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스토커

주의 : 물고문, 폭행, 학대 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 * *


“으으….”

악몽에서 해방된 지원이 가까스로 눈을 떠 상체를 일으켰다. 연기는 여전히 지원의 몸을 베개 삼아 짓누르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지원의 시선이 제 허리를 껴안은 채 새근새근 잠든 연기에게로 향했다. 연기는 어느새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죽은 건가.”

다행히도 자살에 성공했구나. 지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여기는 사후세계이려나? 지원은 아무런 혼란도 느끼지 않고 제 죽음을 받아들였다.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귀신에게 매일 시달렸던 지원은 사후세계의 존재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와보는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기는 했다. 지원이 말랑말랑한 연기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어깨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이봐요. 얼른 일어나봐요. 나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모른단 말이야.”

연기는 이쪽저쪽 흔들리면서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연기가 쉽게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원이 그의 코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우,읍….”

다행히도 숨을 못 쉬게 하는 방법은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도 통했다. 괴로움에 팔다리를 버둥대던 연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진! 너 지금 뭐 하는 거…. 어?”

제게 이런 짓궂은 행동을 할 사람은 진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연기가 지원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지? 왜 기절 안 하지? 그새 가까워진 건가? 내가 껴안아줘서 그런가? 연기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지원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드디어 날 안 무서워하네? 그럼 우리 계약하자! 나 기억해? 나! 전에 만났잖아!”

지원의 목에 팔을 두르고 허벅지에 궁둥이를 붙인 연기가 잔뜩 신이나 히죽 웃었다. 지원은 말없이 연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아, 그 바나나랑 좀 비슷하네. 지원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연기는 저와 달리 탄탄한 몸을 더듬느라 바빴다.

“미안한데, 난 누가 만지는 거 싫어하거든?”

지원이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지원과 가까워졌다고 착각한 연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지지 마. 내려가.”
“조금만…….”

바나나를 주던 아이와 묘하게 닮았다는 이유로 화를 꾹꾹 눌러 참던 지원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손을 낚아채 집어던지듯 놓아버렸다. 그럼에도 연기는 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만 채우자. 나 그동안 배고팠단 말이야.”

눈물을 글썽이며 칭얼대는 얼굴에 홀려 넋을 놓고 있던 지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연기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지원의 몸을 마음껏 탐하던 연기가 순간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잠, 잠깐만! 왜 밀어!”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보려고 팔을 허우적대는 연기를 보다 못한 지원이 허리를 붙잡아 고정하고 시선을 마주했다.

“갑자기 그렇게 밀면 어떡해!”
“너 천사 같은 거야?”

연기는 제가 밀어놓고 다시 잡아주는 지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짜증을 내려다가 뒤이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사?”
“어.”

악귀 새끼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어도 천사라는 말은 또 처음 들어보는 연기가 어깨를 으쓱댔다.

“내가 좀 착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천사는 아니고 흡연귀야!”

연기가 제 가슴을 쿵쿵 내리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시키지도 않는 자기소개를 하며 이것저것 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줄 수도 있고 좋은 향기가 나게 해줄 수도 있어!”

연기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지원을 올려다보았지만, 지원은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흡연귀면 귀신이라는 거야? ‘귀’라는 단어에 지원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잠깐만, 그런데 내가 방금 얘를 만졌지 않나? 그럼 때려 팰 수 있는 거 아니야? 지원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연기가 저를 쓰다듬는 것이라 착각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왜 그래?”

스토커는 한참이 지나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는 지원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기를 내리치려고 했던 지원이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나도 귀신일 텐데 두려워할 것도 없지 않나?

“…그래서 여기는 사후세계지?”
“뭐?”

지원의 질문에 연기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이 덜 깼어? 주변을 좀 둘러봐. 연기가 다그치는 투로 이야기하자 지원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사후세계가 아니야?”
“아니야.”

제 무릎에 눌어붙은 연기를 억지로 떼어내 바닥에 내려 둔 지원이 조심스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괜찮아?”

지원이 입을 다물자 연기의 말 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연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원을 살폈다.

