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스토커

얼굴 상처는 언제 사라진 거지?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지원이 연기의 셔츠를 걷어 복부를 매만졌다.

"멍도 없잖아?"

분명히 골목길에서만 해도 연기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한 사람처럼 얼굴에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그러고 보니 가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연기가 제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답답하고 두려웠다. 또 갑자기 연기의 몸을 더듬으며 발정한 자신의 행동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나."

지원의 심란한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연기는 판판한 배를 들어낸 채 입술을 오물대고 있었다. 집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제가 주워왔다가 다시 버리기엔 또 신경이 쓰였다. 이대로 버리고 가면 또 골목길에서 질질 짜는 것밖에 더하겠어?

"….“

어차피 버려봐야 다시 찾아올 것이 뻔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지원이 차를 출발시켜 집으로 향했다.

"으응…."

세상모르고 행복하게 자던 연기가 제 허리에 느껴지는 체온에 천천히 눈을 떴다. 주인님이야? 연기가 잠이 덜 깨 느릿느릿 물었지만, 지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연기를 번쩍 안아 들어 트렁크에 처박아 두었다.

"악!"

눈을 뜨자마자 트렁크 안에 갇힌 연기가 소리를 질렀다. 지원은 어둡고 컴컴한 곳이 연기가 가장 꺼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열어줘! 열어줘! 싫어!"

연기가 주먹을 쥐고 트렁크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나는 어둡고 좁은 곳이 제일 싫다고 싫어! 답답해! 싫어! 트렁크 안에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지원은 끝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흐으, 부탁할게요. 제발 열어주세요….“

연기가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다. 그토록 가까워지기 바랐던 지원을 정식으로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연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울음을 터뜨렸다. 연기가 눈을 질끈 감고 제 몸을 기체로 만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몸을 연기로 만들 수 있다면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몸을 자유자재로 바꿀 만큼의 기력은 없었다. 차라리 주인님을 안지 말걸. 그랬다면 몸이 계속 기체였을 텐데. 연기가 쓸데없는 후회를 하며 몸을 감싸 안았다.

"흐으, 으….“

완전히 겁에 질린 연기는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연기의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주인님이 이 문을 언제 열어줄까, 언제쯤 화가 풀릴까. 연기는 돌아오지 않는 지원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 * *

연기를 트렁크에 쑤셔 넣고 집으로 들어온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귀신인 연기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싫었다. 그런데 그냥 버려두기엔 눈곱만큼 남은 동정심이 지원을 괴롭혔다. 결국, 종일 시달리며 신경 쓰는 것보다는 연기가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선택한 곳이 트렁크였다.

“따뜻하고 빛 안 들어오고 아늑하고 여차하면 틈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도 있고."

그정도면 만족했겠지? 지원이 홀로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말 괴롭힐 생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원의 얄팍한 배려에 연기는 씻어낼 수 없는 상처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지원이 와인을 꺼내 마시며 실없이 웃었다. 오만가지 귀신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하얗고 말랑말랑해서 은근히 귀여운 맛이 있는 연기 쪽이 나았다. 또 요즘은 어깨도 아프지 않아서 아침에 눈 뜨기가 수월했다. 얼른 죽기를 바랐을 땐 어깨 통증이 반가웠는데, 이젠 제힘으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통증이 사라졌으면 했었다.

"뭐, 좋은 점도 있네."

연기의 몸을 한번 만지고 나면 두통은 물론 정신까지 맑아졌다. 지원은 연기를 트렁크에 가둬두고 아프거나 지칠 때마다 만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원은 순종적인 연기를 완전히 낮잡아 봤다.

“하….”

술기운이 돌자 나른해진 지원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폭신한 침대가 말랑한 연기 같다고 생각한 지원이 피식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술을 먹고 잠이 든 지원은 다음 날 오후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봐야 할 일이 없어 무료하기만 했기에 지원의 몸에는 늦게 일어나는 편이 이득이었다.

"...아."

한두시간은 더 자려던 지원은 귓구멍을 쑤시고 들어오는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울음소리에 지원이 머리를 쥐 뜯으며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왜 또 울어대고 지랄이야."

연기와 접촉하지 않는 이상 이 울음소리가 멈출 리가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토대로 깨달은 지원이 카디건을 걸치고 트렁크로 향했다.

"흐윽, 흐….“

아니나 다를까 트렁크 문을 열기도 전에 연기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문을 열면 또 달라붙겠지. 지원에게 징징 울기만 하는 연기는 골칫덩이였다. 연기가 몸에 닿는 것을 원치 않는 지원이 트렁크 문을 열고 한 발짝 떨어졌다.

"...흐으, 으으….“

지원의 생각과는 달리 연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탈수가 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지원이 제게 눈길도 주지 않는 연기의 행동을 비웃었다.

