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스토커

* * *

연기가 눈을 뜬 곳은 차가운 바닥이었다. 연기는 지원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공원에 버려져 있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연기가 몸을 둥글게 말고 신음했다. 한참이나 엎어져 있던 연기가 천천히 일어나 눈물을 쏟았다. 연기는 지원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주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허리도 감싸 안아주고 이쪽저쪽 만져주기에 꽤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원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돌변해 난폭하게 행동했다. 연기는 그런 지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처음에는 날 보고 도망가기에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아기일 때는 잘 해줬으면서. 연기가 입을 삐죽 내밀고 한숨을 쉬었다. 꺼지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속상해."

지원에게 버려져 이곳에는 딱히 머물 곳이 없어진 연기가 터덜터덜 걸어 골목길로 향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골목길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연기가 사람들을 지나쳐 담배 연기를 흡수했다.

"하아….“

흡수하니까 좀 낫다. 좀 더 피워줬으면 좋겠다. 연기가 이름 모를 남자를 바라보며 한 개만 더 피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영안도 트이지 않고 무속인도 아닌 남자가 연기의 시선을 느낄 리 없었다.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했다. 연기가 굶주린 얼굴로 힘겹게 일어나 좀 더 깊은 골목길로 향했다. 돌아가자마자 향초 피우고 잠이나 자야겠다. 연기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

뭐야. 왜 안 돼? 연기가 숨을 크게 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 번을 시도해도 돌아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뭐야….“

왜지? 어느 정도 충전했는데 왜 못 가는 거야? 연기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벽을 거칠게 내리쳤다. 이게 왜 이러는 걸까? 연기가 골목길에 서서 제 보금자리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상했다. 보통 골목길에서 인간들이 피우는 담배 냄새를 맡고 기력을 채우면 돌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돌아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왜….“

안 그래도 서럽고 아파 죽겠는데 돌아갈 곳이 사라지자 막막해졌다. 연기가 골목길 벽을 벅벅 긁고 퍽퍽 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기는 최후의 방법으로 눈을 꾹 감고 진을 불렀다. 그러나 오늘은 진도 응답이 없었다. 진까지 응답이 없자 연기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다신 돌아갈 수 없게 된 건 아닐지, 평생 이렇게 연기만 찔끔찔끔 받아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에 손까지 떨며 불안해했다.

"진, 있어? 내가 잘못했어. 흐으, 한 번만 도와줘…."

보통 연기가 서럽게 울면 진은 1분 내로 달려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진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또 해가 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더는 담배를 피우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연기는 무력했다. 지원을 껴안고 자 회복했던 기력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제 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을 본 연기가 엉엉 울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불안감에 휩싸인 연기가 벽을 짚고 일어나 밝은 곳으로 향했다. 물론 몸이 흐려진다고 해서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안한 정신상태로는 모든 것이 두렵게 다가올 뿐이었다. 얻어맞은 뺨과 복부가 아팠다. 연기가 얼마 못 가 힘이 풀려 헐떡였다. 그토록 따라다니며 지켜줬는데 어떻게 때릴 수가 있어? 나빠. 정말 나빠.

“흐으….”

더 움직일 힘도 없었고 딱히 머물 곳도 없었다. 결국, 연기는 근처 골목길로 들어가 벽에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아파. 아파….”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뺨을 비비던 연기가 지원에게 얻어맞은 복부를 감싸 안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속이 울렁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것을 느낀 연기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구역질을 했다.

“흐으, 피가…피가….”

한참이나 쉬지 않고 쏟아낸 토사물을 확인한 연기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마 오늘이 연기의 수난시대인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피를 토해보는 연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럴 리가 없어. 난 이미 죽었는데, 난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싫어! 싫어!"

연기가 입가에 범벅된 피를 미처 닦지도 못한 채 땅을 기며 고개를 저었다. 연기를 안아줄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이럴 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연기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까뒤집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죄어왔다.

"허, 윽…허…."

두번도 죽을 수 있는 거구나. 연기가 무거워지는 눈을 깜빡이며 축 늘어졌다. 인간일 때도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 못 하는데, 지금은 왜 죽는 걸까. 애초에 내가 뭘 잘못했길래 담배 연기나 먹고 사는 귀신이 된 거지? 연기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골목길에 들어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연기 위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도 연기는 기력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렸다.

"하아,하…."

흐려지는 시야 틈으로 큰 손이 보였다. 이미 몸이 반쯤 사라진 연기의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눈 떠! 나 봐!"

