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조선시대 오메가버스] 노비공 + 선비수 (1)








창을 열어놓은 채로 방 안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늦가을을 알리려는 듯 단풍잎과 은행잎은 떨어졌다.

양반집의 아들인 ‘한 언’은 음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때문에 음인을 양인보다 비천하게 여겼던 조선시대에 언은 집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서 창을 열어놓은채 책을 읽고 있었다.


“음인은 어찌 양인보다 비천하는가.. 참으로 이해가 안되구나”


그는 다과상을 차리러 온 여자아이를 보고는 물어보았다.

그녀는 저택에서 유일하게 언이 말을 터놓고 친하게 지내는 아이였다.


“나으리, 그리하여도 나으리는 양반집의 자제 아니십니까. 저는 음인에 천한 지라 양인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습니다”

“어허, 네가 양반의 삶을 참 모르나 보구나, 여하튼 요즈음 네가 마음에 드는 그 양인이란 누구냐?”


여자아이는 얼굴이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언에게 다가가 조용한 소리로 말하였다.


“이번에 새로 온 노비가 있습죠, 그놈이 양인인데 참말로 키도 크고 제가 본 양인 중에 가장 멋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

“그러느냐? 그리 말하니 조금 궁금하구나”

“아니되어요, 나으리. 나으리께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구요”


언은 아이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허허, 내가 그리 사랑에 쉽게 빠지는 줄 아느냐, 나에게는 오직,”

“오직? 오직 사현님밖에 없으시다, 그말이시죠?”


그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되었다, 나가거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탈이구나. 이제 새로운 말동무도 찾으련만...”

“쳇, 알겠습니다 나리, 돌쇠는 제것이니 간보지 마십시오”

“저 저...!”


언이 화를 내려하자 여자아이는 도망치듯 나갔다.


“어떻게 생겼길래 저리도 좋아할꼬...이름이 돌쇠라 하였나”


언은 어렸을 때부터 양반집의 자제로 아버님들끼리 혼담도 나누었었던 친한 사현 이라는 동무가 있었다.

일곱 살 때 사현을 처음 보고는 사현에게 반한 언은 지금인 열일곱살까지 그 마음을 사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어느날 저녁, 사현은 언을 정자 아래로 불렀다.


“..언아”

“..크흠, 왜 무엇때문에.”


언은 항상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현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나, 곧 혼인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현이 언은 그저 밉기만 하였다. 그가 진정 눈치가 없었다면 어찌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몰랐을까.


“너..!”

“안다. 언아, 네가 나를 사모하고 있는것. 허나 내 정인은 나와 혼약한 사이이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있다.”


사현은 언의 눈을 맞추며 말하다가 하늘을 올려다 별을 세었다.


“네가 나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허나 네가 나를 보는 눈이 항상 다정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
너에게 참말로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래, 한때는 나도 너에게 그러한 감정을 가진 적이 있긴 하였지.”


그는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너는 그저 친구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너는 내가 너에게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이리 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내 정인에게도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어..”

“사현아”

“...그래, 언아.”

“나는 괜찮다. 다만 아까는 잠시 놀라서 그런 것이지. 정말로 괜찮아.. 참말로.. 그래, 너에게 동정을 받는 건 차마 하고 싶지 않아.”

“언...!”


언은 정자에서 일어났다.


“현, 우리는 친구지?”


사현은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언에게 말했다.


“...그렇지, 언”


달이 그리 빛난적이 있던가, 돌아가는 길에 언은 사현이 주었던 백목련의 꽃잎을 떼어버렸다.






-






“하아,”

괜히 언은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안에 독이 가득 차 죽을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억을 지우려 했을 때 쯤, 밖에서 소리가 났다.

짜악-

언은 깜짝 놀라 잠시 닫고 있던 창을 열었다.

터엉-


“아, 나리..?”


청지기(집안 노비들의 우두머리)였다. 누군가의 뺨을 때린게 그였는지 씩씩대고 있었다.


“무슨일이길래 이리 소란스러우냐. 어찌 아버님의 시중을 들어야할 네가 여기 와있는 거고,”

“나리, 죄송합니다. 허나 이번에 새로 온 노비가 실수를 한 터인지라...”

“감히 누구앞에서 대꾸를 하는거지?”


언은 표정을 싹 굳히고 청지기에게 말하였다.


“..송구합니다.나으리”

‘저것도 나를 음인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분명해’


언의 마음속에 불완전한 관념이 또다시 살아났다.


“..그..노비를 내 처소로 올려보내거라”


언은 말을 마친 후 창을 다시 닫았다.

밖에서는 청지기가 노비에게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떻게 생겼는지만 보자, 생긴 것만 보는거야..”


그는 한 가닥 남은 목련의 꽃잎을 쓰다듬었다.


“이 잎도 언젠가는 떨어질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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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22 21:19 | 조회 : 6,962 목록
작가의 말
으자다

사현이 언에게 주었던 백목련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입니다. 한번 넣어봤어요 :) 언이 백목련의 잎 한 가닥을 남겨둔 이유는 놓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랑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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