“응? 괜찮아? 응?”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연기는 1분 이상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연기가 지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재고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집…….”
“응. 네 집이야.”

사후세계가 아니라 집이라고. 지원이 홀로 중얼대며 허탈하게 웃었다. 연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지원이 웃음을 짓자 덩달아 즐거워했다.

“그럼 우리 이제……”
“넌 뭐야.”
“응?”
“네가 뭔데 여기에 있어. 너 누군데.”

지원이 다짜고짜 연기의 멱살을 휘어잡고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연기가 울상을 짓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흡연귀고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연기는 지원의 질문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묻는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아까도 흡연귀라고 소개했는데 왜 다시 묻는 거야? 연기가 다소 얌전하게 항의하자 지원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너 어디 모자라?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것 같아?”
“물었잖아. 나는 너의 흡연귀라서 여기에 있는 거야.”

연기는 잔뜩 겁을 먹고 기가 죽은 상태로도 제 할 말은 꼭 하고 보는 타입이었다. 지원은 남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온 주제에 아주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이는 연기를 노려보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들어왔느냐고!”
“음…. 한 세 시간 전에 내가 살던 곳에서 왔고, 온 이유는 네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들어온 건 욕조로 들어왔어.”

지원이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은 연기를 후려쳐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뭐야. 그럼 지금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거야? 어떻게 살아난 건데? 쟤가 정말 귀신인 건 맞아? 지원이 귀신으로 보기엔 좀 무리가 있는 외모인 연기를 훑어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파? 내가 좀 봐줄까?”

여태까지 봐 왔던 귀신과는 달리 순하고 귀엽게 생긴 외모를 가진 덕에 다행히도 두렵지는 않았지만, 죽지 못했다는 것과 평생 귀신과 엮일 운명이라는 것이 암담했다.

“당장 나가.”
“응? 드디어 만났는데 왜?”

지원은 연기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어디서 붙어 온 귀신인지 목적이 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연기는 지원의 속도 모르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지원의 물건을 구경했다. 맨발인 연기가 걸어 다닐 때마다 바닥과 땅이 맞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지원이 도대체 저게 어떻게 귀신일 수가 있느냐며 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정말 귀신일까? 귀신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 아닐까?

“너 이리 와 봐.”

지원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까딱여 연기를 불렀다. 그 손짓을 발견한 연기가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달려가 눈을 반짝였다.

“….”

지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꼬집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손락에 감겨왔다. 연기가 지원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낑낑 소리를 내었다. 어딜 보나 사람인데, 왜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이게 어떻게 귀신이야. 체온도 있고 말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기분 좋아…. 으응….”

연기가 야릇한 소리를 내며 앓자 지원이 급히 손을 거두었다. 씨발. 속아 넘어갈 뻔했네. 정주고 돌봐줬던 아이에게 한 번 속은 걸로는 부족했어? 지원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숨을 쉬었다. 저건 귀신이야. 체온이 있든 말을 하든 뭐하든. 나한테만 보이는 괴물이라고. 그래, 사람이 아니야. 귀신이니까. 귀신이니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날 살려낸 거겠지. 날 괴롭히려고! 날 못살게 굴려고!

"더 만져주지….“

연기가 아쉬워하며 눈을 뜨자 지원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알코올 소독제로 제 손을 닦아냈다.

"나 안 더러워. 깨끗한데 왜 닦아 내?"

지원의 행동에 연기가 토라졌다. 미간을 찌푸린 모습에 지원이 해탈 직전의 상태까지 다다랐다. 지원이 고개를 쳐들고 연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경찰 부를까? 불러서 이게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아니야. 아니야."

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려 뒀다. 속지 마. 속지 말라고! 미친놈 취급받는 건 이제 충분하잖아? 격한 스트레스 덕에 지원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아파?"
"씨발, 진짜.“

연기는 지원의 말투 덕에 '씨발'이라는 말이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뜻은 알지 못했기에 지원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눈 아프지. 그거 내가 낫게 해줄 수 있어. 네가 쓰다듬어 줬으니까 그 보상으로 낫게 해줄게."