"꼴에 시위하는 거야?"

주인님, 주인님 하며 달라붙을 땐 언제고? 지원이 등을 돌리고 있는 연기의 옷을 잡아당겼다. 바닥을 잡고 버틸 버티리라 생각했는데, 연기는 지원의 손에 힘없이 끌려왔다.

"야."

지원의 부름에도 연기는 아무 반응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한 지원이 옷 소매로 손을 감싼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연기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야. 들리면 눈 떠 봐."

맨손이 아니었음에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찬기에 지원이 인상을 썼다. 오늘은 영하도 아니고 여긴 바람도 안 들어오는데 왜 이래?

"일어나라고."

지원이 연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눈물로 범벅되어 퉁퉁 부은 눈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원이 낮게 욕을 짓씹으며 연기를 안아 들었다. 머리로는 어차피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몸이 절로 움직였다.

"귀신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약해 빠진 거야?"

입은 모진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행동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지원이 땀에 젖어 축축해진 연기의 옷을 벗겨 내고 제 카디건을 입혀주었다. 지원의 몸에는 딱 맞는 카디건이 연기에게는 맞지 않았다. 마치 포댓자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펑퍼짐했다. 지원의 골반까지 오는 길이는 연기의 무릎까지 내려와 치마를 입은 것 같았고 길이가 긴 소매는 축 늘어져 있었다.

"팔척귀신이었나."

큰 옷을 입고 늘어진 연기의 모습에 지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키 240cm의 귀신을 떠올렸다.

"….“

실제로 팔척귀신에게 시달린 적이 있는 지원은 장난스레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귀신은 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자주 달라붙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진 것 같았다. 지원이 침대 매트의 온도를 올리고 연기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정말 같이 눕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에 혼자 있기에는 무서웠다. 얘가 팔척귀신을 이길리는 없겠지? 귀신이면 키도 크고 좀 무섭게 생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겨선 아무도 못 이기겠다.

"에휴."

어쩌다 내가 귀신을 걱정하는 팔자가 됐을까. 지원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픽 웃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눈을 깜빡이던 지원이 끙끙대며 뒤척이는 연기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만진다고 나중에 저주받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여태까지 괜찮았으니까....

"추워….“
"춥긴 뭘 추워."

연기가 몸을 덜덜 떨며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등이 뜨거울 정도로 온도를 올려둔 지원이 잠꼬대하는 연기에게 핀잔을 주었다.

"야."

지원이 한참이 지나도 계속해서 덜덜 떠는 연기의 등을 툭툭 쳤다. 귀신이라 무슨 약을 먹는지 몰라 도울 수도 없었다.

"추워….“
"난 너 때문에 타 죽게 생겼는데."
"으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연기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렇게 트렁크가 싫었으면 나왔으면 됐잖아. 너도 좋아서 그러고 있던 거 아니야? 지원이 짜증을 내며 연기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어? 어떻게 해주면 되느냐고."
"안아줘….“

안아달라는 말 하나는 똑똑히 했다. 지원이 잠시간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고 연기를 끌어안았다. 그래, 건강해야지. 아직 이용할 가치가 있는데 이렇게 비실비실하면 어떡해? 확인해볼 것도 있단 말이야.

"으웅….“

연기가 지원의 몸에서 조금씩 바르작거렸다. 차가웠던 연기의 몸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지원이 후끈하다고 느낄 정도로 따뜻해진 연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빠를 찾아대며 울먹이는 연기를 보곤 조용히 손을 거뒀다.

"나이가 몇인데 아빠를 찾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원의 손은 연기의 머리칼에 닿아있었다. 손에 감겨오는 머리칼은 귀신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칼을 몇 번이나 쓰다듬던 지원이 연기를 힘주어 껴안았다.

"아빠, 흐으…아빠….“
"그래, 그래. 아빠 여깄다."

지원이 연기의 수준에 맞춰 주었다. 지원이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모자라 아빠 노릇까지 해주었다.

"안아줘….“
"얼마나 더 안아."

지원은 연기가 깨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말대답을 했다. 연기는 지원이 자장가를 불러주자마자 울먹임을 멈추고 잠에 빠져들었다. 연기의 숨에 지원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콧김도 참 기운차네.

"자?"

지원이 연기의 얼굴에 손을 휘저었다. 두 차례 반복해도 연기가 뒤척이지 않자 지원이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안 돼….“

자는거야 안 자는 거야? 어쩐지 깨어있는 것처럼 반응하는 연기의 행동에 지원이 볼을 꼬집어 잡아당겼다. 연기의 성격상 깨어있었다면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피웠을 텐데 풀어진 얼굴로 뒤척이는 게 전부였다. 애도 아니고 정말 성가시네. 지원은 결국 첫 만남처럼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연기를 떼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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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6 20:12 | 조회 : 1,13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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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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