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스토커

* * *

지원은 제가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코트에는 여전히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원이 묵직한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넣자 질척하고 미끄러운 것이 감겨왔다. 지원은 심장이 쾅쾅 뛰고 머리가 윙윙 울리는 탓에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미끈거리는 것이 뭘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꺼내 올린 지원이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바나나 껍질. 지원이 다 뭉개져 미끌미끌해진 바나나 껍질을 손에 들고 흐느꼈다. 지원은 그동안 함께한 아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썩어 문드러진 껍질도 남아있는데 어떻게 그 아이가 사람이 아닐 수가 있단 말이야? 지원이 바나나 껍질을 손에 쥐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왜, 왜….“

지원은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온 정성을 쏟아 아이를 돌봐주었다. 그 아이는 왠지 달랐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눈이 가고 챙겨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글을 알려주고 몸을 씻겨주고 머리카락을 잘라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지원이 생전 처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런 아이가 귀신이라는 사실에 지원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지원은 제가 살아왔던 모든 인생을 후회할 만큼 괴로워했다. 손을 덜덜 떨며 흐느끼고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던 지원이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지원이 텅 빈 눈으로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 벌써 몇십 년을 쓰레기 같이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지원이 결국 영양가 없는 헛짓거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악몽이 찾아왔고 선행을 베풀어도 귀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모두 포기해버리는 편이 정답이었다. 지원이 드라이기를 들고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들어가 몸을 기대었다.

"….“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 이대로 죽어도 아무도 날 찾지 않겠지. 지원이 픽 웃으며 드라이기를 들었다. 감전사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죽는다고 하던데, 그게 귀신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괴로울까?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지원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드라이기를 쥔 손에 힘을 풀고 고통 뒤에 찾아올 안락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뜬 지원이 나른한 얼굴로 일어나 콘센트를 살폈다.

“뭐야….”

분명히 괜찮았는데? 지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드라이기 선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드라이기 선이 누군가 고의적으로 잘라놓은 것처럼 완벽히 절단되어있었다. 누가 자르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하게 뚝 잘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지원이 머리를 감싸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야?


“흐, 씨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물을 마구 내리치던 지원이 도구를 쓰지 않고 죽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전선이 잘린 드라이기를 저 멀리 집어 던져 버린 지원이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에 고개를 처박았다. 눈과 코로 차가운 물이 밀려 들어왔지만,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아, 하…. 씨발, 도대체! 도대체 뭔데!”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 지원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지원은 누군가 제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다시 욕조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이 욕조에 머리를 욱여넣을 때마다 흰 연기가 머리채를 휘어잡아 물 밖으로 끌어냈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지원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나보다 더한 놈들도 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도대체 왜?

"왜! 왜!"

지원은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나을 지경이라며 면도날을 들어 제 손목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욕조 속 맑은 물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저를 막고 있다는 공포에 질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과다출혈로 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지원이 면도날을 세워 좀 더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유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지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아, 하….“

지원의 손목에 붉은 상처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손목이 너덜너덜해지기 직전까지 칼질하던 지원의 몸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놔. 제발 놔. 나를 죽게 해줘. 이제 그만하게 해줘. 지원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몸을 구속한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원은 결국 옴짝달싹하지 못해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죽으면 안 돼!"

팔을 부러뜨릴 듯한 힘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지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는데,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원은 차라리 예전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나으니 이런 식으로 저를 괴롭히지 말라며 애원했다.

"나와! 나오라고!"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제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지원이 눈을 까뒤집으며 입에 거품을 물 때쯤 무언가가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와 함께 욕조 안으로 뚝 떨어졌다.

"죽지 마. 안 돼. 죽으면 안 돼. 흐으, 으….“

지원은 아무 미동 없이 욕조에 축 늘어져 있는데, 욕조 안의 물은 시끄럽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연기로 된 흰 손이 지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힘이 풀려 점점 욕조 밑으로 가라앉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아 지탱하고 있는 연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으, 안 돼. 안 돼."

몸을 짓누르고 결박했던 힘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연기는 무능하게 지원의 옷깃을 꼭 붙잡고 징징거리기 바빴다. 축 늘어진 거구의 몸을 물 밖으로 끌어내기엔 연기의 팔은 너무나도 가늘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연기가 허공에 손가락질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왜 보고만 있어! 도와줘! 도와달라고! 진!”

