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토커

* * *


지원이 눈을 뜬 곳은 다행히도 차가운 길바닥은 아니었다. 흰 연기를 내뿜는 가습기는 예민한 지원의 성질을 건들기엔 충분했다. 지원이 신경질적으로 가습기의 전원을 꺼버리고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었다. 지원은 누가 자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왔는지, 몸에서는 왜 이렇게 지린내가 나는지 따위를 궁금해할 정신이 없었다. 누가 침을 뱉은 것처럼 끈적끈적해진 지갑을 열어 카드로 수납한 뒤 병원을 나섰다. 택시에 오른 지원은 지갑 안에 현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수상하게 여겼다.

"그 자식인가."

지원이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 끝에는 스토커 귀신이 있었다. 귀신이니 돈을 탐낼 리는 없겠고. 그럼 그냥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이딴 짓을 했다는 말이지? 지원이 분노에 손을 벌벌 떨었다. '귀신을 만질 수 있는 법' 지원은 그것이 필요했다.

"하….“

만질 수 있다면 두렵지 않을 텐데. 만질 수가 없었다. 흡연자만 따라다닌다고 했으니 이참에 담배를 끊어볼까? 목적지에 도착한 지원이 골목길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대만 피우고 버리자. 얼마 안 가 깨질 결심을 한 지원이 담배 하나를 물어 불을 붙였다. 그 후 남은 담배들을 모두 부러뜨려 바닥에 버린 뒤 등을 돌렸다. 다시는 사지 말자. 귀신이랑 또 만나고 싶으면 사는 거야. 스스로와 약속을 한 지원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뭘 뿌려놓은 거야.”

지원이 제 몸에서 나는 지린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 쩐 내라고 생각하기엔 지갑부터 시작해 몸 전체에 흩뿌려진 끈적한 무언가가 신경 쓰였다. 검사해서 이게 뭔지 알아낼까 생각하던 지원이 이내 고개를 젓고 욕실로 향했다. 액체의 정체를 알아내면 뭐하겠는가? 어차피 귀신이 저지른 일이라 잡지도 못할 텐데. 불쌍한 내 팔자. 지원이 한숨을 쉬며 몸을 씻어냈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샤워를 마친 지원은 가운을 입고 드러누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술을 마실 속셈이었다. 지원은 결국 양주까지 비우고 나서야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잠들면 왠지 악몽을 꿀 것만 같은 기분에 지원이 억지로 잠을 참아냈다. 말 좀 모나게 하고 정직하게 살지 않았다고 귀신에 시달리게 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잘못 없는 사람을 폭행한 것도 아니고. 지원이 신경질을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 SNS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지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실시간 검색어를 살펴보며 기사를 읽는 것이었다. 그 중 지원의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봉사활동으로 삶이 달라졌습니다.'

"지랄."

지원이 기사를 읽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거 아닌가? 기사 속의 노인은 봉사활동이 정말로 행복하다는 얼굴로 밝게 웃고 있었다. 하여간 정치인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가식 덩어리네. 지원은 '젖비린내가 나는 애새끼들이 혐오스럽다.' 라고 말하던 노인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휴대폰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실시간 검색어를 모두 확인한 지원은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담배도 끊기로 했는데, 설마 또 악몽을 꾸겠어?

“후….”

이리저리 나뒹구는 술병을 한 곳으로 밀어둔 지원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뭔지 지원은 베개에 머리를 놓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원은 아주 괴로운 꿈을 꿨다. 귀신에게 눈깔을 파먹히고 장기를 하나하나 천천히 뜯어먹히는 잔혹한 꿈이었다. 발작하듯 눈을 뜬 지원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몰아쉬었다. 담배 끊는다고 했잖아.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이러는데? 그만 좀 하란 말이야. 제발 그만 좀 해.

“제발 그만 해. 제발. 좀!”

지원이 죄 없는 침대를 내리치며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으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피가 흘러내렸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다 들어줄 테니까 제발 이러지 좀 마. 지원은 지금도 두려웠다. 이 넓디넓은 집 어딘가에 귀신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정신이 혼미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엔 불안감이 너무도 큰 상태였다. 지원은 결국 바닥을 기어 흰 약통에 든 약을 털어 넣었다.

"착하게 산다고. 착하게 살겠다고….“

약기운에 쓰러지듯 잠든 지원은 온종일 악몽에 시달렸다.

* * *

오전 6시. 이른 시간 눈을 뜬 지원은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 전날의 과음 때문인지 꿈속에서 장기를 몇 번이나 씹어 먹혀서인지 모를 구역감이었다. 구토가 멈췄음에도 한참이나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지원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양치를 했다. 꿈속에서 착하게 살 테니 제발 그만 멈추어달라고 몇백 번을 애원했다. 하지만 악귀들은 지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원은 아침 일찍 외출채비를 마쳤다.

“…….”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직접 보여줘야 그 악몽이 멈출 것만 같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원은 제일 처음 보육원으로 향했다. 지원이 할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이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청소하고 놀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는커녕 사람도 제대로 상대해본 적이 없는 지원은 예상대로 매우 무뚝뚝하게 행동했다. 그 덕에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구석에 들어가 숨는 등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정도로 도움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지원은 귀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하나로 억지웃음을 만들고 최대한 다정한 척 아이들을 돌봤다. 다행히도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꽤 많아 한곳에 모아두고 감정 없이 대충 책을 읽어주었다.

"이것도 읽어주세요."

