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죄송합니다만…, 저희 도련님께서…….”

살람의 경제학 수업을 맡고 있는 에프기우스 교수가 안경을 추스르며 시녀의 말에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네, 뭐. 수업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제까지가 너무 충실한 생활이었던 겁니다.”

시녀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접어 죄송함을 표한다. 에프기우스의 시선이 그런 시녀를 향해 있다가 곧 인간미 없는 응접실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마치 각설탕 속으로 들어온 것 같군. 하얀 악어의 가죽으로 만든 소파에 티끌 하나 없는 석고 색으로 유명한 레이탄 원목의 테이블인가. 살람… 아무리 깔끔함을 추구한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중요한 사람냄새가 나질 않잖아.

“식사 전 후 그리고 취침시간. 그 외를 제외하곤 아무런 여가시간이 없다니, 고작 일곱 자를 넘긴 아이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나요?”

시녀의 눈꺼풀이 그런 에프기우스의 말에 수긍하듯 잠잠히 내려간다.

“도련님께서 원하셨기에.”

…이런 애늙은이 같으니. 분명 그 방긋방긋 빛나는 얼굴로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같은 소리를 내뱉어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흠…. 어찌되었든 수업의 당사자가 없으니 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군요. 다음 주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에프기우스가 몸을 빙글 돌려 문 쪽으로 향한다.

아참.

“수업을 빠진 사유는 뭐라고 하더랍니까?”
“…저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만, 형제분과 식사를 마치고 난 후 굉장히 화가 난 모습으로 수업을 거부하셨다고 합니다.”

형제? 아, 이번에 열 두자를 지났다던 폭스가의 장남을 말하는 건가.

그 애늙은이의 형이라―. 도무지 잘 상상이 가질 않는군.

에프기우스가 끔찍하도록 흰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 제자에게 이 말을 꼭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아래를 향해 있던 시녀의 고개가 차츰 올라간다.

“깔끔함은 무조건 흰색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제발 떨어져라… 라고 말입니다.”


*


…어느 샌가 사라졌군. 아리온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입맛대로 듣기 좋은 정보만 흘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아리온의 호박색 눈이 무감이 커튼 사이를 스친다.

뭐, 지금은 이대로도 괜찮은가.

아리온이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앉아 왼쪽 끄트머리에 놓인 종을 두어 번 흔든다.

“엘런.”
“네, 도련님.”

방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나타난 자색의 머리칼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아리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헌데, 저 모습은 뭐지?

“…무슨 싸움이라도 있었나?”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르고 돌아온 것 같군. 아리온이 엘런을 더욱 가깝게 부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엘런은 자신의 직속 시종. 언제나 주인의 곁을 맴돌고 그에 걸 맞는 행색을 해야 한다. 뭐, 이렇게 될 때까지 돌보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인가.

“잠시 이리와 보도록.”
“….”
“엘런?”

아리온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채 엘런이 고개를 푹 꺼뜨렸다.

“도련님….”

아리온이 침울한 듯 고개를 내린 엘런의 모습을 보며 건조한 입술을 매만진다. 우는 것도 같군. 그러고 보니, 며칠 새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지. 어쩐지 입술이 잘 마른다고 했다. 매번 거스러미가 생기는 입술에 부지런히 연고를 발라주던 것이 자신의 직속 시종이지 않았나.

“…커튼에 대체 무엇을 키우시고 계신 겁니까?”

커튼?

건조한 입술을 매만지던 손길이 멈췄다. 호박색 눈이 짙게 좁혀 들어가며 엘런을 응시한다.

“…뜬금없군. 그게 무슨 소리지?”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진드기가 그렇게….”

자신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잇는 엘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엘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그래서, 제가 손수….”

엘런이 말을 하는 도중 마른기침을 터뜨린다. 자연스레 나왔다기보단, 인위적으로 내뱉은 듯한 소리. 아리온은 그에 반사적으로 입을 달싹이려다 재빨리 행동을 멈추고 엘런을 바라봤다.

아, 자신은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아리온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진다.

“…치워드렸습니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소리가 귀 끝을 때린다. 울렁거리고, 익숙하지만― 기억하고는 싶지 않은.

‘너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지?’

끝없는 어둠이 ‘그’의 모든 것에 담겨 일렁인다.

‘나인가?’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누군가의 핏물이 바닥 위로 떨어진다.

‘아니면―.’

문득 아리온의 숨이 멈춘다.

‘그대의 누이인가?’

그래, 그의 손끝, 그 어디든. 난 절망에 빠져야 했다.

아리온의 눈이 질끈 감긴다. 붉게 물든 나의 누이. 붉게 물든 누이의 얼굴이… 곧 새까맣게 변해간다.

나는 알고 있을 터다.

누이의 몸을 덮은 저 피들은, 곧 나의 모든 것이란 걸.

나는 그럼에도 그의 아래에 조아려 입을 움직였다.

‘주군입니다.’

세상은 그곳에서부터 깨어졌다.

아리온의 손이 종 옆, 잉크 통을 집어 든다.

“엘런.”
“…….”
“책상이 더러워졌구나.”

불시에 잉크가 책상 위로 쏟아진다.

“치워야지. 더러워졌으면.”
“…도련님.”
“하지만 엘런. 이 책상을 더럽게 만든 것은 누구의 과실이지? 잉크 통을 엎지르기 전 말리지 않은 너의 잘못인가? 아니면 더러워질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엎지른 나의 잘못인가?”
“저는….”

나는 이 약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을 잃을까 두려운 목소리. 후에는 힘에 굴복하여 스스로 머리를 조아릴 목소리.

“이럴 땐 이렇게 말하면 된다. 모든 것은 더러워질 것을 담아버린 잉크 통의 잘못이라고.”

아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엘런의 앞에 선다. 그들의 뒤에서 책상을 타고 흘러내린 잉크의 소리가 뚝, 하고 울린다.

“무슨 일이 있었지?”

가까이서 마주한 엘런의 모습은 더욱 처참하다. 구타…와 칼자국인가.

엘런의 목 뒤에 남은 미세한 칼집이 정확히 신경을 노리고 있다.

아리온이 방으로 들어온 한 인기척에 제 손을 단단히 말아쥔다.

“…정말 죄송합니다.”

엘런이 울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갤 들어 아리온을 마주쳐온다.

콰앙! 굉음이 터져 올랐다.

2
이번 화 신고 2019-06-27 12:09 | 조회 : 1,467 목록
작가의 말
nic23075521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