연기가 욕조 옆에 놓인 양치 컵을 들어 마구 물을 뿌리자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기의 부탁에 모습을 보인 진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연기는 애가 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충 보아도 심각한 상황인데, 진이 여유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기의 징징거림에 불이 붙자 진이 한숨을 쉬며 욕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빨리 끌어올려 줘! 빨리이!”
“네가 해. 스스로 하면 되잖아.”
“못하니까 널 여기로 부른 거 아니야!”
"그러게 누가 마음대로 행동하래?"
"그럼 얘가 죽으려고 하는데 어떡해!"

연기의 눈이 퉁퉁 부어 터져나가기 직전임에도 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연기가 목놓아 울어도 내가 꺼내주면 뽀뽀해줄 거야? 하며 말장난을 했다.

“다 해줄게!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까 도와줘! 흐으, 빨리….”

연기가 진의 손목을 잡고 애원하자 진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연기는 슬펐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써버려 사람의 형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이러다가 지원이 죽어버리면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 제발!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뭐든 다 할 테니….”
"알았어. 그만 울어. 나 자지 터질 것 같아.“
“뭐, 뭐?”

연기가 깜짝 놀라 울음을 뚝 멈추고 손에 힘을 풀자마자 진이 손을 뻗어 지원을 건져냈다. 온몸이 핏물로 범벅된 지원의 손목을 붉은 천으로 감싼 진이 바람을 불어 상처를 치료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어떻게 한 거야?”
“힘 좀 썼지. 너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는 말 잊으면 안 된다?”
“으,응….”

매우 긴박한 상황이라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던 연기가 불룩하게 솟아있는 진의 바지 앞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연기가 급격히 침울해지자 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너 그래서 이건 어떻게 수습할 거야?”
“뭘?”
“얘 너 봤을걸.”

진이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는 지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목소리도 들었고 네 얼굴도 봤는데 가만히 있겠어? 진의 물음에 연기가 울상을 지었다.

“사실 이전에도 들킨 적 있어. 날 막 따라왔는데, 내가 힘이 풀려서 둥둥 떠있으니까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더니 도망갔어.”
“널 무서워한다는 거야?”
“응, 얜 귀신 무서워해.”
“…그렇게 안 생겼는데.”
“그렇지? 근데 꽤 오랫동안 시달렸어. 내가 계속 지켜봤거든. 얘가 내 기인지 아닌지 알아내려고.”
“차라리 일찍 도와주고 계약하자고 하지 그랬어?”
“무서워서….”
“참 겁도 많다.”

진이 혀를 차며 지원을 안아 들었다. 무겁긴 더럽게 무겁다고 신경질을 내는 진에 연기가 눈치를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진은 연기가 곤란해하면 할수록 신이 나 콧노래를 불렀다.

"이젠 어떡하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지. 언제까지 나한테 기댈 거야."

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자 연기가 한숨을 쉬었다. 연기는 귀신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지원 덕에 여러모로 곤란했다. 인사를 하고 친해지기는커녕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나를 무서워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연기가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지원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더니 잘 빠진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헤실헤실 웃었다.

"그거 성추행인 건 알아?"
"뭐?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어차피 가까워지려면 이런 것도……“
"쟤가 만약 깨어있었으면 또 기절했을걸."

진의 말에 연기가 다시금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얼른 가까워져야 하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 난 먼저 간다.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해."
"가게?"
"어. 이거 처리하러 가야지."

진이 손가락으로 제 성기를 가리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중에 풀어주기로 한 약속 어기면 안 된다? 라는 말에 연기가 길길이 날뛰며 침대를 쿵쿵 내리쳤다.

"으,으….“

큰 소음에 지원이 몸을 뒤척이자 연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행동을 멈추고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연기는 지원의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축 늘어졌다. 오늘 하루 힘을 많이 써서 움직일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기가 힘겹게 움직여 지원의 허리를 껴안았다.

“좋다…. 이런 거 처음이야. 너무 좋아.”

지원을 껴안은 연기가 헤벌쭉한 얼굴로 침을 질질 흘렸다. 연기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홀로 조잘조잘 떠들고 실실 웃기도 했다. 연기가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생각 없이 한 행동 덕에 지원은 오늘도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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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4 00:30 | 조회 : 992 목록
작가의 말
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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