동화책을 읽어주자 금방 마음을 연 아이들이 지원의 몸에 달라붙어 칭얼댔다. 신체접촉을 싫어하는 지원은 당장에라도 아이들을 떼어놓고 싶었지만,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귀신을 생각하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

지원은 거의 두 시간가량을 앉아 책을 읽어주었다. 목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빌어먹을 보육원에는 무슨 책이 이렇게 많은지 드디어 끝났구나 싶으면 어딘가에서 또 책이 튀어나왔다. 총 열 권의 책을 읽어준 지원은 착하게 사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았다. 체력이 남아도는 수준이었다. 지원이 온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져 있을 때 아이들은 더 놀아달라며 조르기 바빴다. 안간힘을 다해 저녁 시간까지 견딘 지원은 싸구려 카레와 바나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걸 지금 먹으라고 둔 건가? 처음 왔다고 배척하는 건지 뭔지 봉사자라는 놈들은 끼리끼리 뭉쳐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있었다. 애초에 어울릴 생각이 없던 지원은 아이들 틈에 껴서 카레를 떠먹었다. 카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먹게 되었을 땐 항상 고급진 카레를 먹었던 지원은 '3분 카레'라는 것을 한입 먹고 조용히 헛구역질했다.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다 으깨진 감자에 씹히는 감이 전혀 없는 당근? 무엇보다 질이 너무 안 좋잖아. 이런 걸 먹인단 말이야? 지원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옆에 앉아 허겁지겁 먹는 아이에게 물었다.

"넌 이게 맛있어?"

공격적인 말투였지만, 음식에 정신이 팔린 아이는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내 주둥이가 그리 고급은 아닌데 이게 정말 맛있단 말이야? 결국, 참다못한 지원이 제 음식을 잔반통에 쑤셔 박은 뒤 보육원 뒤뜰로 향했다. 지원이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았다. 아무리 들쑤셔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어제 담배를 모조리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지원이 머리를 감싸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한다고 나와서 이런 꼴이라니. 담배가 없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지원이 다시 보육원 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쯤 꼬질꼬질한 아이가 달려와 바나나를 내밀었다.

“뭐야.”

금단현상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지원이 아이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멈칫한 지원이 미안하다며 상체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지원의 손에 바나나를 쥐여주고 입술을 우물댔다.

“나 먹으라고?”
“…….”
“고마워.”

지원이 아이처럼 때가 탄 바나나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쭉 내밀었다. 아, 지금 먹으라는 거구나. 별로 질 안 좋아 보이는데. 아이의 표정은 네가 지금 여기서 먹지 않으면 울어버릴 거야! 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알았어. 먹을게.”

지원이 바나나를 입에 집어넣자 아이가 환히 웃었다. 새카맣게 멍든 바나나의 모습에 지원이 인상을 썼다. 물크덩한 식감은 씹어본 적도 좆을 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나나에 대한 평가를 바라는 얼굴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네가 줘서 더 맛있다는 대답을 하며 아이의 수준에 맞춰주었을 텐데, 지원은 그러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응. 맛있네. 라는 단답밖에 해주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지원이 바나나를 모두 씹어 넘길 때까지도 아이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다 먹었는데. 뭐 해줄까? 너도 책?"

책을 읽어주겠다는 말에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원이 발걸음을 옮기자 아이가 지원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지원은 순간적으로 아이의 손을 쳐내려다 꾹 참아내고 맞잡아 주었다. 보육원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가 책을 내밀었다. 보나 마나 유치한 전래동화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친 지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이건 네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것 같은데."

지원이 혀를 차며 말하자 아이가 울상이 되었다. 그냥 읽어줘도 되려나? 동화도 아니고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은데. 지원이 고민하자 아이가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알았어. 읽어줄 테니까 놔.”

아이의 손을 다소 거칠게 쳐낸 지원이 책을 펼쳤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영어로 되어있었다. 심지어 중간마다 의학용어도 섞여 있었다. 아이가 이해하기를 바라지도 않는 지원이 무미건조하게 읽다가 다음 문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정액을 먹어야 기운을 찾을 수 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이가 계속 읽어달라고 재촉해도 지원은 못 들은 척 눈으로 문장을 읽어내렸다. 두꺼운 책에 써진 글씨는 모두 붉은색이었다. 지원은 정리되어있는 문장을 읽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1. 정액을 먹어야 기운을 찾을 수 있다.
2. 타액으로도 기운을 되찾을 수 있지만, 정액보다 효능이 좋지 않다.
3. 기운을 되찾으면 회복력도 되찾을 수 있다.
4. 적절한……

적잘한? 적절한 뭐? 여기서 끊으면 어떡하자는 건데? 지원이 옆에 아이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팍팍 썼다. 아이는 굳어진 지원의 표정을 보고 잔뜩 겁에 질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미안해. 이리와.”

뒤늦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낸 지원이 손을 까딱여 아이를 제 옆에 두었다. 지원이 이 책은 그리 좋은 내용이 아니라며 다른 책을 가져와 펼쳤다. 아이는 그 이상야릇한 책을 읽지 못해 잔뜩 골이 난 얼굴이었다.

"뒷 내용이 잘려있어서 읽어주고 싶어도 못 읽어줘."

지원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며 단호히 말하자 아이가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게 지원은 총 세 시간을 책 읽기로 때웠다. 집에 돌아가기 전 지원은 책방으로 향해 붉은 글씨의 책을 찾았다. 왜 없지? 그 애가 가져간 건가? 지원이 소파 밑을 살피고 책장도 모조리 살펴보았지만, 그 책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행방이 묘연했다.

"하."

지원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마를 짚었다. 내가 또 귀신에 홀린 건가? 하긴, 보통 책을 붉은 글씨로 쓰지는 않잖아? 종일 헛짓거리를 했다는 생각에 허무해진 지원이 터덜터덜 걸어 보육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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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2 19:16 | 조회 : 1,08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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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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