연기가 공황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인 지원을 침대에 앉히고 손등으로 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연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달달 떨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진이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하면 되겠지? 연기가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바람 같은 걸 불어넣을 건데 따가울지도 몰라. 참을 수 있지?"
"꺼져."
"….“

연기는 '씨발'의 의미는 몰랐지만, 꺼지라는 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난 네가 아프지 않길 바랐을 뿐이야. 연기가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지원은 연기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날 너무 미워하지 마.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라….”
“꺼지라고 했잖아!”

연기가 충혈된 눈에 입을 맞추려고 하자 지원이 그의 복부를 걷어차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컥! 흐, 으으….”
“좆 같은 새끼가. 씨발.”

깜짝 놀란 연기가 눈물을 주르륵 떨어뜨렸다. 그는 한 손으로 제 배를 감싸고 남은 한 손으로는 뺨을 문지르며 엉엉 울었다.

“하아, 하아….때리지 마. 흐으….”

지원이 뺨을 감싸고 피를 뚝뚝 흘리는 연기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해.

“싫어…. 나는, 나는 여기 아니면, 네 곁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악!”

지원은 길어지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래, 질문한 내가 머저리지. 지원이 연기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아 발걸음을 옮겼다. 힘이 빠진 연기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지원은 그의 몸이 벽과 모서리에 쿵쿵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 흐….“
"내가 너 같은 새끼들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만지지 못해서였거든?"

연기를 욕실로 끌고 온 지원이 욕조 안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하, 하지 마. 하지 마!”
“나만 또 병신 될 뻔했네?”
“싫어, 싫…!”

지원이 제 핏물로 가득 찬 욕조에 연기의 머리를 욱여넣었다. 연기가 죽을 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머리를 짓누른 손의 힘은 풀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핏물이니까 네 피는 보이지도 않겠네.”

잠시라도 네가 귀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내가 머저리지. 지원이 혀를 차며 연기의 머리를 좀 더 깊숙이 처박았다. 욕조 속에서 보글보글 피 거품이 일자 지원이 배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푸, 흐아, 헉,헉, 흐….”

연기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신음했다. 지원이 정신 나간 놈처럼 웃는 사이 엉금엉금 기어 욕실을 빠져나온 연기가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가려는 찰나 지원이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흐으, 아파. 싫어, 흐으…. 잘, 잘못했어….”
“응, 알고 있어.”

침대 기둥을 생명줄처럼 부여잡은 연기가 바닥에 배를 붙인 채로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 손을 잔혹하게 짓밟아 떼어낸 지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용서라고 착각한 연기가 지원에게 매달려 눈물을 쏟아냈다.

“미안해, 흐….”

연기의 사과가 떨어지기 무섭게 지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 마지막 기회라고 했잖아. 너 어차피 죽지도 않잖아?"

지원의 고문은 단순하고도 잔인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욕조에 머리를 처박게 한 뒤 손을 놓아주었다. 생각회로가 공포에 마비되어버린 연기는 지원이 손을 놓아주자마자 열심히 기어 도망쳤다가 다시 끌려들어 오기를 반복했다.

“잘못…했….”

잔혹한 고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온몸을 핏물로 적신 연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핏물을 잔뜩 마셔 배는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고 눈코입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러나 지원은 안타까운 연기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연기가 아무리 빌고 빌어도 이미 마지막 기회를 놓쳤고 잘못을 했으면 그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반복될 뿐이었다. 수차례의 고문 끝에 지원이 방식을 바꾸었다.

“처박아.”

지원이 욕조 끝에 앉아 명령을 내렸다. 제 손을 쓰지 않고 고문하는 방법을 택한 지원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연기의 뺨을 쉬지 않고 내리쳤다.

“흐으, 흐, 흑. 아흐, 아….”

연기는 얻어맞은 뺨이 부어올라 한쪽 눈을 뜨지 못하게 될 때쯤에야 스스로 기어가 욕조에 머리를 처넣었다.

“고개 들지 마. 들면 안 끝나.”

가혹한 물고문은 연기가 정신을 잃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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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4 21:30 | 조회 : 1,59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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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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