, 스스로 들어가겠느냐는 질문에 결국 개집에 얼굴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잘 어울리네. 앞으로 거기가 네 집이야."
"….“
"알겠어?"

연기는 제가 사는 곳에서 왕의 대우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지금 힘을 잃어서 그렇지 나도 나름 이름있는 귀인데....연기가 지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 와중에 개집은 상당히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잠이 쏟아졌다.

"거 봐. 너도 좋아하잖아."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따뜻하고 말랑해서 기분은 좋았다. 연기가 개집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지원은 집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애교를 피우다가 꾸벅꾸벅 조는 연기의 뺨을 내려치고 개 밥그릇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밥은 여기다가 줄 테니까 먹어. 안 먹으면 내 쫓을 줄 알아."

다시는 어둡고 좁은 곳에 들어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은 연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밥그릇을 제 앞으로 당겨놓았다. 연기는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지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복 학습으로 얻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지원이 저를 때리는 것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왜 때리느냐고 묻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연기는 지원이 저를 때리는 것을 아침 인사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말 잘 들으면 네가 원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볼게."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말에 연기의 두 눈이 반짝였다. 지금 집에서 나와도 되느냐는 말에 지원의 허락이 떠올랐다. 힘겹게 기어나온 연기가 지원의 앞에 앉아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봐 뭔데. 밥 줘?"

지원이 개 밥그릇을 흘끔 쳐다보며 부엌으로 향하려고 하자 연기가 황급히 입을 열어 지원을 붙잡았다. 연기가 이걸 말해도 될까 잠시 고민하다가 빨리 말하지 않으면 손이 날아올 것 같다는 불안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쳤다.

"나랑 계약하자!"
"….계약?"
"응."

들어줄 생각이 있어 보이는 지원에 연기가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계약을 하면 좋은 점부터 이야기했다.

"네가 귀신을 보지 않게 할 수 있어."
"그럼 너도 안 보여?"
"아, 아니. 나는 보이는데, 다른 애들."
"계속 말 해봐."

고민하는 지원의 모습에 연기가 잔뜩 신이 나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네가 어디 아프면 내가 치료해 줄 수도 있어! 배가 아프면 배도 안 아프게 해주고 머리가 아프면 머리도 안 아프게 해주고 속이 아프면 속도 안 아프게 해...."
"그건 첫말로 된 거잖아? 너 이것 말고는 좋은 점 없으니까 불리려고 하는 거지."

연기가 딱 들켰다는 얼굴로 할 말을 잊고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말고는 딱히 좋은 점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도 꽤 좋은 편이잖아? 연기가 애원하며 계약을 졸랐다.

"계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지원이 목줄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해주려는 건가? 준비하는 건가? 연기가 방방 뛰며 부엌으로 향했다.

"뭐해."
"칼이 있어야 돼!"

칼이 필요하다는 말에 지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만 들어도 잔뜩 움츠러드는 주제에 칼이 필요하다는 말은 잘도 하네. 칼은 왜? 지원이 질문하자 연기가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주인님이 내 피 마시고 내가 주인님 피 마시면 돼!"
"싫어."
"왜!"

그러니까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빨아먹으라 이거지? 지원이 불쾌한 얼굴로 돌아섰다. 연기는 드디어 맺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불확실해지자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혹시 아플까 봐 그래? 괜찮아. 내가 힘만 찾으면 베인 상처쯤은 금방 회복시킬 수 있어."
"싫다고. 더럽게 네 피를 어떻게 마셔? 어디에서 구르다가 온 지도 모르는 놈을."
"나도 주인님이 어디에서 구르다가 온 지 모르는데 잘 마실 수 있...아!"

어디에서 구르다가 왔다는 말의 뜻을 알지도 못하는 연기가 지원을 그대로 따라 하다 결국 또 얻어맞고 말았다. 내가 원하는 거 들어준다며? 주인님은 왜 거짓말만 해? 연기가 성질을 부르며 개집 천을 잡아 뜯었다. 아예 찢어버리면 또 혼이 날 것 같아 살짝 잡아당긴 정도였다.

"생각해본다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안 했어. 그리고 주인은 나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디서 고개를 쳐들어."

화를 짓누르는 목소리에 연기가 꼬리를 내렸다. 불공평했다. 나는 저런 집에서 살고 개 밥그릇에 밥을 먹고 개 목줄에 묶여 있으라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안 들어준다는 거야? 연기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밥이나 먹자."