죽기 일보 직전의 연기가 제 눈앞에 서 있는 지원을 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정말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아팠는데, 지원의 몸에 닿자 정신없이 난동을 부리던 심장 고동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연기가 지원의 목을 감싸 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지원이 인상을 쓰고 연기를 받쳐 안았다.

"주둥이 치워."

지원은 정도를 모르고 제 목을 쪽쪽 빨아대는 연기의 머리통을 퍽 소리나게 내리쳤다. 그럼에도 연기가 훌쩍대며 몸을 더듬자 지원이 다시금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미친놈 아니야?"

연기 하나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왔던 지원은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나 아파아….“
"알았으니까 입 다물어. 너 때문에 또 나만 미친놈 취급받잖아."

지원은 저를 두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황급히 멀어졌다. 연기를 제 차 안에 처박은 지원이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한숨을 쉬었다.

"뭐."

연기가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채 지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차마 안아달라는 말은 못하고 입을 삐쭉 내밀고 조용히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원이 제 가슴께를 붙잡고 신음했다.

"왜, 왜?"

지원이 고통스러워하자 벌떡 일어난 연기가 지원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마음대로 만졌으니 분명히 때리겠지? 지원의 고통에 저도 모르게 저지른 연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때려?”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려 차 시트를 꾹 쥐고 있던 연기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조심스레 눈을 뜨고 물었다.

“뭐?”
“아, 아니…. 때릴 줄 알고….”

원래 때릴 생각 없었으면 나야 고맙지. 연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원에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다시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너 씨발. 나한테 뭔 짓 했어."
"어, 어?“

지원이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연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오전 일로 인해 맞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굳은 표정의 지원이 무서웠다.

"여기가 아프다고."

지원이 연기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어 제 가슴팍 위에 가져다 댔다. 여기에 뭐 했어. 너 버리고 나서부터 아파 죽겠다고. 지원의 말에 연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장난해?"
"정말이야…….“

연기가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얻어맞고 버려진 것밖에 없는데 이제 나 때문에 아프다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럼 왜 아픈데."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지만, 내가 한 건 아니야."

연기는 제 탓을 하는 지원이 미웠지만, 모진 말은 하지 못했다. 배운 적도 없었고 혹시 지원이 상처받을 것을 생각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 미치겠네."

지원은 제 가슴 통증이 연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더 화가 났다. 신체의 절반이 투명해진 연기는 여전히 지원의 옷깃을 잡아 붙들고 있었다.

"뭐 어떻게 하라고."

지원은 연기가 안아주길 바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손을 밀어내고 입술을 우물대며 곤란해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안아줘….“

연기가 조용히 속삭였다. 얼굴이 가까이 있어 지원에겐 충분히 들릴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원은 끝까지 짓궂게 행동했다. 연기의 말을 못 들은 체한 지원이 차 시동을 걸었다.

"안아줘!"

지원이 차를 출발시키면 꽤 오랫동안 만지지 못하리라 생각한 연기가 소리쳤다. 지원이 고개를 돌리자 제가 말해놓고서도 깜짝 놀란 연기가 방어자세를 취하고 몸을 웅크렸다.

"이리 와."
"….“
"오라고!"

지원도 꽤 오래 참고 있었다. 연기가 슬금슬금 팔을 뻗자 지원이 거칠게 잡아당겨 제 품 속에 욱여넣었다.

"하아….“

지원의 입에서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통증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연기를 두들겨 패고 갖다 버린 시점부터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약을 먹고 가만히 쉬어봐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우읍….“

그리고 자꾸만 우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에 근처 공원으로 향했었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잠깐, 너무 숨 막혀…."

멀리서 멍을 매단 채 울고 있는 연기의 모습이 보았을 때는 심장이 마구 요동쳤었다.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의 고통과 소음에 연기에게 손을 댔는데, 놀랍게도 고통이 사그라졌다. 연기가 제게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지원이 이를 갈았다. 어디에 가둬두고 고문하리라는 생각으로 끌고 왔던 지원은 현재 연기의 몸을 짓누르고 목에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지원과의 접촉 덕분에 신체를 모두 되찾은 연기가 몸을 버둥거리며 지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아, 하…이거 좀 이상….읏!"

지원이 연기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무릎으로 성기를 짓눌렀다. 연기는 제 성기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은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바르작거리며 헐떡댔다.

"씨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원이 연기의 뺨을 후려치고 휴대용 소독제를 제 손에 퍼부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화나서 이상한 걸로 변하면 어떡하지? 지원이 공포에 질려 조심스레 연기를 곁눈질했다.

“…미친.”

화는 무슨. 연기는 속옷을 적신 채 황홀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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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5 15:43 | 조회 : 1,00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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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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