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스토커

"잘 먹네."

연기가 엄청난 결심을 하며 밥을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개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잔뜩 골이 나 있던 연기는 지원의 손길 한 번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연기는 지원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걸어 양치했다. 난 이런 것 따위는 하지 않아도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항의하려던 연기가 어딘가 신이 나 보이는 지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말 잘 들으면 장난감이랑 옷도 사 줄게."

장난감은 그리 바라지 않았지만, 새 옷은 좋았다. 연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보여야 계약을 해주겠지? 연기가 지원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주인님, 근데….“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지원은 연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뻔히 보았음에도 말을 뚝 잘라먹고 질문을 던졌다. 연기의 이름을 물은 지원이 한참을 기다려도 연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해."

지원은 제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연기를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연기는 좀 얻어맞아야 말을 듣는 성격인가보다. 지원이 중얼대며 한숨을 쉬었다. 지원이 연기를 때리려는 순간 연기가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없어….“

어떻게든 이름을 떠올려보려던 연기가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개집 안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나도 이름이 있었는데, 분명히 인간일 때는 있었을 텐데….고개를 처박은 탓에 잔뜩 치켜들어진 엉덩이가 지원의 얼굴에 닿았다.

"집 싫다고 지랄을 하더니 이젠 엉덩이까지 흔들 정도로 마음에 드나 보네."

지원이 말랑한 연기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또 내려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지원에게 엉덩이를 내준 연기가 꾸물거리며 쿠션에 얼굴을 비볐다.

"흐으…."
"좋아?"
"으,응….그게 아니라….“
"아니긴. 넌 어디든 만져주기만 하면 개새끼처럼 발정하지?"
"아니야."

연기가 우악스럽게 제 엉덩이를 잡은 지원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지원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연기를 희롱하기 바빴다.

"길 가다가 따먹혀도 조금만 쓰다듬어주면 좋아할 거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지원은 제 엉덩이에 대고 수치스러운 말을 내뱉는 지원에게 마구 항의했다. 잡힌 엉엉이를 놓아달라며 온갖 소리를 지르고 몸을 뒤흔든 연기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지원은 또 그 소음이 찾아올까 두려워 세게 쥐고 있던 연기의 엉덩이를 놓아주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는 주인님이 만져줘서 좋은 거란 말이야….“

개집에서 기어나온 연기가 어느새 지원의 무릎에 자리 잡고 앉아 울먹였다. 또 때리려나? 연기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지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연기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자 지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때리지도 않고 호통치지도 않는 지원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연기가 손을 뻗어 지원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읏.”
“여기 아파?”

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하자 화들짝 놀란 연기가 손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만일 주인님이 아픈 거라면 계약이랑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지원의 목에 닿아 열이 오른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주인님?"

지원은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당장에라도 연기를 집어 던지거나 뺨을 쳤을 텐데, 지금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딱딱히 굳어있는 것이 전부였다. 설마 계약의 부작용으로 죽는 건 아니겠지?

“기분이 안 좋아?”

걱정되는 마음에 한숨을 쉰 연기가 지원을 달랠 방법을 떠올리고 금방 행동으로 옮겼다. 연기가 지원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살짝 핥아 올렸다.

"뭐 하는….“

연기 나름의 위로 방법이었다. 흡연귀들이 가득한 나라에서는 서로의 입으로 기를 불어넣어 주어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기도 했다. 연기는 불순한 의도 없이 지원의 입술을 핥으며 숨을 불어넣었다.

"이제 기분 좀 괜찮아?"

안 그래도 넋이 나가 있던 지원은 연기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일으켜 방안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연기는 제가 또 주인님을 화나게 했다는 생각에 잔뜩 풀이 죽었다.

* * *

그 후로 사흘간 지원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연기가 엉엉 울며 잘못을 빌었지만, 지원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귀를 틀어막았다. 몇 번이나 견디기 힘든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고 들어왔지만, 연기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나 배고파. 나 다시 사라지면 어떡해. 또 변하고 있어. 응?"
"하….“

쟤는 지치지도 않나? 지원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나오지 않으면 체념하고 있으면 될 것을 사흘 내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저를 불러댔다. 주인님, 주인님하고 애처롭게 불러대는 목소리에 지원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냄새났어? 왜 안 나와. 나는 주인님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그런 거란 말이야. 주인님을 화나게 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

냄새가 났느냐는 말에 지원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냄새가 나긴 났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뜨거웠던 연기의 맛을 떠올린 지원이 침대 시트를 힘주어 붙잡았다.

"씨발….“

도대체 왜 흥분하는 건데? 진짜 돌아버린 거 아니야?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고 있음을 느낀 지원이 이마를 짚고 미친 듯이 고개 저었다. 제 발기까지 연기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기에게 아무 데서나 발정이 난다며 잔소리를 해댈 처지가 아녔다. 도대체 연기의 어느 부분에 흥분하게 된 걸까 깊게 생각하던 지원이 흰 엉덩이를 내밀고 주인님이 만져줘서 좋은 거라고 말하는 연기의 얼굴을 떠올리고 악을 질렀다.