지원은 연기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삐치거나 말거나 부엌으로 향한 지원은 요리를 시작했고 우울함에 빠져 개집에 들어간 연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울음을 참았다.

'…야.'
"….“
'…봐."
"응?"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든 연기가 밥그릇에 머리를 부딪치고 신음했다.

"주인님, 나 불렀어?"

집에서 기어나온 연기가 지원을 바라보았으나 저 멀리 떨어진 지원은 연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혹시 진인가? 다시 개집으로 숨어든 연기가 눈을 감았다.

'야!'
"악!"

진의 고함에 깜짝 놀란 연기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혹시나 지원이 들었을까 봐 눈치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진?"
'그래! 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안 돌아오는데!'
"그게, 그게….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어….“

그리운 진의 목소리에 연기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부를 땐 안 오더니 이제 와서 왜 화를 내는 거야. 연기가 투덜거리자 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못 와?‘
“나도 몰라. 주인님이, 주인님이 나 엄청나게 때리고 갖다 버려서 혼자 있었는데 다른 사람 기도 안 먹히는 거야. 흡수해도 힘이 안 돌아오고 문이 안 열렸어.”
‘…너 계약은?’
“주인님이 내 피 마시기 싫대….”

투정을 부릴 상대가 생기자 연기가 배를 까뒤집고 편한 자세로 누웠다. 차마 개집에 갇혔다는 말은 하지 못해 네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는 게 다였다.

'잠깐만, 그럼 왜 돌아올 수가 없는데?'

진이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이 당황하자 연기가 겁을 먹기 시작했다. 항상 평온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진이었는데, 진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너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모르면 난 어떡해!"

연기가 억지를 부리며 얼른 해결해보라고 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지원의 눈치를 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지원에게 제 목소리가 들릴까 봐 불안해진 연기가 개집 구석으로 파고들어 목소리를 낮췄다.

'계약 안 했다며.'
"응….“
'그럼 왜 못 돌아오지?'
"계약하면 못 돌아가?"
'아예 못 돌아가는 건 아닌데, 사흘간은 못 와.'
"왜?"
'각인 기간이라는 게 있어.'

진이 각인기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연기에게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서로의 피를 마셔 계약이 성립되게 되면 사흘간 각인 기간이라는 것을 거쳐야 해. 그 사흘간 네 전용 기가 아플지 네가 아플지는 모르는 일이야.'
"아프다고?"
'어. 인간이랑 귀랑 맺는 계약에 아무런 위험도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

연기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혀 피를 조금만 빨면 바로 계약이 성립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기는 얄팍한 제 지식에 큰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계약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
"뭐?"
'그것도 네가 죽을지 네 기가 죽을지 모르는 일이야.'
"그런 건 안 가르쳐줬었잖아."
'나도 최근에 알았어. 너 선대가 왜 죽었는지 알아?'
"몰라."
'인간이랑 계약하다가.'

진의 말에 연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대가 돌아가신 후로 왕 취급을 받아왔던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연기는 저를 믿고 기다리는 수많은 흡연귀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손을 떨었다. 제가 인간과 계약해 힘을 되찾으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결국은 아는 것 없이 떠들어댄 것밖에 되지 않았다. 연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금 뜸을 들이던 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피도….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마셔야 할 거야.'
"어느 정돈데."
'그때 그 욕조에 있던 네 기의 피 정도.'
"….하."

진의 대답에 연기가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로 먹으라고? 주인님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땐 진이 있어서 주인님을 살릴 수 있었지만, 만약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주인님이 죽어버리면 어떡해? 아니, 나까지 죽으면? 남은 흡연귀들은 어떻게 해.

"선대도 나도 너도 이미 죽은 귀잖아. 근데 어떻게 또 죽을 수가 있어? 어떻게 계약을 하다가 죽을 수가 있느냐고! 거짓말하지 마!"

골목길에서 한 번 죽음을 맞이할 뻔했던 연기는 흡연귀들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흡연귀는 말 그대로 귀신인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또 죽을 수가 있느냐고? 연기가 울음을 참아내며 진을 탓했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진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귀는 죽을 수 없다는 기존의 법칙이 선대로 깨졌고, 인간과의 계약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고.'