"이러다가 진짜 귀신 새끼 따먹는 거 아니야?"

지원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단단히 잠겨있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흐느끼는 목소리를 보아 분명 또 울고 있을 텐데, 그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건가? 막막했다.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엉겨붙으면 제어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지원이 문을 열려다가 말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었다.

"야. 너 혼자 알아서 챙겨 먹고 자고 있어. 나 안 나가."

지원은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연기를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벌써 사흘째 얼굴을 보지 않아도 흥분은 여전했다. 말랑하고 따뜻했던 연기의 혀와 달콤한 냄새가 났던 타액은 1년간 자위를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

지원의 통보에 울음소리가 뚝 멈췄다. 포기하고 갔나? 생각할 때쯤 등 뒤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지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연기와 있는 며칠 간은 다른 귀신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운은 틀림없었다. 왜 갑자기 또 이러는 거야? 그동안 괜찮았잖아. 지원이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었다. 굳게 잠긴 문틈 사이로 무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어떻게 생긴 귀신일까? 며칠 전에 말한 팔척귀신일까? 제 이야기를 해서 화가 난 걸까?

"제발, 제발 가."

마음같아서는 이불 속에 숨거나 옷장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귀신을 다시 마주한다고 생각한 지원은 공포에 사로잡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나저나 연기는 어떻게 된 걸까. 그 사이에 잡아먹힌 걸까?

"씨발….“

공포에 질려 있던 지원이 욕설을 짓씹었다. 잡아먹었다고? 걔를? 그 순진한 애를? 지원이 이를 갈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연기가 숨 쉴 때마다 손찌검했던 지원은 이상하게도 연기가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나랑 걔가 뭘 잘못했다고 지랄인데? 지원이 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기도 만질 수 있었으니 저 이름 모를 귀신도 만질 수 있지 않을까? 지원이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를 들어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악"!

둔탁한 타격감과 함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에 성공한 지원은 드디어 제가 모든 귀신과 접촉할 수 있단 생각에 신이 나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겉옷을 벗어 던졌다.

"주인, 흐….주인님…."

귀신을 패 죽이리라 다짐한 지원의 앞엔 다름 아닌 연기가 피를 흘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기는 깨진 스탠드 조각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연기가 멈칫한 지원을 보고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흐으, 난, 나는 그냥……“

요 며칠간 지원과 접촉하지 못해 다시 투명해지기 시작한 연기는 제 존재가 사라질까 무서워 반쯤 투명해진 신체를 문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허리가 눌리고 허벅지가 찢어져 나가는 고통을 이기고 들어왔더니 스탠드가 날아들었다. 뺨을 맞거나 물고문은 당한 적이 있어도 무기로 맞아 본 것은 처음인 연기가 충격에 빠져 몸을 말고 덜덜 떨었다.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스탠드를 들고 위협적으로 서 있는 지원의 모습에 연기가 문을 따고 나가 개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연기가 도망치마자 스탠드를 집어던진 지원이 담배를 물었다. 지원은 정말 연기를 때릴 생각이 없었다. 그 스산한 느낌은 분명히 날 괴롭혔던 악귀들이었는데…. 쟤한테선 첫 만남 빼고는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부엌에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이 깨진 스탠드를 저 멀리 밀어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야.”

이번에는 정말 때릴 생각이 없었다고 전부 실수였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와봐.”

지원의 강압적인 말투에 연기가 좀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개집에 핏자국이 번지기 시작했다.

“얼른.”

지원은 살살 달래어 불러도 모자랄 판에 발끝으로 개집을 툭툭 차며 명령했다. 물고문을 당했을 때보다 훨씬 더 겁을 먹은 연기는 스스로 기어나오지 않았다.

“미, 미안해.”

어색한 사과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개집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이거다 싶어 고개를 숙인 지원이 한 가지 제안했다.

“지금 나오면 이름 지어줄게.”
“정말?”

연기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말에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내밀었다. 피와 눈물이 섞인 얼굴은 정말이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지원이 연기에게 손을 뻗었다.

“응. 약속할게.”

지원이 제게 바나나를 건네주었던 어린아이를 떠올리며 연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달리 다정한 모습에 연기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지원의 손바닥 위로 손가락 하나를 올려놓았다. 지원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기어나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냈다. 연기는 제가 손바닥을 만져도 쳐내지 않는 지원에게 천천히 경계심을 풀었다.

"나가도 돼?"
"응."

분명히 나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건만 연기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지원이 얇은 손목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은 연기가 대리석 바닥에 턱을 부딪쳤다.

"아!"
"씨발. 나오라고 할 때 빨리 기어나와. 왜 매를 벌어!"

그렇게 지원은 또 연기를 울리고 말았다.

0
이번 화 신고 2019-12-10 19:55 | 조회 : 1,236 목록
작가의 말
치령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