선대의 죽음으로 흡연귀 세상의 왕이 된 연기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기 수준이었다. 진이 없었다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주워 먹고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연기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연기에게 한 나라의 왕이라는 것의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러니까 그만하고 돌아와. 방법은 내가 찾아볼게.'
"그렇게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흡연귀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연기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왔다. 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연기도 알고 있었지만, 탓할 사람이 필요했다. 연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가다듬었다.

'사냥해.'
"뭐?"

연기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내뱉는 진이 원망스러웠다. 사냥하라고? 내가 미쳤다고 사냥을 해?

'힘 되찾고 싶다면서. 굳이 선대의 의지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어.'

힘을 잃은 나라의 선대는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항상 멋있고 당당한 선대를 존경했던 연기는 선대의 의지를 따라 결코 인간을 해치지 않았다. 진처럼 인간의 기를 모조리 빼앗고 생명을 빨아들이는 방법을 택한다면 연기 역시 사라진 힘을 되찾아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는 선대의 의지를 잇기 위해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기의 마음을 뻔히 아는 진의 입에서 사냥하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진. 너 나랑 뭐하자는 거야."

칭얼대던 모습을 지워버린 연기가 표정을 굳히고 주먹을 쥐었다. 네가 사냥하는 것까지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 나한테 사냥을 권한 거야? 내가 선대의 의지를 잇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 그러다가 죽어.'
"….“
'사냥해. 그게 너를 위한 거고 모두를 위한 거야. 안 하면 어찌할 건데? 그 잘난 네 전용 기가 계약 안 해주겠다며. 만약 해준다고 해도 목숨을 잃을 확률이 커. 선대의 의지가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고.'
"듣기 싫어!"
'고집부리지 마!'

진이 고함을 지르자 연기가 깜짝 놀라 혀를 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연기가 피를 거칠게 닦아내는 동안 화가 난 진이 연기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네가 지금 왜 못 돌아는 건지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게? 적어도 선대는 너보다는 강했어! 너보다는 똑똑했다고! 그런데도 그렇게 돌아가셨어.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뭘 하겠다는 거야!'
"주인님 피를 마셨어."
'뭐?'

제가 왜 돌아갈 수 없는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더듬어보던 연기가 지원이 제 머리를 핏물 속에 짓눌렀던 것을 떠올렸다. 지원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탓에 욕조의 물을 다 먹어서 벗어나자는 미련한 생각을 했었다. 배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지원의 피가 섞인 물을 마셨던 기억을 찾아낸 연기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주인님 피를 마셨다고."
'뭐? 도대체 언제!'
"좀 됐어."
'이런, 씨발!'

익숙한 욕설에 연기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주인님의 피를 마셨는데, 주인님은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네가 못 돌아오는 이유가 있었네.'
"...."
'그러니까….계약이 불안정하게 된 거야. 딱 반만 된 거라고.'
"그럼 어떡해."
'나도 몰라! 나도 아는 게 없다고!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한 거야 왜! 뭐 이상한 거 없었어? 네 전용 기의 변화라든가!'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나도 몰라 모른다고! 주인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변화가 있든 나한테 그걸 말 해주겠……“

심각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던 연기가 어느새 제 눈앞까지 다가온 지원을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지원의 표정으로 보아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화가 나 있는 것은 분명했다.

"주인님?"
"몇 번을 불렀는데 왜 안 나와?"
"아…. 못 들었어."

또 한 대 맞을 거라고 생각한 연기가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지원은 연기를 때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뜬 연기가 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원은 연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밥과 반찬을 가져와 밥그릇에 옮겨주었다.

"먹어. 다시 보러왔을 때 다 안 먹으면 넌 죽을 줄 알아."
"….응."

연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다 보면 계약을 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컸다. 지원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연기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진."
'무슨 일인데, 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번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내 힘으로."
'기다려, 그냥 사냥을…!'

연기는 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스스로 힘을 되찾아서 귀들을 행복하게 해줄 거야. 이미 반정도 계약됐다잖아. 0퍼센트 보다는 50퍼센트가 훨씬 가깝잖아. 연기가 주먹을 꾹 쥐고 어떠한 시련과 고통을 겪더라도 망해가는 나라를 꼭 다시 일으키리라 다짐했다.

0
이번 화 신고 2019-12-10 11:42 | 조회 : 1,119 목록
작가의 말
치령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